<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0화>
50화. 됐다
11명의 기자가 참석한 채로 시작된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 발표회.
기자들은 안시현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쏟아 냈다.
불과 얼마 전 최종 스코어 39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의 주연으로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 줬으며, 대한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한 배우이기에 당연한 관심이었다.
“먼저 안시현 배우님께 묻겠습니다. 『너와 나의 시간』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작가님께서 먼저 제 소속사에 연락을 주셨습니다. 대본을 본 순간 정영빈 캐릭터에게 마음을 뺏겼고,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오디션을 보게 됐습니다.”
“방영을 1주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KNC의 『거짓말』이 시청률 50%를 돌파할 기세인데, 주연 배우로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까?”
“제 능력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연기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한들 후회하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저희 드라마의 시청률이 부진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공교롭게도 『너와 나의 시간』과 『거짓말』 모두 재벌 2세가 남자 주인공입니다. 일각에서는 최우종 배우님과 안시현 배우님의 맞대결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와의 비교는 최우종 선배님께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너와 나의 시간』과 『거짓말』은 같은 소재를 채용했지만, 드라마의 방향성이 다르기에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기도 하고요. 아, 참고로 저희 드라마는 재벌가의 암투가 아닌 로맨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정석과도 같은 대답.
안시현은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감을 드러냈다. 적절하게 『너와 나의 시간』을 홍보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기자들의 반응 또한 호의적이었지만…….
“마지막 질문입니다. 안시현 배우님께서는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을 어느 정도로 예상하십니까.”
“평균 시청률은 예상이 어렵지만, 최고 시청률은 40%를 넘길 거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 질문의 대답을 듣고서 기자들이 술렁였다. 몇 기자들은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시청률 40%.
시대를 감안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수치다. 최고 시청률 50%를 넘는 드라마도 종종 나오고, 『거짓말』 또한 50%를 넘길 기세이지 않은가.
문제는 『너와 나의 시간』이 처한 상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다. 주연 배우인 안시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다.
때문에 안시현의 마지막 대답은 과한 자신감, 혹은 오만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혹시 시청률 가지고 저와 내기하실 분? 제가 지면 거하게 식사 한 끼 쏘겠습니다.”
안시현은 시청률을 가지고 내기를 하자고까지 했다. 진짜로 내기를 하려는 게 아닌, 기사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의도한 행동이었다.
물론 시청률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불안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안시현이 자신감을 드러내는 건, 촬영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어서다. 몇몇 변수가 발생했던 것 외에는 아주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변수들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배우들끼리 더욱 똘똘 뭉쳐 촬영에 집중하는 계기가 됐으니까.
또한 안시현의 예상보다 20대 배우들의 연기력이 좋았다. 대체로 촬영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연기력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특히나 차연우의 성장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당돌한 성격의 안수진을 기대 이상으로 잘 표현했다.
백미인 정영빈과의 감정선은 수줍어하는 연기가 일품이었고, 정영빈과 스킨십을 하거나 애정 섞인 멘트를 들을 때면 귓불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연애 초보의 모습을 잘 연기해 줬다.
회귀 전 이맘때의 차연우와는 거의 딴사람이었다.
밑바탕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연기가 눈에 띄게 자연스러워졌고, 정영빈과의 이성 관계에 한정해서는 안시현도 가끔씩 놀랄 만큼 엄청났다.
주연 배우 둘이 연기를 잘해 줬다.
중견급 배우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20대 조연 배우들도 각각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냈다. 거기에 좋은 대본을 써 주는 작가와 빼어난 연출력을 지닌 PD까지 존재한다.
흥행을 확신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안시현이 내기 발언을 꺼내고 얼마 후.
“허허허. 역시 우리 막둥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기자님들, 50%가 넘을 거라고 예상하면 기사 한 줄 써 줍니까?”
박국영이 화답해 줬다. 아니, 화답 수준을 넘어 맞불을 놓아 버렸다.
40%를 넘어 50%를 예상한 것이다.
기자들은 두 배우의 발언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대치가 낮은 드라마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 위해 다소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예상 시청률을 높게 잡는 거야 애교 수준이다.
의도적으로 배우의 스캔들을 터트리는 것을 포함해 작정하고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경우도 있고, 훗날에는 온갖 공약을 걸며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니까.
물론 몇몇 기자들은 여전히 비웃음을 흘렸다.
대놓고 그런 건 아니지만, 고개를 돌리거나 입을 가리고 있음에도 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기자들을 지켜보며…….
‘당연히 우습게 보이겠지. 뭐, 『거짓말』의 방영이 끝나고도 비웃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안시현의 의욕이 고무됐다.
* * *
제작 발표회 이후.
『너와 나의 시간』은 막바지 촬영에 매진했다.
제작진도 배우도, 관련 기사나 시청률 예상은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촬영에만 온전히 신경을 쏟았다.
제작 발표회에 대한 관심을 보고서 배우와 제작진 모두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방영 초반, 시청률을 기대해선 안 된다.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애국가 시청률만큼은 면하는 정도였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이어 나갈 최소한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안시현, 『너와 나의 시간』 통해 연기 변신.
-안시현, ‘최고시청률 40% 넘겠다.’ 포부 밝혀.
-‘함께 작품 했으면 좋겠다.’ 최우종, 안시현 향한 공개 러브콜.
-‘10년 후 최고가 될 배우.’ 최우종이 극찬한 신예, 또 다시 연기 변신에 성공할까?
『너와 나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없어도 안시현에 대한 관심은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호재가 더해졌다.
『거짓말』에서 남주인공 지호명 역을 맡아 열연 중인 톱스타 최우종이, 안시현을 극찬하면서 함께 작품을 하고 싶다고 인터뷰를 한 거다.
덕분에 예상보다 더 많은 기사가 나왔다.
경쟁작의 주연 배우를 극찬하는 최우종의 인성을 칭찬하는 기사가 대부분이었지만, 덩달아 안시현과 『너와 나의 시간』에 대한 기사가 늘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시사회 때 우종 선배님 연락처를 받아 놓을 걸. 나중에 영민 선배님께 슬쩍 물어봐야겠다. 감사 인사는 전해야지.’
안시현과 최우종의 만남은 『나는 간첩입니다』 시사회가 전부다. 그 이후로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최우종은 안시현을 극찬해 줬다.
아무래도 『나는 간첩입니다』 시사회 때 안시현을 좋게 봐 준 영향이 큰 걸로 보였다.
안시현의 입장에서야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너와 나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대중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까.
그로부터 일주일 후.
2000년 7월 12일.
9화의 3분의 2 이상을 촬영한 상황에서,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과 배우들이 한 식당을 방문했다.
늦은 저녁 식사 겸 1화의 본방 사수를 위해서였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가운데, 대부분의 제작진과 배우들의 시선은 가게 구석에 비치된 작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이 작지만 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눈치 보지 않고 소리를 키울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오! 시작한다!”
차연우의 외침과 동시에, 『너와 나의 시간』의 첫 방송이 마침내 전파를 탔다.
이른 오전.
오픈 준비에 분주한 백화점.
한 사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보세요.”
사내의 정체는 J백화점 사장인 정영빈.
그는 주차장부터 꼭대기 층까지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면서 올라갔다. 백화점 전체를 자신의 눈으로 살펴보고 문제점을 체크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하면 담당자를 불러 문책하는 건 보너스였다.
집무실에 올라온 뒤에는.
“박 본부장님, 그리고 임원 여러분.”
임원들과 함께 짧은 아침 회의를 했다.
아니, 사실 회의라고 부르기에도 뭐했다. 사실상 정영빈이 임원들을 질책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으니까.
“변명 듣자고 여러분 부른 거 아닙니다. 입이 아닌 결과로 증명하세요. 2월 매출이 반등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 절반은 옷 벗으셔야 할 겁니다. 제가 괜히 여러분께 비싼 월급 주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드라마 초반에 비춰진 정영빈은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완벽주의자 사장님 그 자체였다. 안시현은 싸가지 없는 성격과 광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정영빈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오죽하면.
“와…… 겁나 재수 없어.”
촬영 내내 정영빈과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춰 온 안수진 역의 차연우가 재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안시현의 연기가 좋았다.
차연우의 발언 이후 배우와 스태프 할 거 없이 웃음이 터진 건 보너스였다.
싸가지 없는 완벽주의자 백화점 사장의 내면 심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건, 신입사원 면접에서 안수진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안수진은 평범했다.
집안 환경도 평범하고 스펙도 그저 그랬다. 자격 조건만 놓고 보면 합격시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심지어 J백화점의 추후 발전 방향성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 온 건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면접이 끝난 뒤.
“235번…… 안수진 씨라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합격시키고 명품관에서 근무시키세요.”
정영빈은 안수진의 합격을 지시했다.
“네? 하지만 안수진 씨는 학력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외국어도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한 수준이던데요.”
“그럼 서울대 나오신 박 본부장님은 안수진 씨처럼 백화점의 매출을 향상시킬 이벤트 안건을 준비해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준비해서 진행해도 될 것 같은 아이디어들로만 구성해서 말입니다.”
“그건…….”
“합격시켜야 할 거 같죠?”
정영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말보다 더 무서운 미소에, 본부장은 뭐라 말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날 이후.
정영빈은 안수진에게 관심을 가졌다.
뭐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는 여자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감정 표현이 다양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안수진에 대한 관심은 날로 커져갔다.
평소에는 샌드백을 치거나 스파링을 하면 머릿속을 말끔히 비울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땀을 흠뻑 흘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안수진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정영빈은.
“20대 중반의 여성들은 보통 뭘 좋아합니까? 마케팅 차원에서 조사를 좀 할까 하는데. 이를 테면 퇴근하고 하는 취미 생활이나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 같은 거 말입니다.”
안수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정영빈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1화가 끝이 났다.
2화에 예고편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제작진과 배우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예고편이 모두 끝났을 때.
“허허허…….”
박국영이 최창국 PD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PD님, 도대체 왜 지금껏 메인을 맡지 못하셨던 겁니까? 이렇게나 연출을 잘하면서.”
“아…… 잘 나온 것 같습니까, 선생님?”
“잘 나왔다마다요. PD님의 연출이 1화를 살렸습니다. 장담하는데, 1화를 시청한 사람들은 도저히 2화를 안 보고는 못 배길 겁니다. 정신 차려 보니 1화가 끝나 있을 거고, 예고편을 보고 있자니 2화의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을 테니 말이죠.”
1화의 경우 철저하게 정영빈과 안수진 중심으로 흘러가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최창국 PD는 그것을 기가 막힌 연출력으로 커버해 버렸다. 지루해 질 만한 부분을 적절한 BGM의 사용과 연출로 커버했으며, 시청자들을 집중시켜야 할 부분에서는 안시현과 차연우의 연기력을 살리는 데에 집중했다.
적절한 완급조절로 1화가 방영되는 내내 지루해 할 틈도 없이 두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박국영이 말한 대로.
대부분의 스태프와 배우들은 내용을 알면서도 정신없이 TV를 봤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예고편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작 엄청난 연출력을 보여 준 최창국 PD는, 아직 자신의 연출력이 얼마만큼이나 뛰어난지 깨닫지 못한 눈치였지만 말이다.
한편 안시현은…….
‘됐다.’
남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무 좋아서, 흥분돼서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드라마, 무조건 성공한다.’
1화를 본 순간.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불안함마저도 사라졌다. 최창국 PD의 환상적인 연출력을 몸소 체험하고 나니 흥행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이는 다른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
“내일 뵙겠습니다! 저희 드라마 대박 날 거 같아요!”
“1화 너무 좋았어요! 예고편 보니까 2화 안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다들 내일 봐요!”
다들 1화에 대한 코멘트를 남긴 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들어가서 자고, 다음 날 좋은 컨디션으로 촬영에 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MBS 드라마국을 방문한 최창국 PD는 전날의 시청률표를 받아 들었다.
“허…….”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송 3사의 9시 55분 수목드라마 시청률은, 최창국 PD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