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2화>
52화. 뭐가 문제인데!
2000년 7월 21일 금요일.
전날의 시청률표를 받아 든 KNC 드라마국 국장은, 『거짓말』의 CP를 국장실로 불렀다.
출근하자마자 시청률표를 확인한 CP는, 국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은 대박이 난 드라마다. 1999년 1월 이후 1년 넘게 이어져 온 KNC의 수목드라마 참패의 굴레를 마침내 벗겨주지 않았던가.
거액의 제작비가 결코 아깝지 않은 작품이 분명하다.
시청률 50%를 넘어 55%까지도 가능할 거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흘러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49.7%, 그리고 49.9%.
각각 19화와 20화에서 『거짓말』이 거둔 성적표다. 좋은 시청률이지만, 클라이맥스인 22화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넘지 못했군.”
“……면목 없습니다, 국장님.”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자네랑 박 PD가 고생하는 거 뻔히 아는데 말이야. 다만…….”
툭. 툭. 툭.
국장이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꿀꺽.
CP가 마른침을 삼켰다. 국장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이 됐다.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나.
“이거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마침내 심각한 표정의 국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시청률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STS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3화와 4화에서 연달아 문제점을 드러내더니, 결국 6화에서는 시청률 5.1%까지 내려앉았다.
거기에 내부에서의 잡음 또한 들려오고 있다.
시청률에 방해될 만한 여지가 전무하다.
문제는 MBS 쪽이다.
『너와 나의 시간』은 4화에서 9.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10%를 코앞에 두고 있으며, 언론에서도 연신 드라마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고 있다.
한 번 보면 다음 화를 안 볼 수 없는 드라마라고, 기억에 남는 대사와 특색 있는 캐릭터를 기가 막힌 연출이 살려준다고, 『거짓말』이 종영하면 순식간에 30%를 넘어 40%대의 시청률을 기록할 거라고.
KNC 드라마국 국장이 봤을 때, 『거짓말』이 19화에 20화에서 시청률 50%를 넘지 못한 건 순전히 『너와 나의 시간』의 상승세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시청률이 50%를 넘지 못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승세가 주춤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정 차장, 자네 『거짓말』과『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비 차이가 몇 배인 줄 알고 있나?”
“정확히는…… 모릅니다.”
“내가 알기로는 8배가 넘어. 그런데 그 드라마의 시청률을 봐. 벌써 10% 가까이 됐어.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드라마가 방영 중인데도 상승세라고.”
“STS 쪽이 알아서 무너져 준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최우종 배우의 발언도 영향을 조금이나마 끼쳤을 테고요.”
“평범한 드라마였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문제는 『너와 나의 시간』은 쥐꼬리 수준의 제작비에, 이름값 부족한 배우들로 캐스팅라인을 꾸린 드라마라는 거야. 방영 전까지 아예 관심을 못 받았던 드라마라고.”
“조건에 비해 대단한 상승세인 건 맞지만, 그래 봐야 저희의 상승세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겁니다.”
거짓말의 CP인 정 차장은 국장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상승세를 『사랑하고 싶어』가 무너져 준 덕분이라고 봤다. 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정 차장은 『거짓말』을 믿었다.
22화를 위해 조연출들이 무려 8일 동안 퇴근조차 하지 않고 편집에 매달렸다. 문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어서 최고의 퀄리티를 뽑아냈다.
게다가 시청률 50%까지는 고작 0.1% 남았다.
21화에서는 50%를 무조건 돌파할 거고, 22화에서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할 거라 확신했다.
정 차장은 만약 21화에서 시청률 50%를 넘지 못한다면 시말서라도 쓰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거짓말』의 상승세가 계속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국장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만약 50%에 근접한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상황에서, 『거짓말』이 방영을 시작했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까?
결국에는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을 테지만, 『너와 나의 시간』처럼 초반에 상승세를 기록하는 건 어려웠을 터다.
그래서 『너와 나의 시간』이 무서웠다.
배우들의 이름값도, 부족한 제작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좋은 대본과 신들린 연출, 배우들의 수준급 연기력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고 있었다.
KNC 드라마국 국장은 애써 불안한 감정을 억눌렀다.
정 차장이 말한 것처럼, 클라이맥스를 앞둔 『거짓말』이 『너와 나의 시간』의 상승세를 찍어 눌러줄 거라 믿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지막 화 촬영까지 얼마나 남았지?”
“다음 주 수요일이면 끝납니다.”
“촬영 끝나는 대로 거하게 회식 한번 해. 박 PD 보너스 두둑하게 챙겨 주고.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여론전 한번 제대로 해 보자고. 한 명의 시청자라도 더 TV 앞에 앉혀야 하지 않겠어?”
KNC에서 간만에 나온 수목드라마 대작이다.
다른 드라마에게 발목 잡혀 방영 막바지에 시청률이 주춤하는 일 따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40%를 찍든, 50%를 찍든 『거짓말』의 방영이 끝난 다음에 노려야 할 거야. 그 전에는 어림도 없어.’
KNC 드라마국 국장은, 『거짓말』의 방영 초반 이후로는 굳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일을 다시금 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너와 나의 시간』 4화의 방영 다음 날.
『너와 나의 시간』제작진이 두 팀으로 나눠졌다.
한 팀은 촬영장에서, 다른 한 팀은 극중 안수진이 살고 있는 옥탑방이자 실제 한 스태프가 거주 중인 집에 모였다.
후자의 경우 최소한의 스태프만 배치됐다.
촬영 스케줄이 워낙 빡빡해 옥탑방 촬영에 많은 인원을 할애할 수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안시현과 차연우가 몰입을 위해 최소한의 스태프만이 촬영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
차연우와 안시현은 수차례 대사를 주고받으며 미리 점검을 했다. 스태프 중 어느 누구도 그런 두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최창국 PD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안시현과 차연우를 지켜보았다.
준비가 되면 안시현이 사인을 보낸다고 했기에,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 줬다.
‘정영빈과 안수진은 6화에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7화에 8화에서 두 사람의 스타일로 연애를 즐긴다. 이 신은 8화의 정점을 장식해 줘야 돼. 그걸 알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아 준 거야.’
8화의 대미를 장식할 신이자, 정영빈과 안수진의 극 후반부가 되기 전까지 순수한 감정으로 연애하는 마지막 신이며, 후계 구도에 관한 정영빈의 신념이 흔들리게 만드는 신.
많은 의미를 지닌 신이기에 안시현과 차연우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무조건 원테이크로, 두 번은 없다는 각오로 준비를 해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최창국 PD에게 미리 이야기했던 사인이자, 그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
최창국 PD가 스태프들을 향해 손짓했다. 동시에 PD들이 안시현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시작된 촬영은…….
“OK.”
한 번에 끝이 났다.
두 번의 시도는 필요하지 않았다.
최창국 PD는, 여기서 뭔가를 더 요구한다면 배우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이 신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
그만큼 안시현과 차연우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줬다.
OK 사인이 나온 뒤.
몰입에서 빠져 나온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은 듯한 차연우를 바라보았다.
“수고했어요, 누나. 한 번에 끝내서 다행이에요. 이 감정으로 두 번 연기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어…… 어. 너도 수고했어. 네가 너무 잘해 줘서 난 그냥 정신없이 호흡만 맞춘 거 같네.”
있는 감정, 없는 감정을 모조리 쥐어짜서 연기했다.
솔직히 다시 촬영을 하라고 한다면, 방금 전과 같은 감정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원테이크로 끝나길 바란 것이었다.
오죽하면 앞으로의 연기 인생에서 이 정도로 연인 사이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파트너인 차연우가 제대로 발걸음을 맞춰준 덕분이기도 했다.
“에이, 아니에요. 누나 감정 연기 좋았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하는 표현이 일품이었는걸요.”
“그랬으면 다행이고. 후우. 오늘 날씨 덥네. 나 먼저 촬영장 가 있을게.”
“네, 누나. 촬영장에서 봐요.”
차연우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안시현은 옥탑방 안에서 최창국 PD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최창국 PD는 벌써부터 방금 전 촬영한 신을 편집하는 걸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안시현과 차연우의 연기가 완벽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길.
안시현은 대본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이러면 굳이 버틸 필요가 없겠는데? 7화가 방영된 다음에 주연 배우와 제작진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던가? 이제 곧 호흡기 떼겠네.’
『거짓말』의 클라이맥스인 22화와 맞붙어야 할 6화의 촬영도 잘됐고, 달달한 연애의 정점을 보여 줄 8화의 촬영 또한 순조롭게 끝났다.
거기에 외부의 상황 또한 긍정적이다.
『사랑하고 싶어』는 3화부터 6화까지 꾸준히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7화가 방영된 이후 내부의 문제가 기사화되며 더욱 밑바닥을 치게 된다.
결국에는 애국가 시청률을 기록하기까지 한다.
오죽하면 대중들이 『사랑하고 싶어』가 아니라, 주연 배우의 하차와 이로 인한 STS와의 법적 분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말까지 나돌았을까.
『너와 나의 시간』의 입장에서는, 시청률 상승을 기대할 만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15%만 되도 베스트인데……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거려나?’
4화에서 9.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작품에 문제만 없다면 8화에서 15%가 아니라, 그 이상을 노려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동시간대에 시청률 49.9%를 기록하며, 50% 초읽기에 들어간 드라마가 방영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에휴.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솔직히 지금 시청률도 모두의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오고 있는 거잖아. 10% 내외만 유지해도 치고 올라가는 데에는 문제없을 거니까.’
안시현은 설레발을 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짓말』이 종영하는 8화까지 더 많은 시청률을 긁어모을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승세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8화가 방영되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화제성 또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남은 건 상승세뿐이다.
안시현은 하루빨리 8화의 방영일이 다가오기를 바랐다. 방영이 끝난 이후 언론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 * *
『너와 나의 시간』5화의 막바지.
밤새 지점 관련 외부 미팅 준비를 끝마친 정영빈이,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졸린 눈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안수진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정영빈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몇 시간 후 다시 업무를 봐야 하기에 잠깐 쪽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눈을 감으니 오전에 봤던 안수진의 환한 미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이 들기 전.
“아…… 보고 싶다.”
정영빈의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5화가 끝이 났다.
이윽고 방영된 예고편에서는 1화부터 5화까지 주야장천 밀고 당기기를 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마침내 진전될 거라는 걸 은근히 드러냈다.
그러다가.
“저 사장님…….”
차 안에서 안수진이 정영빈에게 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대사를 끝까지 들려주지 않고 예고편을 마무리했다. 누가 봐도 고백할 것 같은 타이밍에, 가장 중요한 멘트를 잘라버리는 선택을 했다.
이는 최창국 PD가 준비한 비장의 한 수였다
또한 시청자들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안수진이 정영빈한테 뭐라 말했을까요? 둘이 사귈까요, 안 사귈까요? 궁금하면 방송으로 확인하세요.
다음 날.
『거짓말』의 CP인 정 차장은, 출근하자마자 시청률표를 받아 들고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몇 번을 거듭 확인하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기 어려웠다.
‘왜…… 왜!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결국 그는 속으로 절규했다.
KNC 『거짓말』 - 49.5%
MBS 『너와 나의 시간』 - 11.3%
STS 『사랑하고 싶어』- 4.1%
예상과 달리, 『거짓말』의 21화는 또다시 50%의 고지를 넘지 못했다. 오히려 20화보다 소폭이지만 시청률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반면 『너와 나의 시간』 5화는 마침내 10%를 돌파, 11.3%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상승세를 탔다.
결국, KNC 드라마국 국장이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시청률표를 확인하고 얼마 후.
정 차장은 국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 순간.
그는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시말서를 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어딘가에 대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