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4화>
54화. 여기 있잖아
“허허허. 이 사람아. 추가 편성되는 제작비가 적지 않아. 기존 편성액의 3배가 넘는다고. 딱 10화만 늘리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네, 어렵습니다.”
“자네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작가와 배우들과도 이야기를 해 본 다음에 답하는 게 순서 아니겠어?”
“김희숙 작가님과 주연 배우분들과는 일찌감치 이야기가 된 부분입니다. 최근에 조연 배우분들도 모두 동의했고요. 설마, 이런 큰 건을 저 혼자 결정하고 답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게. 지금 와서는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잖나?”
“으음…… 알겠습니다.”
고민 끝에 최창국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백날 말로 해 봐야 국장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제작비를 3배나 추가 편성해 주겠다고 하는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거절하면 그 어떤 국장이 쉽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국장의 입장이라 해도 기존에 적게 편성됐던 제작비와 소홀한 홍보 등으로 서운함을 느껴 거절했다고 결론지었을 거다.
“통화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편하게 하게.”
“알겠습니다.”
최창국 PD가 전화를 걸었다.
대상은 총 세 명.
김희숙 작가, 차연우, 그리고 안시현이었다.
세 사람에게 나란히 제작비가 기존의 세 배가 넘게 편성되는 대신, 34화까지 연장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국장의 제안을 있는 그대로 들려줬다.
이에 세 사람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연장은 절대 안 돼요. 제작비야 늘면 좋지만, 죄송하지만 전 대본을 늘리면서 퀄리티를 유지할 자신이 없어요.
-연장이라면 안 하기로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뭐, 저야 다들 동의하면 따르기는 하겠지만…… 썩 내키지는 않네요. 개인적으로『너와 나의 시간』은 지금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아, 저 지금 촬영장인데 선배님들께 한번 물어볼까요? 끊지 말고 5분만 기다려 주세요. 여보세요. PD님? 선배님들 모두 생각 없다고 하시네요.
다르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여 줬다.
다들 연장 방영은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
심지어 안시현은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에게 즉석으로 물어보고 답을 해 주는 정성까지 보여 줬다.
‘그럼 그렇지.’
최창국 PD는 세 사람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다수가 연장 방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와 나의 시간』의 대본 리딩 당시.
혹시나 시청률이 잘 나와서 제작비가 추가 편성되고, 연장 방영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가 한 번 나왔었다.
당시 김희숙 작가는 단호하게 답했다.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가는 게 좋겠네요. 전 연장 방영에 부정적이에요. 제 주제를 잘 알거든요. 연장하면, 100% 대본 무너져요.”
그리고 5화가 방영되고 난 다음, 현장에서는 다시 한번 연장 방영 이야기가 나왔다.
『거짓말』의 시청률을 처음으로 하락시켰고, 상승세를 탈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MBS 드라마국이 제작비 추가 편성과 연장 방영이라는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배우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배우들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김희숙 작가는 조연에게도 눈에 띄는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는 곧 배우들에게 대박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연기한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연기만 잘하면 된다는 확신을 품게 만들었다.
실제로 언론들은 정영빈과 안수진에게만 집중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빛나게 해 주는 조연들의 캐릭터성에도 꽤나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이 연장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무리한 연장으로 대본의 퀄리티가 확 낮아지며 드라마의 평가가 내려가는 것보다야, 완성도 높은 24화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쪽이 이득이라는 게 『너와 나의 시간』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세 사람과의 통화를 끝낸 뒤.
최창국 PD가 고개를 들고서 국장을 바라보았다.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희숙 작가님은 24화 이후의 대본을 집필할 생각이 없다 하셨고, 배우들 또한 연장 방영 불가에 동의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통화를 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이 정도면 됐네.”
대화를 모두 들은 건 아니지만, 핵심 키워드는 얼핏 엿들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국장실 내에서 통화를 하라고 한 것이었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이해는 안 됐다.
제작비 추가 편성과 연장 방영은 『너와 나의 시간』에 엄청난 이득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작가가 24화 이후의 대본을 집필할 생각이 없다 못을 박았고, 배우들 또한 이에 동의한 상황이다. 이 정도면 제작비를 얼마나 더 올려 줘도 연장 방영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다들 싫다는데 자네가 뭐 어쩌겠냐. 아, 그래도 제작비는 추가 편성될 거네. 연장 방영이 아니라 줄어들긴 하겠지만, 부족함을 느낄 정도는 아닐 걸세.”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감사하면 최고 시청률 50% 넘기게. 만약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네의 부탁 하나는 내 무조건 들어주지.”
최창국 PD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하신 말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필요하면 녹음이라도 해 주지.”
“아, 역시 그게 좋겠죠?”
최창국 PD는 시청률 50%가 넘으면 어떤 부탁이건 하나를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국장의 말을 진짜로 녹음한 뒤에야 국장실에서 나갔다.
MBS 드라마국 국장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신입 시절이나 지금이나 참 당돌하단 말이야. 저 성격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조연출을 벗어났을 텐데……. 뭐, 이제라도 빛을 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더 이상 자격 운운하면 트집 잡지는 않을 테니.”
그리고는.
『너와 나의 시간』을 버리는 카드로 쓰려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추가 제작비 편성안에 사인했다.
* * *
추가 제작비의 집행은 삽시간에 진행됐다.
덕분에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진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촬영 일정은 여전히 빡빡했지만, 적어도 여유롭지 못한 제작비로 인해 고생할 일은 줄어들었다.
늘어난 제작비와 별개로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 현장 분위기는 항상 좋았다.
특히나 6화의 방영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안시현은 동료 배우들과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며 연기에 임했다. 시청률의 상승 덕에 주연 배우로서의 부담감을 조금 덜게 됐지만, 책임감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기가 한 신이라도 흔들리면 드라마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매 순간 상기했다.
이른 새벽.
촬영을 끝마친 안시현이 차에서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오전부터 자정까지 촬영을 한 탓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친 상태였다.
“시현아, 집에 다 왔다. 업어다 줄까?”
“아…… 괜찮아요, 형. 내일은 오후 촬영이죠?”
“정확히는 오늘이지. 2시부터 촬영이야. 낮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말복인데 백숙이나 먹자.”
“그럴까요? 형, 혹시 저 전화 안 받으면 들어와서 깨워 줘요. 너무 피곤해서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오냐. 오늘도 고생 많았고, 낮에 보자.”
안시현이 반쯤 감긴 눈을 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김진모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 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하지만.
막상 잠을 자려고 하니 다음 날 촬영할 대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안시현은 거실로 나왔다.
선풍기를 틀고 TV를 켰다. 그리고는 거실 한구석에 잔뜩 진열된 비디오테이프 중 하나를 재생시켰다.
영화를 틀어 놓고서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요즘 진모 얼굴 보기 힘드네.’
최근 들어 김진모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너를 부르다』의 방영이 8월 말로 확정되자, 촬영에 좀 더 몰입하고 싶다는 이유로 촬영장 근처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어서였다.
그 탓에 안시현은 열흘 넘게 김진모를 못 봤다.
촬영이 없는 날, 응원 차 김진모의 촬영장을 방문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안시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5화랑 6화 잘 봤어요. 출장 다녀오느라 이제 봤네요. 시청률도 상승하고 있던데, 대박 났으면 좋겠네요. 항상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정혜영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잘 봤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늦었는데 안 자고 있었어요?
-촬영 끝내고 방금 왔어요. 이제 슬슬 자려고요.
-고생하는 만큼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연말 연기대상 한번 노려 봐야죠? 언제 시간 나면 말해 줘요. 간만에 식사라도 같이하게요.
안시현은 한참 동안 정혜영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받은 뜻밖의 연락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 * *
2000년 8월 2일 목요일 저녁 9시 55분.
『거짓말』 23화, 『너와 나의 시간』 7화, 『사랑하고 싶어』9화가 전파를 탔다.
그 결과.
KNC 『거짓말』 - 47.1%
MBS 『너와 나의 시간』 - 14.9%
STS 『사랑하고 싶어』- 3.3%
『거짓말』은 최종화만을 남겨 둔 시점에서 최고 시청률 50%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이 사실상 좌절됐고, 『사랑하고 싶어』는 소폭이지만 또다시 시청률이 하락했으며, 『너와 나의 시간』은 이제 15%까지 단 0.1%만을 남겨 두게 됐다.
이에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은, 8화에서 시청률 17% 내외를 달성하기를 바랐다.
『거짓말』의 최종화가 방영되기에 시청률이 확 오르지는 않을 테지만, 정영빈이 안수진에게 병문안을 가고 그 과정에서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될 8화는 시청률 상승을 노리기에 충분한 회차였다.
키스신이 예정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방영된 『너와 나의 시간』 8화.
어느 날.
뜬금없이 안수진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문자메시지를 해 봐도 답장이 없었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정영빈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비서 유은서에게 슬쩍 물었다.
“유 비서, 안수진 씨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아까 보니까 출근 안 한 것 같던데요.”
“아, 수진이 몸살 나서 병가 냈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걱정돼서 이따가 병문안 가 보려고요.”
순간 정영빈의 표정이 굳었다.
차를 내리며 대화를 하는 상황이라 유은서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안수진과의 연애는 유은서를 포함해 당분간 그 누구도 모르게 비밀로 해야만 하니까.
“이거 큰일이군요. 안수진 씨가 맡은 프로젝트 준비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될 텐데…….”
“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거의 마무리 단계이고, 제가 퇴근하기 전에 최종 검토를 해 주기로 했거든요. 덕분에 전 조금 늦게 퇴근해야 하겠지만요.”
유은서가 늦게 퇴근한다.
좋은 정보를 얻은 정영빈이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유은서로부터 찻잔을 건네받았다.
“유 비서, 전 오늘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사장님?”
“그냥 좀 피곤하네요. 몸이 으슬으슬한 거 같기도 하고요.”
“어머! 사장님도 혹시 몸살 온 거 아니에요?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 아니면 주치의 선생님께 연락해 볼까요?”
“그러지 마세요. 오늘 쉬는 날이신데 뭘 이런 걸로 다 연락을 합니까.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됩니다.”
그렇게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퇴근한 정영빈은, 다음 날까지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한가득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들고서…….
“……사장님?”
안수진의 병문안을 갔다.
갑작스러운 정영빈의 방문에,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연 안수진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여자친구 병문안 왔지. 몸은 좀 어때? 병원은 가 봤고?”
“몸살 가지고 무슨 병원이에요. 죽 해 먹고 한숨 자다가 막 일어난 참이에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정영빈이 피식 웃었다.
평소 최소한의 지출만을 하며 가족들에게 월급을 보내 주는 안수진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병원에 가지 않았을 거라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다.
그래서 그에 따른 대책 또한 준비해 왔다.
정영빈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5분 후에 올라오시면 됩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한 정영빈이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으며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집 안에 치워야 할 거 있으면 치워. 5분 줄게.”
“방금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 누가 또 와요?”
“주치의 선생님. 밑에서 기다리고 계셔. 덤으로 수액이랑 뭐 이것저것 좀 챙겨 왔지.”
정영빈의 말에 안수진이 어이를 상실했다.
“주치의 선생님 모시고 병문안 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이에 정영빈은 당당하게 답했다.
“어디 있긴. 여기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