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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55화 (5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5화>

55화. 이제부터 시작

정영빈과 안수진은 주치의의 진찰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주치의를 통해 확실히 검사를 받고 넘어가자는 정영빈과, 고작 몸살로 주치의를 부른 건 과하다는 안수진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실랑이의 승자는 정영빈이었다.

물론 안수진은 단순히 피로 누적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린 것이었고, 주치의가 한 거라고는 수액을 놔 준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덕분에 정영빈은 안수진에게 한참 동안 핀잔을 들은 이후에야 주치의를 배웅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시동을 건 주치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쉬는 날인데 호출해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괜찮아. 이러려고 비싼 돈 주는 거잖아? 그나저나…… 네가 누군가와 웃고 농담하는 거,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래요.”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중요하지. 연애는 할 만하고?”

“…….”

정영빈이 생각에 잠겼다.

안수진과의 연애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말을 어렵사리 떠올렸다.

“으음. 네. 행복합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마.”

“감사합니다, 아저씨.”

주치의를 배웅한 정영빈이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수액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안수진에게로 다가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댔다.

“자?”

“그냥 눈 감고 있었어요.”

“수액 맞으면서 한숨 자. 죽 만들 재료 좀 사 올…….”

정영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안수진이 몸을 돌리려던 그의 옷깃을 잡았기 때문이다.

“요리는 됐어요. 그보다 전에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어요?”

“당연하지. 내 인생 최악의 굴욕을 겪었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오락실에서 게임 한판 졌다고 굴욕이라니,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항상 1등만을 해야 했던 삶. 그래서 소원이 뭐야?”

“무릎베개 해 줘요.”

“목 아플 텐데, 괜찮겠어?”

“저 원래 베개 높은 거 써요. 얼른 해 줘요.”

정영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가방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안수진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서 서류 몇 개를 꺼내 차분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숨 푹 자. 일어나면 같이 저녁 먹자.”

정영빈은 서류 검토를 하면서도 혹여나 안수진이 깰까, 움직임을 최소한 한 채 조심스레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류 검토를 끝낸 정영빈이 곤히 잠든 안수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새근새근 호흡하는 연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진이와 있을 때면 가면을 쓰지 못하겠어.’

어린 나이에 감정을 감추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형제들과 경쟁하기 않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또 숨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면을 쓰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혼자 있을 때마저도 되도록 가면을 벗지 않았다. 혹여나 중요한 순간에 가면이 벗겨질까 봐, 가면이 자신의 모습이 되도록 노력해 왔다.

하지만…….

안수진 앞에서는 가면을 쓸 수 없었다.

첫 만남부터 그러했다.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안수진과 함께 있으면 자꾸 감정을 드러내게 됐다. 너무 좋아서 드러내지 않고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만약 수진이와 함께하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정영빈은 안수진과의 미래를 꿈꾸려면 반드시 겪어야만 할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잠에서 깬 안수진이 반쯤 감긴 눈으로 정영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다리…… 안 저려요?”

“몸은 좀 괜찮아?”

“아직 좀 멍하고 몸도 무거워요.”

“그래? 아직 열 있는 거 아냐? 확인해 봐야겠네.”

정영빈이 상체를 숙였다. 정영빈의 입술이 제법 긴 시간 동안 안수진의 입술을 덮었다.

얼마 후.

입술을 뗀 정영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열 없는 거 같은데?”

얼굴을 넘어 귓불까지 붉어진 안수진이 정영빈을 올려다보며 모기가 우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옮으면 좋지. 내 여자 아픈 걸 지켜보는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나아.”

“그럼 마저 다 가져가요.”

“그럴까?”

다시 한번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는 그 순간.

“수진아! 몸은 좀 괜찮아? 내가 너 죽 만들어 주려고…….”

유은서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정영빈과 유은서가 눈이 마주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너와 나의 시간』 8화가 끝이 났다.

*   *   *

결국 『거짓말』은 최종화에서 46.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50% 고지를 넘지 못한 채 종영했다.

『사랑하고 싶어』는 10화에서 3.2%까지 시청률이 하락했다. 이제는 2% 진입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철저하게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너와 나의 시간』 8화는…….

“19.7% 나왔습니다.”

19.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제작진의 예상보다도 더 높은 시청률이 나오며, 마침내 20% 고지마저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와! 미쳤다, 미쳤어!”

“이제 20% 코앞이네요? 이러다 다음 주에 30% 바로 넘는 거 아니에요?”

“하. 원래 이런 건 들뜨면 안 되는데, 이렇게 잘 풀리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잖아.”

“아, 저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거 같아요.”

“뭐야. 차연우, 오후에 오열 신 있어서 벌써부터 몰입하려는 거야? 역시 주연 배우!”

“하하하하하!”

“아, 진짜 너무 좋다!”

최창국 PD로부터 8화의 시청률을 전해 들은 『너와 나의 시간』 촬영 현장이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8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다.

그리고 이 관심은, 안시현이 그동안 쌓아 온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뿜어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안시현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완벽주의자 백화점 사장으로의 연기 변신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평가가 좋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안수진을 만나 조금씩 변화해 가는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며 드라마의 상승세를 제대로 견인하고 있다 평가받았다.

그 정점이 바로 8화였다.

8화에서 안시현은 연인의 아픔에 호들갑을 떠는 다정한 남자친구로서의 모습과, 과거의 아픔과 안수진과의 관계 사이에서 느끼는 고뇌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이에 한 언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8화의 시청률이 상승한 건, 안시현이 폭발적인 연기력에 인상적인 키스신이 거든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동안에도 적지 않은 주목을 끌었던 그였지만, 8화가 방영된 직후 쏟아진 관심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8화의 방영으로부터 이틀 후.

“시현아, 너 공식 팬클럽 생겼다.”

“……팬클럽이요? 제가요?”

“어. 어제 요청 들어와서 대표님이 승인해 줬어. 벌써 2천 명 넘게 가입했더라. 이야. 우리 시현이, 인기 장난 아닌데? 이러다 금방 단독 팬미팅 개최하겠는데?”

“형, 그건 너무 멀리 간 거 아닐까요?”

“지금 안시현 열풍이라고 아주 그냥 난리야. 『거짓말』보다 네 화제성이 더 높다니까.”

“……그 정도예요?”

“궁금하면 쉬는 날 여대 앞에 한번 가 보던가.”

안시현의 공식 팬클럽이 생겼다.

팬클럽은 빠른 속도로 회원 수가 상승하며 안시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엄청나다는 걸 증명했다.

정작 안시현은 자신의 인기를 체감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촬영장과 집을 오가는 게 일상의 전부고, 쉬는 날에도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는데 어찌 알겠는가.

때문에 팬클럽이 생겼다는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안시현도, 『너와 나의 시간』도 기대 이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거짓말』이 종영했으니 이제는 치고 올라가는 일만 남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제부터 시작이야.’

안시현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며 기분 좋다고 한 게 표현의 전부였다.

『너와 나의 시간』은 8화까지가 전반부다. 9화부터 18화까지가 중반부고, 19화부터 24화까지를 후반부라고 보는 게 맞다.

전반부와 중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다 다르다.

중반부의 핵심은 재벌가 후계 구도와 복수, 그리고 안수진과의 관계 사이에서 정영빈이 갈등을 겪으며, 그로 인해 안수진과의 관계에서도 우여곡절을 겪는 거다.

결국에는 안수진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한 날, 안수진이 교통사고가 나는 걸로 중반부가 마무리된다.

그 과정에서 유은서와 정영철과 박국영, 그 외에 정영빈의 형제 역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조연에게도 확실한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김희숙 작가의 스타일이 빛을 발해야 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것도 드라마의 중심인 정영빈이 제대로 무게감을 잡아 줘야 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안시현은 들뜨기보다는 차분하게 촬영을 준비해 나가는 걸 택했다.

‘8화까지는 『너와 나의 시간』이 도전자의 입장이었지만, 9화부터는 경쟁 구도야. 한 번 삐긋하는 순간 최고 시청률 50%의 기회는 날아간다.’

무엇보다 『거짓말』의 종영으로 『너와 나의 시간』의 입지가 달라졌다.

회귀 전 최고 시청률 30%를 넘겼던 KNC의 새 드라마 『벚꽃이 진다』와 시청률 경쟁을 해야 한다. 『거짓말』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무엇보다 『너와 나의 시간』의 목표는 최고 시청률 40%, 나아가 50%까지 노리는 거 아니던가.

‘들뜨는 건 최종화 시청률을 확인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안시현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들뜬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연기가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다.

시청률 상승에 좋아하고 인기를 실감하는 건 종영 후에 원 없이 하는 걸로 자신과 합의를 보았다.

*   *   *

2000년 8월 8일 화요일 새벽.

한 커플이 마스크를 쓴 채 한강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오빠, 그냥 차에서 데이트하면 안 돼?”

“차에서만 데이트하는 것도 지겹잖아. 모처럼 날씨도 선선한데 산책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월요일 새벽에 누가 여길 오냐?”

“그렇긴 한데…….”

“불안해하지 말고 즐겨. 그리고, 들키면 어때. 다다음 달에 상견례인 마당에. 맥주 마실래?”

남성의 계속된 설득과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거듭 확인한 뒤에야 여성이 긴장감을 풀었다.

그렇다고 마스크를 벗지는 않았다.

혹여나 사람을 마주쳤을 때 목소리야 그렇다 쳐도,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정체를 들킬 걸 우려해서였다.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았다.

마스크를 들어 올려 맥주를 마시는 남성을 바라보며, 여성이 미소를 지은 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이왕 밖에서 데이트하는 김에, 나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말해봐. 오빠가 뭐든지 다 해 줄게.”

“혹시 『너와 나의 시간』 봤어?”

“기사는 봤어. 혹시 그거 말하는 거야?”

“응, 그거. 내가 본 키스신 중에 가장 인상 깊었어. 우리도 한번 해 보자.”

커플은 『너와 나의 시간』 8화에서 나온 무릎베개 키스신을 따라했다. 키스를 해야 했기에, 그 순간만큼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 남성이 제법 거리가 있는 나무 뒤에 숨어 조심스레 촬영하고 있었다.

남녀가 떠난 뒤.

미소를 지은 사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특종 잡았습니다.”

*   *   *

2000년 8월 11일 화요일.

한 언론사가 배우 두 명이 찍힌 사진 한 장을 1면에 싣고 두 사람이 2년째 열애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이른 아침부터 언론사들이 난리가 났다.

너 나 할 거 없이 후속 보도를 위해 두 배우와 그들의 소속사에 연락을 취했고, 기다렸다는 듯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보도 자료가 배포됐다.

보도 자료의 내용은 단순했다.

두 배우는 드라마에서 연인 배역으로 만나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2001년 봄에 결혼할 예정이다. 기사를 통해 먼저 알려지게 되어 팬 여러분께 죄송하다. 오늘 중으로 기자회견 자리를 마련하겠다.

한 명은 연기대상을, 다른 한 명은 대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대중들은 두 배우의 열애 폭로 기사와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엄청난 관심을 드러냈고, 언론에서는 세기의 커플이 탄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같은 시각.

연속으로 두 신을 원테이크로 끝마친 안시현이 박국영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막둥아, 혹시 오늘자 민국일보 봤니?

“아뇨. 차에 매니저 형이 신문 놔둔 게 있긴 한데, 촬영 중이라 아직 못 봤어요. 무슨 일 있어요?”

-허허허. 있지. 그것도 아주 좋은 일이. 1면을 보면 무슨 일인지 알게 될 거다.

“으음? 네. 뭔지 모르겠지만 확인해 볼게요.”

-놀란 네 얼굴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쉽구나.

박국영와의 통화를 끝낸 뒤.

안시현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놔뒀던 신문 중 민국일보를 찾아내서 1면을 확인했다.

동시에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박국영의 예상이 맞았다.

안시현은 기사를 확인하고서 진심으로 놀랐다.

신문에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녀 톱배우가, 무릎베개 키스를 하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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