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6화>
56화. 향기가 난다
안시현은 톱스타 커플의 열애설이 터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2000년 여름에 열애설이 터졌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한강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열흘 가까이 미행을 하던 기자에 의해 데이트하는 모습이 찍혔고, 심지어 키스를 하던 상황이라 곧장 열애를 인정하게 됐다. 2001년 봄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기에 굳이 열애를 부인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무릎베개 키스와 엮일 줄이야…….’
키스하는 모습이 찍힌 건 회귀 전과 똑같았지만 방식이 달랐다. 회귀 전에는 평범한 키스였지만, 지금은 무릎베개 키스를 했다.
심지어 열애설이 제기된 날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너와 나의 시간』을 보고 무릎베개 키스를 해 보게 됐다고 밝혔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톱스타 커플도 따라한 무릎베개 키스라느니, 로맨스의 정석이라느니, 무릎베개 키스 열풍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너와 나의 시간』 9화가 방영될 8월 9일 수요일 오후 즈음에는, 대학생 커플들 사이에서 무릎베개 키스가 유행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에 안시현은 진심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다.
‘저 불편한 자세를 굳이 따라한다고?’
사실 무릎베개 키스는 매우 불편한 자세다.
심지어 구도 자체도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실제로 촬영 전까지 제작진 사이에서 키스신을 바꾸는 것과 관련해서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다.
결국 대체할 만한 자세를 찾지 못해서 무릎베개 키스로 촬영이 진행됐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무릎베개 키스는 시청자들의 인상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안시현과 차연우의 좋은 연기와, 최창국 PD의 연출력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톱스타 커플이 따라할 줄이야.
심지어 그로 인해 20대들 사이에서 무릎베개 키스 열풍이 불고 있다니, 안시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향기가 난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대박의 향기가 나.’
무릎베개 키스 열풍이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 상승에 제법, 아니 엄청나게 도움을 줄 거라고 확신했다.
『거짓말』이 종영하자마자 예기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며 화제성을 얻었다. 이제 이걸로 어떻게 시청률을 끌어올리느냐만 남은 상황이다.
안시현은, 이왕이면 9화의 방영 전에 『너와 나의 시간』과 관련된 이슈를 하나 정도 더 만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최창국 PD에게 슬쩍 이야기를 하니,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에게 속삭였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곧 기사 하나가 나갈 겁니다.”
“기사요? 혹시 오전에 인터뷰했던 그거요?”
“네. 9화의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마 그걸 타이틀로 잡을 겁니다.”
“반전이라…….”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화까지의 대본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이기에, 9화 막바지의 반전 요소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사람에 따라 별 거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앞선 회차에서의 복선을 찾아보는 이들 또한 존재할 거다.
중요한 건 최창국 PD의 인터뷰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거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시청자가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9시 55분부터 1시간 남짓 동안, MBS에 채널을 고정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방영된 『너와 나의 시간』 9화.
유은서에게 열애 사실을 들킨 이후에도 정영빈과 안수진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수진은 상사에게 뺏길 뻔했던 명품관 이벤트 기획안을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게 됐고, 그 결과 휴가 시즌을 맞이해 명품관 매출 상승에 큰 기여를 했다.
정영빈은 외부 미팅으로 인해 분주히 돌아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명품관 매출이 상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미소를 짓고 다녔다.
열애 사실을 알게 된 유은서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안수진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품관 매출 상승으로 인해 정영빈은 본가로 호출, J그룹 회장이자 아버지인 정건국으로부터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정건국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형제는 정영빈뿐이었다.
때문에 정건국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후계 구도에 참전하면 승산이 아주 높을 텐데…… 안타까워. 어릴 때 입은 상처가 너무 컸어.’
물론, 정영빈이 오랜 시간 철저하게 야심을 숨겨왔다는 걸 모르기에 하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본가 방문 직후.
정영빈은 안수진을 만났다.
안수진을 만나지 않으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거 같아서, 가면이 벗겨질 거 같아서 다급히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9화의 막바지에는…….
유은서가 누군가가 통화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와 통화를 하는 사람은 J전자의 전무이사이자 정영빈의 둘째 형, 정영관이었다.
“보고 드립니다. 정영빈 사장이, 명품관 사원 안수진과 사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9화가 끝나고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 * *
9화 이후.
-예고된 반전, 유은서 비서의 정체는?
-유은서와 정영관의 관계, 그녀는 스파이인가?
-『너와 나의 시간』, J그룹 후계자 경쟁 가속화되나?
『너와 나의 시간』과 관련된 기사 중 무려 절반 가까이가, 마지막 장면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유은서와 정영관의 통화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복선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복선들이 존재했기에 납득하지 못할 전개가 아니었다. 다만 주인공의 비서인 유은서가, 정영빈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둘째 형 정영관에게 연락했다는 것 자체에 시청자들을 충격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유은서가 정영관이 심어둔 스파이라고 보는 시선이 유력했다. J그룹의 차기 회장에 가장 근접한 정영관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변수를 대비해 정영빈을 비롯한 형제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가설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추측이 존재했다.
8화에 비해 대폭 늘어난 기사의 수는 『너와 나의 시간』에 쏟아지는 엄청난 관심을 반증해 줬다.
언론들은 대중들이 좋아하고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와 관련된 기사를 많이 작성하는 게 당연하니까.
9화의 방영 다음 날 오전.
최창국 PD는 여는 날과 마찬가지로 촬영장에 가기 전, 드라마국에 들려 시청률표를 받아보았다
KNC 『벚꽃이 진다』 - 18.5%
KNC의 새 수목드라마 『벚꽃이 진다』는 18.5%라는 시청률로 첫 방송을 시작했다.
직전에 방영된 드라마가 대박작일 경우, 그 영향을 받아 초창기 시청률이 잘 나오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18.5%밖에 안 나온 게 놀라웠다.
최창국 PD는 내심 20%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STS 『사랑받고 싶어』- 2.9%
『사랑받고 싶어』는 마침내 시청률 3% 선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언론도 대중들도 더 이상 『사랑받고 싶어』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간간히 들여오는 이야기로는, 주연 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조연 배우 중에서도 PD와의 갈등으로 인해 하차를 검토하고 있다나 뭐라나.
그리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너와 나의 시간』은…….
MBS 『너와 나의 시간』 - 29.8%
8화에 비해 무려 10%가 넘게 상승하며, 30% 고지까지 단 0.2%만을 남겨두게 됐다.
단 1화만에 폭발적인 시청률 상승이 일어났음에도, 최창국 PD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거짓말의 시청률을 처음으로 하락시켰던 5화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선배 PD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번에는 회의실 안에서 소리 지르고 춤 안 춰? 왜 이렇게 무덤덤해?”
“25%에서 30% 사이 예상했거든요. 이러면 내일은 30% 무조건 넘겠네요. 16화 전후로 40%를 넘길 수 있다면, 50%도 노려볼 만하겠는데요?”
“오우. 방금 되게 재수없었던 거 알아?”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제야 최창국 PD가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의 종영과 무릎베개 키스 열풍, 거기에 9화에서의 반전을 암시하는 인터뷰까지.
시청률 상승을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지.’
무릎베개 키스 열풍 직후.
『너와 나의 시간』 현장에서는 예상 목표치를 상향 조정했다. 흐름을 제대로 탈 수만 있다면 최고 시청률 50%도 충분히 달성할 거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최창국 PD는 30%에 육박한 시청률에도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50% 달성까지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너와 나의 시간』 10화.
1년 내로 후계자를 결정하겠다고 선언하는 정건국 회장, 후계자 경쟁이 시작되기에 앞서 안전장치를 준비하는 정영빈, 정영빈과 안수진의 데이트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졌다.
유은서가 스파이냐 아니냐는 10화에서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유은서가 의문스러운 행동을 이어 나가게 함으로서 여지를 남겨뒀다.
10화에서 『너와 나의 시간』은 35.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큰 폭으로 시청률이 상승했다.
불과 1주일 전 종영한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는 귀신같이 쏙 들어갔다. 이제 대세 드라마는 『거짓말』이 아닌『너와 나의 시간』이었다.
10화의 방영 다음 날.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의 방영 이후 처음으로 인기를 실감할 만한 상황을 맞이했다.
정영빈과 안수진의 카페 데이트 신 촬영을 위해 안시현은 늘 그렇듯 최봉팔과 두어 시간 먼저 촬영을 진행할 카페에 도착해서 대본을 검토하며 차분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속해서 안시현과 최봉팔의 눈치를 살피던 한 여성이, 마침내 용기를 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저…… 안시현 배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꺄아아아! 저 완전 팬이에요! 죄송한데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액자에 넣어서 가보로 보관할게요!”
“아하하. 가보는 좀…….”
그 여성을 시작으로 카페 내에 있던 손님들 중 상당수가 안시현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심지어 지나가다가 안시현을 발견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뒤 사인을 받는 이들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안시현은 대본을 검토하지 못한 채, 촬영 직전까지 계속해서 사인해줘야만 했다.
촬영 30분 전에 도착해 몇몇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준 차연우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안시현의 팔뚝을 가볍게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이야. 우리 시현이 인기 장난 아니네?”
“그러게요. 팬클럽 생겼다는 말 들었을 때까지도 별 생각 없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장난 아니에요.”
“너 팬미팅 개최하면 대한대학교 대강당 꽉 채우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지금 분위기 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치? 그나저나 너, 대본 검토 못 해서 어떻게 해?”
“아. 이건 문제없어요.”
안시현이 촬영 전에 대본을 검토하는 건,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기 때문보다는 일종의 루틴이었다. 그래야지 캐릭터에 몰입이 잘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본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몰입에 문제가 생기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안시현은 대본 검토를 방해받는 게 기뻤다.
‘기분 좋네.’
『너와 나의 시간』 방영 이후 처음으로 인기를 체감하자, 자신이 연기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함을 느꼈다.
안시현이 촬영을 앞두고 카페 밖으로 나간 팬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인 전부 다 못해드려서 죄송해요. 촬영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면 사인 해드릴게요. 길어봐야 30분에서 1시간 정도겠지만…… 괜찮으시다면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네에에에!”
“기다릴게요, 오빠!”
“응원할게요! 파이팅!”
팬들의 환호성과 응원을 들으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아. 진짜 너무 좋다.’
지금보다 더 많은 팬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고 싶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배우 안시현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인기를 체감한 안시현의 의욕이 고무됐다.
‘다음 주에 있을 18화 후반부 촬영도 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