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7화>
57화. 눈물 날 것 같아서요
김희숙 작가는 『너와 나의 시간』 대본을 집필하며, 드라마를 3단계로 나눠서 구성했다.
1화부터 8화까지가 초반부, 9화부터 18화까지가 중반부, 19화부터 24화까지가 후반부다.
제작진이 초반부에서 가장 공들인 회차를 꼽자면 6화다. 정영빈과 안수진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신이 대중들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6화의 방영 이후 언론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7화부터 10화까지 상승세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중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회차를 꼽자면 18화다.
사랑하는 연인의 교통사고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정영빈의 모습이 시청자들을 심금을 울려야 한다.
이에 최창국 PD는 안시현에게 정영빈이 오열하는 두 신의 촬영에만 하루를 통째로 할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 중요한 신이기도 하거니와, 18화를 기점으로 최고 시청률 50%의 향방이 갈릴 거라 확신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또한 촬영 이틀 전.
안시현을 따로 불러 18화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내일 하루는 촬영 쉬면서 준비해 주세요.”
“네. 역시 저번처럼 원테이크가 최선이겠죠?”
“그게 제일 이상적이긴 하죠. 8화에서 시현 씨와 수진 씨가 보여 준 무릎베개 키스신은, 원테이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이슈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두 번 이상 촬영했다면, 그렇게 좋은 그림은 안 나왔을 겁니다.”
“으음. 이거 어깨가 무거운데요?”
너스레를 떨면서도 안시현은 고민에 빠졌다.
18화의 오열 신은 정혜영의 앞에서 한 번 선보인 경험이 있다. 그때도 느꼈지만, 완성된 정영빈 캐릭터 덕분에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다 확신했다.
실제로 지금껏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 줬고 말이다.
문제는 안시현이나 최창국 PD나, 특정 신에 한해서만큼은 좋은 연기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자고로 대박이 난 드라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명대사나 명장면이 기억나기 마련이다. 6화의 자동차 키스 신과 8화의 무릎베개 키스 신, 9화에서 유은서가 보여 준 반전처럼, 대중들의 기억에 각인될 장면이 꾸준히 나와 줘야 드라마는 성공할 수 있다.
18화는 명장면을 만들기에 좋은 회차다.
어떻게 해야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안시현을 보며 최창국 PD가 미소를 지었다.
“김 작가님과 제가 시현 씨에게 캐스팅을 제안한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아뇨. 『나는 간첩입니다』를 보고 제안했다는 것 정도밖에는 못 들은 것 같은데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수철과 리수철의 인격을 분리해서 연기한 건 인상적이었고, 마지막 자살 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배우라면 정영빈을 제대로 연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결과적으로, 시현 씨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최창국 PD가 안시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영화랑 드라마는 느낌이 좀 다르죠?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부담감과 책임감도 크다는 거 이해합니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파고들지는 마요. 지금까지 해 온 대로만 하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PD님.”
진심 어린 격려에 안시현이 미소로 화답했다.
최창국 PD의 말이 맞다.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며 안시현은 기대 이상의 훌륭한 연기력을 매 순간 보여 줬다.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었던 건 안시현의 공이 반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정작 안시현이 자신의 연기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잘하고 싶다,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고 싶다.
좋은 결과물을 내고서도 잘한 점을 찾기보다는 부족함 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주연 배우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건 좋은 현상이다.
다만 최창국 PD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안시현의 경우 제법 자주 그 정도가 지나쳐보이곤 했다. 책임감이 아니라 부담감으로 비춰질 정도였다. 이상하리만큼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안시현이라고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국민배우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 그 이상을 바라보다 보니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나의 시간』이 기대 이상의 화제성으로 최고 시청률 50% 돌파가 유력한 상황에서,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될 법도 하건만…….
‘이번 한 번만 더 박하자.’
그럼에도 안시현의 태도는 단호했다.
후반부의 상승세를 이끌어 줄 18화의 두 신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낸 뒤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일단, 내일 하루 종일 죽어라 연습해 보자. 그러면 답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 * *
18화의 마지막 두 신의 촬영 전날.
하루의 휴식을 부여받은 안시현은 아침 운동을 끝내자마자 JM액터스 사옥으로 향했다.
연습실에서 대본을 리딩하며 기다린 지 20여 분.
차연우가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안. 좀 늦었지?”
“제가 빨리 온 거예요. 그리고 좀 늦으면 어때요? 연습 도와주시는 건데 저야 감지덕지죠.”
“파트너끼리 연습 도와주면 좋지. 그리고, 사실상 18화의 시청률은 네 감정에 대중들이 얼마나 반응해 주느냐가 핵심이잖아. 얹혀가는 마당에 연습이라도 도와줘야 밥값 하는 거 아니겠어?”
미소를 짓는 차연우를 바라보며 안시현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촬영이 없는 날임에도 선뜻 자신의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차연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시작된 연습은 해가 질 무렵에야 중단됐다.
“시현아, 미안한데 나 저녁에 인터뷰 있어서 슬슬 가 봐야 될 것 같아. 매니저 언니 도착했대.”
“연습 도와줘서 고마워요, 누나. 전 조금만 더 연습하다가 갈게요. 내일 병원에서 봐요.”
“목 괜찮겠어? 오전부터 계속 연습했잖아.”
“네. 대사는 끝이고, 대본 좀 읽다가 가려고요.”
“그럼 다행이고……. 적당히 하다가 들어가. 너 그러다 몸 상하면 난리 나는 거 알지? 필요하면 죽염이라도 좀 줄 테니까 언제든지 말하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누나.”
차연우가 스케줄로 인해 연습실을 떠난 뒤에도, 안시현은 세 시간이 넘게 대본을 잡고 있었다. 최봉팔이 늦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고 부를 때까지 연습실 구석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안시현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연습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배역에 몰입한 상태에서 보여 주는 감정 표현은 수준급이 되었다. 실제로 차연우는 연습을 도와주며 안시현의 연기에 울컥해서 두 번이나 눈물을 보였다.
‘아직 부족해.’
그러나 안시현의 성에는 차지 못했다.
이 상태로 촬영에 임해도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다. 상승세를 감안하면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 50% 돌파는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안시현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18화에서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대중들의 기억 속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각인될 명장면을 만드는 게 목표 아니던가.
이대로는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이야.’
이에 안시현은 직감했다.
간만에 극한의 몰입을 보여 줄 때가 왔음을.
* * *
다음 날.
안시현은 촬영을 앞두고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몰입을 위해 두 신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제게 말을 걸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야 뭐…….”
“오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최대한 조용조용히 촬영할 테니까 배우님은 연기에만 신경 써요.”
“우리 시현이, 작정하고 연기하려나 보네. 숨 죽이고 있을 테니 한 번 마음껏 날뛰어 보렴.”
제작진과 배우들은 안시현의 부탁을 듣고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신의 촬영을 앞두고 배우와 접촉하지 않는 건 현장에서 제법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한 선택지 중 하나다.
제작진과 배우, 심지어는 매니저인 최봉팔마저도 근처에 다가오지 않는 가운데.
‘아…….’
안시현이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렸다.
오열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슬펐던 상황을 떠올리는 건 배우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을 떠올렸다.
제대를 한 달 앞둔 어느 날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를, 안시현의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감정 다음은 몰입이었다.
안시현은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면서 단 한 번도 한계치까지 몰입하지 않았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촬영 기간이 더 긴 탓에, 극한까지 몰입을 하면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지칠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곧 촬영은 후반부에 진입한다.
또한 23화의 마지막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18화만큼 확실하게 명장면을 만들어 낼 만한 회차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안시현이 온전히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한 두 번이 한계다. 그 이상을 하면 후유증으로 인해 촬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신을 촬영할 때 사용하기 위해 꽁꽁 숨겨두었다.
이제는, 아껴두었던 무기를 꺼내 사용할 때였다.
그렇게 촬영을 앞둔 상황.
차연우는 촬영을 지켜보지 않고 두 번째 신의 촬영이 예정된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우야, 촬영 안 지켜볼 거니?”
“아, 지켜보면 눈물 날 것 같아서요. 저 어제 연습 도와주면서 두어 번 울었거든요.”
“연습인데도 그 정도였어? 작정하고 준비했나 보네.”
“지금 분위기를 보면…… 다들 눈물 참느라 엄청 고생해야 할 것 같아요.”
“NG 안 내려면 빨리 끝내야겠네.”
마침내, 일룡병원 VIP병동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 밤이 고비일 거다.”
주치의로부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안수진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
뚝. 뚝. 뚝.
정영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정영빈이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보는 눈이 많은 병원에서 말이다.
지금의 정영빈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밤이 고비라고 한 주치의의 말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아… 아, 안 돼요.”
정영빈의 몸이 덜덜 떨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주치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안 돼요, 선생님.”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호소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사회적 지위도, 원하는 걸 대부분 살 수 있는 재산도 이 상황에서는 소용없었다. 연인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영빈이 할 수 있는 건…….
“아아…… 끄으윽…… 끅…….”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정영빈은, 인생에서 두 번째로 무기력함을 느꼈다.
1분 넘게 오열이 이어졌다. 대사 한 마디조차 없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안시현의 모습만이 카메라에 잡히는 상황에서…….
최창국 PD는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뭔가가 달라. 평소에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만, 오늘은 뭐랄까…….’
배우의 연기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한다. 연출을 위해 필요한 수준의 지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창국 PD의 눈으로 봐도 안시현의 연기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도 대단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 줬지만, 오늘은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최창국 PD는 안시현의 연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정의를 내렸다.
‘정영빈이 브라운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지금의 안시현이 보여 주는 연기는, 연기라는 생각이 쉬이 들지 않았다. 그냥 정영빈이라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생동감이 엄청났다.
1분이 넘는 오열이 이어진 뒤.
“OK.”
최창국 PD가 OK 사인을 냈다.
두 번의 촬영은 없었다.
안시현의 오열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했던 신에서, 최고의 오열 연기를 보여 줬으니 리테이크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난 뒤.
제작진과 배우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다음 신의 촬영을 위해 차연우가 기다리고 있을 병실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허허허. 이 나이에 연기하다 눈물을 참느라 고생하게 될 줄이야. 촬영을 하는 동안 국영 형님이 극찬한 이유를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주치의 역을 맡은 중견 배우 최우남은 다음 신의 촬영을 위해 울컥한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몇몇 스태프들 또한 다음 신의 촬영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한편.
배우와 스태프들의 눈물샘을 제대로 자극하는 오열 연기를 보여 준 안시현은…….
“수진아…….”
OK 사인이 난 이후로도 여전히 몰입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