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8화>
58화. 그만둬야죠
첫 번째 신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차연우가 먼저 향했던 병실은 두 번째 신의 촬영 준비로 인해 분주해졌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한다.’
최창국 PD는 촬영을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었다.
안시현이 이전 신의 촬영에서 보여 준 연기력이 엄청났던 건 분명하지만, 그의 집중력이 얼마나 오래갈지 장담을 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한 신의 촬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배역에 몰입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지금 당장 몰입이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안시현의 집중력이 유지되는 동안, 두 번째 신의 촬영마저 끝마치는 게 최선의 선택지다.
스태프와 배우들도 최창국 PD의 뜻에 동조했다. 다음촬영의 준비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시켰다.
의료 기기가 한가득 비치된 병실 안.
환자 분장을 한 차연우가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는 가운데, 마침내 두 번째 신의 촬영이 시작됐다.
“아아…… 아흐흑!”
의료 기기에 의지한 채 숨 쉬고 있는 안수진의 모습을 보자마자 정영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수진을 바라보며, 가슴을 움켜쥐고서 참을 수 없는 감정을 토해 냈다.
주치의는 그런 정영빈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유 비서한테 연락했다. 일단 돌아가서 진정하고 다시 오자. 이러다 너까지 쓰러지겠어.”
“괜찮아요. 그냥 여기 있게 해 줘요.”
“하지만…….”
“저 정말 괜찮아요. 아침에 출근해서 정상적으로 업무 볼 거예요. 일도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울어 대면 수진이한테 혼날 테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타박하겠죠. 그러니까…… 딱 오늘 저녁까지만 슬퍼하게 해 줘요. 부탁드릴게요.”
“……간호사랑 유 비서, 가족들 말고는 병실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조치해 놓으마.”
“감사합니다, 아저씨.”
주치의가 병실을 나간 뒤.
정영빈은 침대 앞으로 의자 하나를 옮겼다.
의자에 앉아 의식이 없는 안수진을 바라보다,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감았다.
“엄마…… 엄마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아파요. 어쩌면, 제 곁을 떠날 수도 있대요. 저…… 너무 무서워요. 수진이 없으면 못 사는데, 수진이가 아니면 안 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전…… 그때도 지금도 너무 약해요.”
으드득.
정영빈이 이를 악물었다.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참아보려 애를 썼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참지 못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안수진의 몸을 덮은 이불 끝자락을 조금씩 적셨다.
“다 포기할 수 있어요. 백화점도, 재산도, 모두 가져가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수진이 무사하게 해 주세요. 기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세요. 제발요…….”
정영빈은 1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의 아픈 기억을 떠올랐다.
그때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겁이 났다. 안수진을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자신의 무기력함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스러웠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아 보려 해도, 억누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연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영빈은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병실 내에서 안시현의 울음소리만이 들렸다. 제작진 모두가 숨조차도 조심스레 쉬는 가운데…….
“OK.”
이내 최창국 PD가 OK 사인을 냈다.
동시에 최봉팔이 안시현에게로 다가갔다. 들고 있던 물병을 안시현에게 건네며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로드 매니저가 된 직후.
그는 박정상과 김진모에게 한 가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아주 가끔, 안시현이 평소보다 눈에 띄게 몰입해서 연기를 한다면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시현이 몰입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걸 목격했던 두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최봉팔이 지금껏 봐 온 안시현의 연기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기도 했다.
“아…… 네. 저 괜찮아요, 형. 물 잘 마실게요.”
최봉팔의 걱정과 달리 안시현의 상태는 멀쩡했다.
두 신을 내내 오열 연기를 하느라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너무 멀쩡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지나칠 정도로 멀쩡한 안시현의 모습에 최봉팔이 당황하는 사이, 최창국 PD가 안시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현 씨. 오늘 연기, 제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좋았습니다. 최고의 연출로 보답하겠습니다.”
“명장면 기대해도 되는 건가요?”
“못 만들면 PD 그만둬야죠. 떠먹여 주는 것도 받아먹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안시현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두 신을 촬영하는 동안 문자 그대로 혼을 담은 연기를 선보였다.
이제 공은 최창국 PD에게 넘어갔다.
최창국 PD는, 안시현이 보여 준 최고의 연기를 『너와 나의 시간』이 종영하고도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명장면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겠네.’
* * *
두 신을 연속으로 촬영한 뒤, 안시현은 촬영장이 아니라 집으로 향했다. 두 신의 촬영을 끝으로 안시현에게 오늘 할당된 촬영이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신이 됐건 더 촬영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쉬자.’
몸은 지나치리만큼 솔직했다.
촬영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전보다 후유증이 적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다만 두 신을 촬영하며 극한으로 몰입했고, 그 상태로 상태에서 오열까지 했다 보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내일 봐요 형.”
“내일 촬영은 오후부터니까 데리러 올 때까지 푹 쉬어. 오늘도 고생 많았다.”
집으로 돌아온 안시현이 곧장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두 신의 촬영을 떠올리자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해냈다.’
최고의 연기가 필요한 순간,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 줬다. 명장면을 만들고 싶다는 소기의 목적을 정확히 절반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나머지 절반은 최창국 PD가 채워 줄 것이다.
‘게다가…… 두 신 연속으로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는데 후유증이 그리 심하지 않아. 이 방식에 익숙해진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나쁠 건 없어.’
오늘 보여 준 연기만큼이나 안시현을 기쁘게 한 사실은,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극한의 몰입을 선택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촬영 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아끼고 아꼈던 카드를 꺼냈다.
그렇다고 후유증이 적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와 『형아, 동생』 때와는 달리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지도 않았다. 촬영 당시의 여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메소드를 연기를 하며 비일비재하게 겪는 수준의 후유증이었다.
사실상 극한으로 몰입한 것 치고는 리스크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는 동안에 다시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아직 후반부 촬영이 제법 남아 있다.
이번에는 후유증이 덜했지만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 줄 알 수 없다. 대사가 머릿속에 맴도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극한의 물입이 필요한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진모를 보며 습득한 감정 표현이 빛을 발하는 신들이 많다. 몰입도를 끌어올리기보다는, 적절한 선을 유지하며 감정 표현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하자. 연기대상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우수상 정도는 노릴 수 있지 않겠어?’
현재 『너와 나의 시간』의 화제성과 시청률 상승 속도를 감안하면 최고 시청률 50% 돌파가 유력하다.
다른 때였다면 연기대상도 욕심냈겠지만, 대한민국 역대 사극 중 최고 시청률 1위라는 기록을 남기고 6월에 종영한 64부작 드라마가 존재하기에 현실적으로 연기대상은 무리라고 판단을 내렸다.
물론 연기대상의 경우 오로지 시청률만을 보고 선별하지는 않는다. 대박이 난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유리한 건 맞지만,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해당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연기도 잘해서 문제지.
회귀 전에도 2000년 MBS 연기대상은 해당 배우가 차지했다. 안시현은 이번에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눈높이를 최우수상으로 낮췄다.
MBS에서 2000년에 방영한 수목드라마들 중 최고 시청률 40% 대를 기록한 드라마는 여럿 있지만, 50% 대를 기록한 드라마는 없었다. 월화드라마 쪽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이 최고 시청률 50%를 돌파한다면 안시현의 최우수상 수상이 유력한 게 사실이다.
‘최우수상이고 우수상이고, 일단은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오늘 너무 열심히 울었어.’
몇 달 후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하던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몰입도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너무 많이 울었더니 피로감이 심했다.
잠이 든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날.
안시현은 꿈에서 연기대상을 수상하는 김칫국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 * *
자고 일어나자마자 안시현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9시 40분이었다.
“알람도 안 맞췄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깼네.”
2000년 8월 16일, 『너와 나의 시간』11화가 방영하는 날이다. 방영을 15분 앞두고 일어난 안시현은, 화장실을 다녀오고 물을 마신 뒤 소파에 드러누웠다.
간만에 본방을 사수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너와 나의 시간 11화에서 정영빈은 이전 회차들과 달리 존재감을 살짝 내려놨다. 그 대신 조연인 유은서와 정건국이 존재감을 뽐냈다.
유은서는 스파이인지 아닌지 의아한 행동들을 연달아 하며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이끌어 냈고, 정건국은 대기업 회장으로서의 카리스마로 인상적이었다.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할 말 다 하는 안수진의 캐릭터성이 빛난 건 보너스였다.
1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예고편이 나왔다.
‘다 알고 있는데도 재밌게 봤네. 역시 최 PD님 연출은 경지에 올랐다니까.’
안시현은 새삼 최창국 PD의 연출에 감탄했다.
사실 11화는 시청자들이 다소 지루하게 느낄 여지가 존재했다. 중반부와 후반부에 일어날 사건들이 전개되기에 앞서 착실하게 복선을 까는 회차이기 때문이다.
최창국 PD는 그것을 기가 막힌 연출력으로 커버했다.
시청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도록, 예고편이 끝날 때까지 TV 앞을 떠나지 못하는 최고의 연출을 보여 줬다. 방영 이후 처음으로 정영빈의 비중이 줄어들었음에도 부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예고편은 화룡점정이었다.
“우리 헤어져요.”
안수진이 정영빈에게 이별을 선언하며, 시청자들이 12화를 안 볼 수가 없게 만든 것이다.
‘14화 전에 시청률 40% 돌파하려나? 팍팍 올라서 18화를 기점으로 50%를 넘기면 최고일 텐데 말이야.’
안시현은 11화의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궁금했다.
본방 사수를 끝낸 안시현이 영화 감상을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재생시킨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안시현의 어머니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고개를 갸웃거린 안시현이 전화를 받았다.
-아들, 자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아뇨. 11화 챙겨 보고 영화 한 편 보려던 참이었어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아들, 엄마한테 거짓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자고로 가족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해요?”
순간 안시현이 긴장했다.
낮에 오열 신을 촬영한 여운이 남아 있어서일까? 혹여나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유은서…… 스파이야, 아니야?
-시현이가 뭐래? 스파이 맞대? 스파이라지? 거봐! 내가 뭐랬어! 처음 봤을 때부터 얼굴이 스파이 상이라고 했잖아!
-아, 조용히 좀 하고 있어요! 정신 사나워!
괜한 걱정이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한 이유는, 『너와 나의 시간』 11화를 보고서 유은서가 스파이인지 아닌지 궁금해서였다.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상치 못했던 부모님의 전화 한 통에 요 근래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 그거 함부로 말하면 저 큰일 나요. 제작진과 합의한 내용만 외부에 언급 가능하거든요.”
-그럼 수진이가 영빈이한테 왜 헤어지자고 한 건지, 그거라도 좀 가르쳐 줘.
“아, 그건 방송 챙겨보다 보면 나와요.”
-아들……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엄마 좀 서운해.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요.”
궁금한 걸 가르쳐 달라는 어머니의 사정에도 안시현은 단호했다. 드라마 스포일러는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으니까.
다음 날 오후.
안시현은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연우로부터 11화의 시청률이 무려 38.6%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대로라면 12화에 40%를 돌파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안시현이 촬영을 위해 정장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받고 나온 직후, 최창국 PD가 배우와 제작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시현 씨도 왔으니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PD님, 혹시 제작비 또 올랐나요?”
“아뇨. 어쩌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일 겁니다. 그게…….”
최창국 PD가 뜸을 들였다.
그 와중에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보며, 대부분은 긍정적인 소식을 거라고 확신했다.
“저희 드라마, 일본에 수출합니다.”
최창국 PD가 꺼낸 새 소식은, 제작진과 배우들의 예상 이상으로 엄청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