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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60화 (6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0화>

60화. 드디어 해냈어

통화를 하면서 호수를 거듭 확인한 안시현이 마침내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우정태가 현관문을 열고서 안시현을 반겨 주었다.

“왔어? 시현이 네가 제일 늦었어.”

“뭐야, 저 일부러 1시간이나 일찍 왔는데요?”

“난 너보다 30분 일찍 왔는데 다들 먼저 오셨더라고. 연우 누나 요리하는 거 도와주고 있었나 봐.”

“아, 이러면 괜히 제가 미안해지는데…….”

요리를 마무리 중이던 차연우가, 주방에서 고개를 쓱 내밀더니 안시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시현이 방문한 곳은 바로 차연우의 집이었다.

“미안할 거 없고, 그냥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너 갈비찜 좋아한다 그래서 잔뜩 했으니까 많이 먹어.”

“아하하. 기대할게요, 누나.”

안시현이 우정태의 옆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냄새 좋네. 맛있겠다.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이기를 잘한 것 같아. 진모도 없는 집에서 궁상맞게 혼자 본방 사수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백배 낫지.’

18화가 방영될 2000년 9월 6일로부터 나흘 전.

차연우가 배우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희, 18화 모여서 같이 보는 게 어때요? 첫 화 이후로 같이 본 적 없잖아요. 제가 집에서 맛있는 음식 잔뜩 해 줄 테니까 저녁도 같이 먹어요.”

『너와 나의 시간』의 클라이맥스인 18화를 스케줄이 되는 배우들끼리 모여서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촬영이 슬슬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다 보니, 배우들에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가능한 제안이었다.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클라이맥스를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도 의미 있잖아.”

“나도 찬성. 연우가 그렇게 음식 솜씨가 좋다며? 이번 기회에 먹어보자고.”

“아. 난 그날 화보 촬영 있는데…… 아쉽다, 진짜.”

“전 스케줄 괜찮을 거 같아요. 연우 누나 연예인 아파트 살지 않아요? 와. 내가 이렇게 연예인 아파트를 다 가 보게 되네.”

안시현을 비롯해, 스케줄이 없는 몇몇 배우들이 차연우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배우들 중 18화가 어떤 식으로 연출됐을지 궁금했던 이들은 본방 사수를 위해 스케줄을 빼놨다. 이왕 시청할 거, 여럿이서 함께 하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18화에는 안시현의 오열 신 외에도 의미 있는 신이 다수 포함됐다. 괜히 최창국 PD가 언론을 통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라며 당당하게 언론 플레이를 한 게 아니다.

그 장면들을 어떻게 연출했을지,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그렇게 안시현과 우정태를 포함한 도합 여섯 명의 배우가 차연우의 집에 모였다. 덕분에 차연우는 아침 일찍부터 요리를 하느라 정신없었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모두들 덕분에 『너와 나의 시간』이 대박 난 건데, 당연히 이 정도는 대접해야지.’

차연우는 주제 파악이 확실한 스타일이다.

그녀는『너와 나의 시간』의 흥행에 자신의 지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안시현의 메소드 연기, 최창국 PD의 신들린 연출력, 조연 배우들의 감초 같은 연기가 맛깔나게 어우러진 결과라고 봤다.

물론 그녀가 한 게 없는 건 아니다.

안수진은 『너와 나의 시간』의 여자 주인공이다. 매사에 당당한 성격과 정영빈과의 연애 과정에서 보여 준 풋풋함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한 언론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너와 나의 시간』의 남성 시청자들의 시청 이유 1위가 안수진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심지어 무려 90%의 비율이었다.

또한 차연우는 『너와 나의 시간』을 통해 데뷔 이후 줄곧 따라다닌 연기력 논란을 종식시켰다.

특히나 6화와 8화에서 보여 준 키스신은 18화의 방영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도 명장면으로 손에 꼽힐 만큼 대중들의 기억에 각인됐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보다는 안시현이, 최창국 PD가, 그리고 다른 배우들 덕분에 『너와 나의 시간』의 인기에 편승한 것이라고 인지했다.

뿐만 아니라.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녀 자신은 본인의 연기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지 못했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차기작에서 다시 평가가 뒤집힐 거라고 내다봤다.

어느 정도 발전한 건 맞지만, 평가만큼의 실력은 보이지 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즐기자. 차기작 고민은 『너와 나의 시간』이 종영하고 해도 되는 거잖아. 언제 이렇게 또 모이겠어?’

방송 시작 30분 전.

차연우가 몇몇 배우들과 함께 준비한 음식들이 넓은 식탁 위에 한가득 세팅됐다.

갈비찜, 보쌈, 김치전, 오리탕을 포함한 다양한 음식들에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직접 요리를 할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많이 준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와……. 누나, 너무 푸짐한 거 아니에요?”

“아, 내가 엄마 닮아서 손이 좀 커. 남으면 싸 줄 테니까 집에 가져가서 먹어. 다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차린 게 없기는 무슨, 진수성찬이구만. 자, 차려 준 사람 성의 봐서 맛있게들 먹읍시다.”

18화가 방영하기 전.

즐거운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회식 자리에서 반주를 자주 즐기던 배우들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클라이맥스를 제정신으로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올 즈음.

“아, 시작한다.”

마침내 『너와 나의 시간』 18화가 시작됐다.

18화는 해외 출장을 앞둔 정영빈이 안수진과 심야 데이트를 하고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옥탑방 앞.

안수진이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출장이 일주일이나 돼요?”

“왜? 일주일 못 볼 생각하니까 아쉬워?”

“네, 아쉬워요. 몇 시간만 안 봐도 보고 싶은데, 일주일 동안 안 보고 어떻게 살아요?”

“그렇게 아쉬우면 같이 갈래?”

“……와, 진짜 너무한다. 승진시켜주고 겨울 시즌 이벤트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라 해놓고서, 나한테 출장을 같이 가자고요?”

“가서 준비하면 되지. 연차 써.”

“됐네요. 전 한국에서 제 할 일 잘하고 있을 테니까, 사장님은 해외 출장 잘하고 와요. 하루에 한 번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요.”

정영빈이 미소를 지었다.

아쉬워하는 안수진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안수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누구 마음대로 하루 한 번이야. 난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할 건데?”

“……하여간 말은 잘해요.”

“올 때 선물 사 올게.”

“잘하고 와요.”

정영빈의 해외 출장 기간은 일주일.

그사이 정영관은 정영빈을 후계자 경쟁에서 낙오시킬 방법을 궁리했다. 사실상 후계자 구도가 자신과 정영빈의 2파전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실적만으로 따지면, 자신은 정영빈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든지 이기면 되는 거야. 역사는 오로지 승자만을 기억하는 법이니까.’

고민 끝에 그는, 정영빈 자체를 무너트릴 수 없다면 그 주변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깨끗하게 세탁한 돈이야. 이 정도면 네 미래를 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하지만…….”

“네가 평생 J전자에서 일해도 만지지 못할 돈이야. 형량은 최대한 줄여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몇 년 살고 나와서 평생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너한테도 좋지 않겠어? 간단하잖아. 그냥 양심 한번 버리면 돼.”

“……저 없는 동안, 제 가족들 잘 부탁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영빈이 귀국하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해.”

안수진과 떨어져 지낸 일주일 사이.

정영빈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헤어지고 다시 사귀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정영빈은 안수진이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저려왔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안수진에게 가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서 사랑한다며 속삭이고 싶었다.

결국 그는 결심을 한다.

안수진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귀국하는 대로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정영빈이 귀국하는 날.

퇴근하던 안수진은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만다.

공항에 도착한 직후, 정영빈은 주치의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영빈아, 안수진 씨가…….”

사고 소식을 들은 정영빈은 충격을 받고 휴대폰을 떨어트린다. 다급히 택시를 잡아타고서 병원으로 향한다.

최창국 PD는 정영빈이 병원으로 가는 동안 OST를 삽입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병원에 도착하는 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영빈이 병원에 도착한 직후.

뚝.

그때부터 OST가 끊겼다. 그 어떤 배경음 또한 삽입하지 않았다.

오롯이 정영빈과 주치의의 대화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아…….”

방송을 보던 배우들마저도, 심지어 연습을 도와줬던 차연우까지도 안시현의 오열 연기에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과 콧물, 심지어 침까지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안시현의 감정 표현에 공감해 울컥했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며 안수진이 무사하기를 빌 때에는 애써 참고 있던 우정태마저도 결국 눈물을 보였다.

단 한 사람.

안시현만이 자신의 연기와 최창국 PD의 연출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OST와 배경음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정영빈을 포커싱한 것이 신의 한 수였어.’

만약 OST나 다른 배경음을 삽입했다면 오히려 몰입도가 떨어졌을 거다. 어떤 식으로 연출해도 안시현의 감정 연기를 100% 살려 내지 못했을 거다.

깔끔한 편집이 최선의 선택지였다.

다른 요소들을 추가할 법한데도, 깔끔하게 배제한 최창국 PD의 판단에 안시현은 새삼 감탄했다.

연출에 대해서는 반박의 여지 없이 최창국 PD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18화는 안수진의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서럽게 우는 정영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 7분은, 사실상 안시현의 원맨쇼나 마찬가지였다.

예고편까지 본 이후.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울고 있었던 우정태가 코를 풀고서 입을 열었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생겼어요. 이 아파트 주민 중, 몇 명이나 저희처럼 울고 있을까요?”

*   *   *

-정영빈이 울었고, 우리도 울었다.

-안시현의 오열 연기, 시청자들을 사로잡다.

-『너와 나의 시간』의 클라이맥스, 안방을 눈물바다로 만든 충격의 8분.

-안수진, 19화에서 기적적으로 의식 회복하나?

-[단독] 김희숙 작가, 최종화 퇴고 완료.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 스포일러 방지 위해 똘똘 뭉쳤다.

18화의 방송이 끝나자마자 지금까지의 방영 회차 중 가장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그만큼 18화가 시청자들에게 안겨준 임팩트가 컸다.

정영빈이 안수진과 결혼을 결심한 것도, 정영관의 사주로 인해 안수진이 뺑소니를 당한 것도, 그로 인해 정영빈이 심리적으로 무너져 내린 것도 문제였다.

거기에 19화의 예고편에서, 안수진의 부재로 인해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모습의 정영빈이 비춰지며 시청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18화의 방영 이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안수진을 살려 달라는 게시글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왔다.

이에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과 배우들은 시청률을 기대하게 됐다. 예상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최창국 PD의 연출력이 빛난 회차이니만큼 50%를 돌파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음 날.

이른 새벽까지 편집에 매진하던 최창국 PD는 당직실에서 한숨 자고 아침 일찍 드라마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이 출근하지 않은 시간, 드라마국에서 가장 먼저 시청률표를 손에 쥐었다.

시청률표를 확인한 최창국 PD는…….

“아…….”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우여곡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부족한 제작비로 인한 제작 무산의 위기, 면전에서 쓰레기 처리를 맡은 거라며 면박을 줬던 CP, 안시현을 만나고 JM액터스의 도움을 받은 것, 부족한 제작비를 만회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만 했던 시간들, 제작발표회에서의 무관심까지…….

너무 많이 고생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실제로 포기 직전까지도 갔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했던 건 8년간의 조연출을 거쳐 어렵사리 잡은 메인 PD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가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냈다. 드디어 해냈어…….”

뚝. 뚝. 뚝.

시청률표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최창국 PD가 그 동안의 서러움을 모두 토해 냈다.

KNC 『벚꽃이 진다』 - 9.5%

MBS 『너와 나의 시간』 - 51.1%

STS 『사랑받고 싶어』- 2.3%

마침내.

『너와 나의 시간』이 고지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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