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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61화 (6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1화>

61화. 어느새

50%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시청률이다.

60%를 넘는 국민드라마도 간혹 나오긴 했지만, 2000대 초반까지 대박 드라마를 판가름하는 기준점은 시청률 50%라고 보는 게 맞았다.

특히나 24부작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 50%를 넘는다는 건 천운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대체로 최고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드라마는 40부작 이상의 장기 편성으로 최대한 시청자들을 모으는 전략을 취하니까.

KNC 드라마국이 『거짓말』의 최고 시청률 50% 돌파를 위해 목을 맸던 것도, 24부작 드라마에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너와 나의 시간』으로 인해 49.9%에서 시청률이 하락하며 실패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너와 나의 시간』은 종영까지 6화를 남겨 둔 시점에서 최고 시청률 50%를 돌파했다. 심지어 마지막 7분 동안의 오열 신은 순간 시청률 55.3%까지 기록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이에 MBS 드라마국에서는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에게 두둑한 금일봉으로 보답을 했다.

오전 10시 무렵.

퉁퉁 부운 눈으로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최창국 PD는 금일봉에 대해 언급하며 미소를 지었다.

“식당 하나 빌려 놨습니다. 금일 촬영은 해 지기 전까지만 하고, 저녁에는 다들 마음 편하게 즐겨 줬으면 합니다. 오늘은 김 작가님도 오실 겁니다.”

간만에 회식 자리가 잡혔다.

첫 촬영 이후 대본 퇴고에만 매진하던 김희숙 작가도 최종화까지의 퇴고를 모두 마친 기념으로 회식에 참여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회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시청률 50% 돌파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제가 만든 캐릭터를 기대 이상으로 연기해 주신 배우님들과, 매 순간 저와 상의하며 촬영 및 연출을 해 준 최창국 PD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제 대본은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 처분됐을 겁니다.”

방송 3사에서 모두 외면을 받다 어렵사리 제작에 들어갔으나, 지원은 너무나도 열약했다.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 50% 돌파가 다른 드라마보다 더 주목을 받는 건, 적은 제작비로 엄청난 성과를 거둔 영향 또한 있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언더독의 반란이라고 표현했고,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을 거절했던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단독으로 따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난겨울.

안시현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제작이 무산됐을 가능성이 높다. 부족한 제작비로 인해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MBS 드라마국에서는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며 한창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였으니까.

그렇기에 김희숙 작가는 시청률 50%를 넘어선 지금 이 상황이 감격스러웠다.

집에서 미리 눈물을 흘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소감을 말하다가 펑펑 울었으리라.

즐거운 분위기 속에 회식이 시작됐다.

평소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인 차연우와 우정태는 오늘따라 유독 들떠 있었다.

특히나 차연우의 텐션이 유독 높았다.

“누나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이네요.”

“당연히 좋지. 무려 50%잖아.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라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우리 연우 말 잘한다!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맞지!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평소 술을 잘 입에 대지 않던 몇몇 배우들도 한 잔씩 마실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안시현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말이다.

3차까지 이어진 회식 자리에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은 사람은 안시현이 유일했다.

그 대신.

안시현은 배우들의 매니저와 연락하고 대리운전을 불렀다. 술을 마신 배우와 스태프들이 절대로 운전대를 잡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신경 썼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시청률 40% 넘은 기념으로 회식했다가, 조연 배우가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서 분위기 가라앉고 시청률에 영향을 미친 드라마도 있었으니 말이야.’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   *   *

2000년 9월 12일.

19화의 방영을 하루 앞두고서, 『너와 나의 시간』의 모든 촬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됐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열흘 후에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거예요?”

“MBS 메인 홀에서 촬영할 예정입니다.”

“이야, 역시 시청률은 잘 나오고 볼 일이라니까. 드라마한테는 메인 홀 대관 잘 안 해 주지 않나?”

“시청률 대박나면 해 준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아직 촬영이 100% 마무리 된 건 아니다.

드라마국에서 스페셜 방송의 촬영을 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해 왔고, 배우들과 제작진이 받아들이면서 추가 촬영이 예정된 것이다.

덕분에 안시현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스페셜 방송 촬영까지 열흘 가까이의 휴식이 주어지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스페셜 방송은 메인이 아닌 일종의 보너스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시청자들이 투표로 뽑은 명장면 톱5에 대해 배우들이 코멘트를 남기고, 촬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하거나 소감을 남기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니니 부담이 없는 게 당연했다.

열흘 동안 안시현은 무엇을 할까 고민해 보았다.

한동안 촬영에만 몰두했다. 최소한의 외부 스케줄만 소화하며 정영빈을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이제 촬영이 끝났으니 미뤄 놨던 일들을 하나씩 하고 싶었다. 고향에도 다녀오고, 대학로도 방문하고, 학교도 갔다 오고, 김진모의 촬영장에 응원도 가는 등 하고 싶은 일들이 꽤나 많았다.

‘일단은…… 하루만 푹 쉬자.’

안시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는 것이었다. 19화가 방영되기 몇 시간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잠을 자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박정상과 최봉팔에게 미리 말하고 휴대폰까지 꺼 놓은 상태로 말이다.

해가 진 이후에야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휴대폰을 켰다. 그사이 온 연락들을 확인하고서 식사를 했다.

“내일은 진모한테나 가 볼까? 아님 대학로?”

안시현이 차분하게 계획을 세워 나갔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예능 출연은 『너와 나의 시간』 가족들과 함께 나가는 걸 제외하면 모조리 고사했고, 쌓여 있는 광고와 화보 촬영, 그리고 인터뷰를 소화하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일부만을 소화할 예정이다.

휴식 시간을 확보하는 데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인기를 얻자마자 이미지를 모조리 소모해서는 안 되니까. 천천히 가는 게 맞아.’

톱스타 반열에 올라 그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연예인은 의외로 많지 않다.

상당수는 많은 인기를 얻었을 때 지나치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은 게 발목을 잡고 만다.

단시간에 지나치게 많은 이미지 소모를 하며, 그에 익숙해진 대중들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안시현은 롱런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매력을 조금씩 어필하며, 대중들에게 늘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뭐,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실 테니 알아서 관리해 주시겠지. 적어도 JM액터스 소속 배우 중 이미지 소모가 문제 된 케이스는 없었으니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니 오후 7시 무렵이었다.

본방 사수까지 약 3시간 남은 시점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안시현은 간만에 컴퓨터를 켰다.

‘공식 카페에 글이나 하나 남겨 볼까?’

팬클럽이 만들어질 당시, 박정상은 안시현에게 계정 하나를 알려 주었다. JM액터스에서 만든 안시현의 계정이었는데, 정작 촬영에 정신이 팔려 단 한 번도 접속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회원 수 2만 명을 넘어선 카페에는 게시글이 활발히 올라오고 있었다.

몇몇 게시글을 둘러보던 안시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글 하나를 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성한 게시글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너와 나의 시간』의 공식 촬영이 마무리됐고, 팬 여러분이 보내 준 사랑에 감사하며, 얼굴을 마주할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반응은 뜨거웠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100개 넘는 댓글이 달린 것이다.

게시글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팬클럽 카페 게시판의 최상단, 안시현 게시판에 글을 적을 수 있는 권한은 안시현 본인에게만 부여됐으니까.

팬들이 정성을 담아 달아 준 장문의 댓글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문득 회귀 전의 긴 무명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안시현은 대학로에서 1,500원 짜리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래다가, 한 팬으로부터 사인 요청을 받았다.

배우로서 받은 첫 사인 요청이었다.

그 팬은 영화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안시현의 모습을 인상 깊게 봤다고, 다음 작품에서는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길 바란다며 음료수를 사 주고 떠났었다.

배우의 길을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절.

팬의 응원에 안시현은 힘을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하자고, 포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는 계기가 됐다.

『너와 나의 시간』으로 인해 스타덤에 올랐음에도 안시현이 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그때의 소중한 기억이 큰 영향을 끼쳤다. 팬이 없으면 스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매 순간 상기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본방 사수 10분 전.

댓글에 달린 링크를 확인한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링크에는 안시현이 팬클럽 카페 게시판에 게시글을 작성한 것이 기사화되어 있었다.

“와. 무슨 카페에 게시글 하나 작성한 게 이렇게 빨리 기사화가 되냐.”

안시현은 자신이 스타덤에 올랐음을 기사 하나로 인해 다시 한번 체감했다.

*   *   *

『너와 나의 시간』19화에서는 안수진의 사고 후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하는 정영빈의 처연한 모습과, 그 틈을 노려 후계자 구도를 굳히려고 하는 정영관의 모습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그리고 또 한 명.

정영빈에게 도움을 준 정영철의 모습도 비춰졌다.

뺑소니를 당한 안수진이 신속하게 병원으로 옮겨진 건 정영철 덕분이었다. 정영빈의 부탁을 받은 정영철이 안수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비서와 함께 그녀를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사고를 막지는 못했다.

안수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거리를 둔 채 그녀를 따라다녀야 했고, 사고를 막는 게 아닌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정영철은 안수진의 뺑소니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려 했지만, 정영빈에게 거절을 당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팬들이 기대하던 안수진의 의식 회복은 19화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예고편을 통해 정영빈이 병실에서 안수진의 이름을 수차례 부르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녀의 신변에 변화가 생길 거라는 걸 드러냈다.

『너와 나의 시간』19화는 51.9%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18화에서 50%를 돌파한 기세를 이어 나가며 이번에도 시청률이 상승했다.

견제할 드라마가 없이 단독으로 흥행몰이 중이기에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20화의 방영을 앞두고.

최창국 PD가 다시 한번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20화의 내용을 일부 스포일러했다.

-최창국 PD, ‘유은서 비서의 정체, 20화에서 밝혀질 것’.

시청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던 유은서의 스파이 여부가 20화에서 밝혀진다는 것.

과한 스포일러는 시청자들의 흥미를 반감시키지만, 적절한 스포일러는 시청자들을 TV 앞에 앉힌다.

최창국 PD의 스포일러는 후자였다.

그렇게 방영된 20화.

안수진이 일주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고, 이에 정영빈이 오열하는 모습이 20여 분쯤에 그려졌다.

안수진이 의식을 회복한 이후.

정영빈은 뺑소니 사고에 대한 배후를 추격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아닌 안수진을 건드린 걸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은서의 정체가 밝혀졌다.

유은서는 많은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스파이였다.

평범한 스파이가 아닌 이중 스파이였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정영관의 사주를 받고 정영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던 게 맞지만, 정영빈이 눈치를 채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된 것이었다.

정영빈이 유은서를 설득한 방법은 단순명료했다.

“형에게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는 관심 없어. 그 5배를 주지. 앞으로는 나한테 허락받은 것만 형에게 보고해. 그 대신, 형을 통해 전달받은 내용은 나에게 토시 하나 빼먹지 말고 모두 다 보고하도록. 싫으면 이대로 폐기 처분되던가.”

더 큰 보상, 그리고 확실한 협박이었다.

20화의 막바지.

마침내 정영빈이 정영관을 찾아갔다.

“형, 아무리 후계자 자리가 욕심나도, 수진이는 건드리면 안 됐어.”

“수진이가 누구야? 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걸?”

“그래? 그럼…… 일단 J전자 상무이사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면 기억나게 되려나?”

“……뭐라고?”

“마지막 기회야.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병원 가서 수진이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 그게 아니라면, 형이고 나발이고 끝까지 갈 거야.”

이내 그에게 대놓고 선전포고를 했다.

사과할 기회를 줬지만 정영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영빈의 선전포고에 비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고.”

그렇게 마무리된 『너와 나의 시간』 20화는, 52.9%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어느새.

최고 시청률 55%, 나아가 그 이상을 노려 볼 만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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