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62화 (6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2화>

62화. 사진 찍어요

열흘의 휴식 기간 동안 안시현은 그동안 미뤄 놓았던 일들을 하나둘씩 처리해 나갔다.

가장 먼저 김진모의 촬영장을 방문해 응원을 했다.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사비를 들여 출장 뷔페를 불러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야. 살다 보니 톱스타님이 사주는 출장 뷔페를 먹는 날도 오네. 플랜카드 걸어놓은 거 봐라. 진모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겠는데?”

“캬아! 톱스타 친구 있으니까 좋네요. 저, 오늘 하루만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이런 건 힘 좀 줘도 돼!”

김진모는 배우들과 함께 자신을 응원하러 온 안시현에게 농담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덩달아 안시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걸 제외하면 문제는 없어 보였다.

‘회귀 전보다 시청률 상승세가 더 빠르니 힘이 날 법도 하지. 40%는 무난하게 넘기겠지?’

다음 날에는 마침내 데뷔를 한 우정태와 함께 학교를 방문했으며, 극단 광대들을 방문해 최정수를 비롯한 배우들과 간만에 김치찌개 가게에서 회포도 풀었다.

내친김에 정혜영도 만날 계획을 세웠지만…….

-저 당분간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요. 25일은 지나야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그럼 25일 이후에 봐요. 한턱 쏠게요.

-비싼 음식 사 달라 할 건데, 괜찮아요?

-광고 부지런히 찍어 놔야겠네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간만에 얼굴 보겠네요.

그녀가 바쁜 탓에 만남이 조금 미뤄졌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안시현은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에서 안시현은 대스타가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9시 55분이 되면 TV 앞에 앉았고, 마을회관에 단체로 모여서 『너와 나의 시간』을 시청하기도 했다.

덕분에 안시현이 방문한 것을 기념해 잔치가 열린 마을회관 앞에서는 즉석 사인회가 열렸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 그들의 자식과 손주들이 부탁한 것이었다. 안시현은 몇 장이 됐건 원하는 만큼 모두 사인을 해 줬다.

조금 더 쉬다 가라는 부모님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3일 휴식 후 안시현은 서울로 올라왔다.

‘대표님 덕분에 편하게 다녀왔네.’

원래 안시현은 버스를 타고 갈까 생각했었지만, 김진석 대표의 만류로 인해서 그만뒀다.

“하루 종일 사인만 하고 싶은 게 아니면 버스로 이동하는 건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언급되는 배우가 시현이 너라는 거, 슬슬 자각할 때도 된 거 같다만.”

“아…….”

“설마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뭐, 인기 얻었다고 거만해지는 놈들보다는 낫다. 조연만 맡아도 톱스타 된 것처럼 행세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너와 나의 시간』이 방영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시현은 대중교통을 더러 이용했었다. 회귀 전에도 운전하기 귀찮으면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때문에 별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려 했다가, 김진석 대표에게 정곡을 찔린 것이었다.

이동 수단에 대해 고민하던 안시현이 이내 조심스레 김진석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대표님, 죄송한데 회사 차 좀 며칠 빌려도 될까요? 고향 다녀와서 바로 반납할게요.”

“한 대 빌려줄 테니까 그냥 당분간 계속 타고 다녀. 그리고 선금 다 갚고 추가 정산되기 시작하면 그때 차 한 대 뽑고 돌려주면 돼. 이 기세면 조만간에 가능하지 않겠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깨끗하게 쓰고 돌려 드릴게요.”

그랜저XG 1998년식.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로부터 빌린 차를 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을 다녀왔다.

조연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직접 운전을 하며 스케줄을 소화했었다.

덕분에 운전에는 도가 텄다.

간만에 하는 운전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조금 연습하다 보니 금세 감각이 되살아났다. 고속도로에서 운전하자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차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덕분에 고향 잘 다녀왔습니다.

-고마우면 광고 찍자. 돈 벌어야지.

-추천해 주시는 대로 찍을게요.

-안 그래도 선별해 놨다. 아, 공익 광고가 하나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래?

-어느 거예요?

-헌혈.

-할게요. 바로 스케줄 잡아 주세요.

이후 스페셜 방송 촬영까지 남은 시간 동안 안시현은 미뤄 놨던 광고 촬영과 인터뷰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주로 독서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천천히, 지금 바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차근차근 영빈이를 내려놓자.’

안시현에게 있어 휴식은 곧 몇 달 동안 동고동락했던 정영빈을 내려놓기 위한 과정의 시작이었다.

회귀 후.

안시현은 『나는 간첩입니다』를 통해 인상적인 데뷔를 했고, 『형아, 동생』을 통해 첫 주연으로서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너와 나의 시간』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문제는 세 작품 사이의 휴식 기간이 짧았다는 것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24부작 드라마인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기 시작하자 생각한 것 이상으로 피로감이 크게 다가왔다.

이제는 정영빈을 놓아줘야 할 때였다.

넉넉한 휴식기를 가지며, 다음 작품을 위해 그 동안 쌓인 피로와 후유증을 말끔히 씻어 내야만 했다.

열흘간의 짧은 휴식 기간 동안, 안시현은 한 가지 취미 생활을 즐기게 됐다.

바로 댓글 달아 주기였다.

‘이거 은근히 재밌네.’

안시현의 팬클럽 카페에는 편지함 게시판이 존재한다.

조건을 충족한 정회원 이상의 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게시판인데, 이름 그대로 팬들이 안시현에게 편지를 작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안시현은 편지함 게시판에 올라온 팬들의 편지를 일일이 다 읽고 댓글을 달아 주기 시작했다.

쌓인 편지가 많아 제법 시간이 걸릴 테지만, 자신을 위해 장문의 편지를 써 준 팬들을 위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댓글을 달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웃긴 건.

-댓글 달아주는 남자 안시현, 팬서비스의 정석을 보여 주다.

-팬서비스까지 확실한 이 남자, 못 하는 게 뭘까?

팬들의 편지에 댓글을 달아 준 게, 팬서비스의 정석이라고 기사화가 되며 큰 호응을 얻은 것이다.

팬클럽에 첫 게시글을 남기고 기사화가 됐을 때와는 달리, 안시현은 이번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별의 별 게 다 기사화되는데, 이 정도야 뭐…….’

『너를 부르다』의 촬영장을 방문해 김진모를 응원한 것과 대학로와 학교와 고향을 방문한 것도 죄다 기사화가 된 마당이기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 덕분이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 언론들은 안시현이 무슨 행동을 하든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었다. 극히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사화하는 마당에, 팬들과의 바람직한 소통이 기사화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열흘의 시간은 삽시간에 흘러갔다.

2000년 9월 26일 화요일.

『너와 나의 시간』 23화의 방영을 하루 앞두고 제작진과 배우들이 간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촬영장이 아닌, MBS 사옥에서 말이다.

스페셜 방송의 촬영은 메인 홀에서 진행됐다.

시청자들의 투표로 뽑은 명장면 톱7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배우 개개인이 해당 장면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으며, 마지막에는 촬영을 모두 끝마친 상황에서 모든 배우들과 주요 제작진들이 차례대로 소감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전에 시작된 촬영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자. 이제 회식하러 갑시다.”

“우리 너무 자주 회식하는 거 아니에요? 종방연도 사실상 회식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싫어요?”

“아뇨. 너무 좋아요! 회식 최고야!”

“크흐흐. 오늘도 즐깁시다!”

MBS 사옥 근처에서 제작진과 배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이 그림을 볼 날도,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23화와 24화, 거기에 스페셜 방송 2화의 방영까지 끝나면 『너와 나의 시간』은 종영한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건 며칠 후 있을 종방연 때다.

다른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나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존재하겠지만, 『너와 나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 왔던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종방연을 끝으로 더 이상 없을 거다.

안시현이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몇 달 동안 매일같이 봐 온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집어넣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시간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시현의 감정을 들쑤셨다. 훗날, 지금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 만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졌다.

잠시 후.

안시현이 밖으로 나갔다.

몇 분 후에야 돌아온 안시현의 손에는 일회용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저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오! 사진 좋지.”

“그러고 보니 촬영하면서 저희끼리 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네요. 허구한 날 카메라 앞에 서다 보니 사진은 생각도 못 했네.”

“그럼 다 함께 찍어 볼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리도록 찍어보죠.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들 하잖아요.”

안시현이 『너와 나의 시간』의 추억을 기록했다.

*   *   *

『너와 나의 시간』은 21화에서 53.5%, 22화에서 54.4%의 기록하며 55%까지 마침내 단 0.6%의 시청률만을 남겨 두게 됐다.

매 회차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고 있는 『너와 나의 시간』이 과연 55% 고지마저 넘을 수 있을까에 대해 언론과 대중들에 관심이 집중됐다.

MBS 드라마국은 55% 돌파를 긍정적으로 내다보았다. 막바지 연출에 총력을 다하기 위해서 추가 인력까지 투입한 상황이니만큼,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정확히는 24화에 기대감을 걸고 있었다.

23화의 막바지에 제대로 불을 지를 생각이었으니까.

23화에서는 정영빈과 정영관의 경쟁이 극에 달한다. 두 사람 다 정건국 회장을 만족시킬 만한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경쟁의 승자는 정영빈이었다.

다만 경쟁에서 이겼음에도 후계자 구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일찌감치 정영관의 우세를 점해놓은 후계 구도를 뒤집을 정도로 큰 격차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한 끝 차이 승부였다.

문제는…….

정영관의 실적 중 일부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에 정영빈은 고민에 빠졌다.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상황을 지켜보며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볼 것인지 말이다.

그런 정영빈이 결단을 내리게 만들어 준 건 재활을 끝내고 다시 명품관에 출근하기 시작한 안수진이었다.

“사장님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할지도 몰라요. 사장님도 알고 있잖아요.”

“……마음의 준비를 위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어요?”

“있지. 그것도 아주 큰 거.”

“그럼 당연히 도와야죠!”

안수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정영빈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지 돕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모습에 정영빈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수진과 가볍게 포옹을 하며 속삭였다.

“오빠라고 한 번만 불러 주면 안 될까? 이러다 결혼하고 나서도 사장님이라고 할 것 같은데 말이야.”

“……오빠?”

“좋아. 최고의 도움이었어.”

“치잇. 뭐예요, 그게.”

다음 날.

정영빈은 승부수를 던졌다.

유은서로부터 받은 증거, 정영철로부터 받은 증거,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수집한 증거들까지 들고서 정국영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영관이 그동안 저지른 범법 행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증거를 보여 줬다.

“지금 보신 자료들은 사본입니다. 원본은 제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몇 시간 내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에서도 보도하게 될 겁니다. 특히 J건설이 수주를 맡고 있는 중동 언론들이 집중적으로 말이죠.”

“이걸 왜 나한테 보여 주는 것이냐?”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이 모든 걸 덮을 테니, 영관 형이 아닌 절 후계자로 확정해 주십시오. 실적으로 보나 결격 사유로 보나, 저를 선택하는 게 아버지께도 이득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아비와 협상을 하자는 것이냐?”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

“허허허. 오해? 지금 오해라 했어? 증거를 없애 주는 대가로 영관이를 내 손으로 잘라 내라고 요구하면서, 이게 협상이 아니라는 말이냐?”

“네.”

정영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정건국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정영빈의 그 말을 끝으로 23화가 마무리됐다.

예고편은 없었다.

OST와 함께 이전 회차의 주요 컷들을 보여 준 뒤 자막 한 줄을 넣은 게 전부였다.

-내일, 『너와 나의 시간』 최종화가 방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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