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3화>
63화. 모든 순간이
-『너와 나의 시간』, 시청률 55.6% 기록하며 55% 돌파!
- 최종화만을 남겨 둔 『너와 나의 시간』, 자체 최고 시청률 다시 한번 경신할까?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 엔딩 유출 단속에 사활.
-최창국 PD, ‘최측근 엔딩 스포일러 기사 사실 아냐. 직접 보고 확인해 주시길’.
-일룡백화점, 『너와 나의 시간』 최종화 방영 앞두고 안시현이 선택한 명품 정장 이벤트 진행.
-『너와 나의 시간』, 해피엔딩 맞이할 수 있을까?
『너와 나의 시간』 23화는 55.6%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55%의 고지마저도 넘어섰다.
이제 남은 건 최종화뿐이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엔딩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최창국 PD를 제외한 모두가 언론과의 접촉을 자제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말실수로 인해 스포일러를 할 수도 있기에, 아예 여지 자체를 차단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다가온 9월 28일.
해가 질 무렵, 안시현은 다시 한번 연예인 아파트를 방문했다.
다만 이전과 목적지가 달랐다.
안시현이 방문한 건 바로 정혜영의 집이었다.
정혜영은 김희숙 작가가 『너와 나의 시간』을 집필하게 된 계기이자 정영빈 캐릭터의 모티프이며, 안시현이 정영빈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안시현은『너와 나의 시간』 최종화를 정혜영과 함께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촬영 종료 후 대부분의 지인들과 한 번 이상 만났지만, 정혜영의 경우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나도, 『너와 나의 시간』도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힘든 일정 속에서도 안시현이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정혜영이 주기적으로 보낸 무덤덤한 응원의 문자메시지 덕분이었다.
게다가 정혜영은 일룡백화점과 일룡호텔 등의 장소를 협찬해 주며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그녀의 아니었다면 제작비가 추가 편성되기 전,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로 인해 촬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최종화를 보는 건, 안시현 나름대로의 감사하다는 의사 표시였다.
물론 빈손으로 방문하지는 않았다.
“……그게 다 뭐예요?”
“먹을거리 좀 사 왔어요. 저번에 집에서 잘 안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서요. 제 입맛대로 사 와서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요.”
“냄새는 좋은데요?”
어떤 음식을 사 갈까 한참 고민했던 안시현은, 결국 주변 지인들에게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맛집에서 포장을 해가는 결로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정혜영은 안시현이 사 온 음식을 맛있게 먹어 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시현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맺혔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대부분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하고, 집에서는 과일 정도만 먹는다고 했었잖아요. 아. 가끔은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셨던 집밥이 그립다고도 했죠.”
“와. 감동이다, 진짜.”
간만에 만난 정혜영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친구가 되기로 한 날에도 느꼈지만 정혜영과는 대화 코드가 잘 맞는 편이기도 했거니와, 『너와 나의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9시 50분.
안시현과 정혜영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시작된 『너와 나의 시간』의 최종화.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정영빈이 정건국 회장을 협박하는 장면으로부터 최종화가 시작됐다.
정건국 회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신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아들을, 감정을 파악하기 힘든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영빈은 정건국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선택지는 둘뿐입니다. 영관 형을 포기하거나, 안고 가되 피해를 감수하거나. 단, 후자일 경우 조용히 무마하시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거면 남도 가지지 못하게 해라. 아버지의 가르침 중 하나였죠.”
“……하하하!”
이내 정건국 회장은 박장대소를 했다.
화를 내기는커녕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흐뭇하게 정영빈을 바라보았다.
협박을 한 정영빈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그래! 모름지기 한 그룹의 수장이 되고 싶다면 이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화내지 않으십니까?”
“화는 무슨. 약점을 잡힌 놈이 잘못한 거지. 쯧. 영관이 놈이 네 배짱의 반만 따라갔어도 이 꼴이 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랬다면 이런 짓들도 저지르지 않았겠죠.”
정건국 회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가장 후계자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지만 욕심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건국 회장마저도 속였던 막내아들과, 대놓고 야심을 드러내며 온갖 지저분한 짓들도 마다하지 않고서 일찌감치 후계자가 되고자 했던 둘째아들의 경쟁.
문득 정건국 회장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승부는, 정영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영관이는 외국으로 보내마. 네 자리가 확고해질 즈음 불러들여, 자회사 몇 개 맡기는 선에서 끝내자꾸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의외로구나. 완전히 매장시키려 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 했던 J그룹을 제가 차지하는 걸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게 만드는 것보다 더한 복수는 없을 테니까요. 영관 형에게도, 새어머니에게도 말이죠.”
“허허허. 맞는 말이다. 그리고…….”
정국영 회장이 정영빈의 손을 잡았다. 그는 이전과 달리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정영빈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네 새어머니가 저지른 일,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늦게 말해 준 것 같구나.”
“이해합니다. 어릴 시절의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뒤늦게라도 말해 주셨기에, 오늘 제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겁니다.”
후계자 경쟁에 불을 지폈던 날.
정건국 회장은 정영빈에게 어머니의 사망에 얽힌 진실을 이야기해 줬다. 새어머니의 사주를 받은 경호원이 저지른 사고라고, 정건국 회장 또한 몇 년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영빈이 정영철에게 안수진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었다. 외국으로 쫓겨난 새어머니, 혹은 정영관이 안수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승자는 정영빈이었다.
보름 후.
J전자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정영빈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정국영 회장의 아랫자리에 앉기 전, 임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J전자 상무이사를 겸하게 된 J백화점의 사장 정영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영관은 새어머니가 있는 외국 지사로 쫓겨났고, J전자 상무이사 자리에 오른 정영빈은 후계자로 인정받고서 본격적으로 지분 승계 작업이 시작됐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프러포즈였다.
“음…… 내가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로맨틱은 나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그래서 직구로 승부하기로 했어. 수진아, 나랑 결혼하자. 평생 돈 걱정 안 하게 해 줄게. 심장이 멈추는…….”
“좋아요. 결혼해요.”
프러포즈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거창한 이벤트도, 번지르르한 말도 없었다. 심지어 준비한 반지를 꺼내 보지도 못했다.
정영빈이 허탈한 표정으로 안수진을 노려보았다.
“야. 인간적으로 준비한 멘트는 끝까지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 그보다 이렇게 쉽게 승낙하는 게 맞아? 프러포즈가 이렇게 쉬운 거였어?”
“사장님이 뭐라 말해도 상관없었어요. 저 사랑하잖아요. 저랑 평생 함께하고 싶은 거잖아요. 마음이 확실한데, 말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런가?”
“그럼요.”
정영빈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고, 안수진은 그런 그를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너와 나의 시간』 최종화의 마지막 신은, 작은 성당에서 지인들만을 초청해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정영빈과 안수진의 모습이었다.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안수진이 눈시울을 붉혔다.
“좋은 날 왜 울고 그래.”
“너무 좋아서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당연하지. 수진이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정영빈이 미소를 지었다.
안수진과 키스를 하고, 손등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잡고서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의 시간인걸.”
“사랑해요, 오빠.”
“나도.”
정영빈과 안수진이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가족들과 지인들의 축복을 받는 가운데, 행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끝으로 『너와 나의 시간』이 마무리됐다.
* * *
최종화의 방영이 종료된 후.
한동안 집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한참 후에야 정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피엔딩이네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죠.”
“근데 그 전형적인 걸 너무 잘 살렸어요.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의 드라마가 몇이나 있겠어요. 그것을 어떻게 살리느냐의 문제죠.”
“동의합니다.”
사실 『너와 나의 시간』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와 재벌물의 클리셰를 적절히 섞은 작품이다.
중요한 건 주연과 조연 할 거 없이 캐릭터들의 특징이 뚜렷하고, 배우들이 그것을 잘 연기했으며, 거기에 최창국 PD의 신들린 연출력이 더해졌다.
스토리는 비슷할지언정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해피엔딩으로 훈훈한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여운이 남은 걸까? 정혜영은 한참 동안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안시현과 대화를 나눴다.
“제 취미가 왜 영화와 드라마 감상인 줄 알아요?”
“글쎄요. 저 같은 경우는 주로 좋은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거나, 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봐서요.”
“배우다운 시선이네요. 전 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봐요. 나는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내 삶은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죠? 해피엔딩을 보면 행복해야 되는데, 전 우울해져요.”
2, 30대 여성들이 뽑은 우상 1위, 대한민국 국민이 뽑은 최고의 여성 CEO 1위 등.
온갖 긍정적인 수식어가 그녀를 뒤따랐다.
언론에서는 그녀를 항상 추켜세웠다. 그녀를 모델로 한 드라마와 영화 캐릭터가 다수 존재할 정도였다.
과연 회귀 전의 그녀는 행복했을까?
사회적 지휘와 대중들의 시선이 행복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또한, 회귀 전 그녀와 접점이 없는 안시현으로서는 행복의 유무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안시현은 바랐다.
“지금까지 불행했다면, 이제부터라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그럼 바로 시도해 봐야겠네요. 제 유일한 친구가 와인을 같이 마셔 주면 행복할지도?”
“한 잔 정도라면…… 가끔 같이 마시죠.”
“충분해요. 늘 혼자 마셔서 적적했거든요. 아, 저 놀이동산도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열애설 감당할 자신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같이 가드리죠. 아, 그리고 저 팬들 사인 요청 잘 거절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좀…….”
자신이 아는 정혜영은 행복하기를.
* * *
『너와 나의 시간』은 최종화에서 56.3%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정석적인 엔딩에 대해서는 다소 호불호가 갈렸지만, 대체적으로 깔끔한 결말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며 좋은 평가가 내려졌다.
최종화 방영 후.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은 촬영장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NG 장면 모음 및 배우들의 명장면 코멘트와 소감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 도합 2화짜리 특집 방송을 예고했다.
후속작의 촬영 일정 문제로 편성을 일주일 늦추기 위한 MBS 드라마국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방영된 이 특집 방송은, 첫 회에 무려 시청률 38.8%를 기록하며 『너와 나의 시간』의 인기를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다.
38.1%의 시청률을 기록한 두 번째 특집 방송은, 첫 번째 특집 방송보다 시청률이 조금 떨어졌지만 오히려 더 화제가 됐다.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특집 방송의 대미를 장식한 안시현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안시현 배우님에게 『너와 나의 시간』은 어떤 의미입니까?”
정석적인 질문이었다.
『너와 나의 시간』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에게, 최창국 PD와 김희숙 작가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누군가는 웃으며 대답을 했고, 누군가는 눈물을 보였다. 특히나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에게 감사하다며 대성통곡을 하는 통에 인터뷰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대답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존재했다.
다들 큰 고민을 하지 않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 안시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음…… 어…….”
그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듯하다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손짓으로는 말을 하겠다고 표현하면서도 정작 내용은 없었다.
십 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주 어렵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갈라지며 흘러나왔다.
“『너와 나의 시간』은 제가…… 배우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작품입니다. 그리고…….”
안시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왼손을 얼굴에 가져대 댄 채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