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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65화 (6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5화>

65화. 하고 싶은 말

2000년 한 해.

MBS에서는 최고 시청률 60%대를 기록한 드라마가 하나, 50%대를 기록한 드라마가 둘, 40%대를 기록한 드라마가 둘 나왔다.

그리고 그중.

MBS 연기대상을 앞두고 가장 주목을 받은 드라마를 꼽으라면 두 가지로 압축이 됐다.

대한민국 사극 역사상 평균 시청률과 최고 시청률 1위 기록을 모두 갈아 치웠으며, 1999년부터 2000년 사이 대한민국에 한의원 열풍을 불러일으킨 『어의』.

무릎베개 키스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드라마에 나온 협찬 제품들은 재고가 없어 팔기 힘들 정도로 인기를 끈 『너와 나의 시간』.

MBS는 시상식을 사흘 앞두고 연기대상 11개 부문의 후보를 일제히 공개했다. 시청자 투표로 선별되는 인기상과 올해의 작품상을 제외한 모든 부문의 수상자는, 드라마국 PD들과 기자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이 완료된 상태였다.

대중들의 관심은 올해의 작품상과 인기상에 쏠렸다.

다른 상은 이미 수상자가 선별된 상황이라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올해의 작품상과 인기상은 100%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 선별되니까.

안시현의 팬클럽 팔색조에서는 MBS 연기대상을 앞두고 투표를 독려했다. 한 명이라도 더 투표를 해서 올해의 작품상을 『너와 나의 시간』이, 인기상을 안시현이 수상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물론 정작 기대하는 건 다른 쪽이었지만 말이다.

안시현이 수상 후보에 오른 부문은 도합 셋.

신인상, 우수상, 마지막으로 최우수상 및 대상이었다.

2000년 한 해 MBS에서는 걸출한 드라마가 제법 많이 나왔고, 그러다 보니 우수상과 최우수상 및 대상에서 겹치는 후보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과 김진모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심지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신인상까지 포함해 3개 부문에서 나란히 후보에 올랐다.

이에 안시현의 팬들과 김진모의 팬들은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안시현 팬덤의 생각은 확고했다.

신인상은 확정적이고, 우수상은 건너뛰고, 최우수상을 기원하며 인기상까지 노려보자!

신인상의 경우 안시현과 김진모의 2파전이라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지만, 안시현 쪽으로 좀 더 무게감이 쏠리는 게 사실이었다.

『너를 부르다』가 최고 시청률 43.8%를 기록하며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사실이지만, 『너와 나의 시간』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같은 이유로 최우수상과 대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론들은 대상의 경우 『어의』에서 명연기를 보여 준 배우 진광욱이, 최우수상의 경우 『너와 나의 시간』의 흥행 돌풍을 이끈 안시현이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을 줄지어 내놓았다.

실제로 두 배우가 아닌 다른 배우가 대상과 최우수상을 수상한다면 논란이 예상될 정도로, 두 배우는 각각의 작품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줬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김진모의 팬클럽 ‘페르소나’는 신인상 투표에 목을 맸다.

워낙 경쟁이 치열해 우수상마저 장담하기 힘든 상황, 자신들의 손으로 김진모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기고 싶다는 의도였다.

문제는 안시현의 팬클럽 팔색조 또한 신인상과 올해의 작품상 수상을 위해서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는 것.

결국 두 팬클럽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안시현과 김진모의 친분 때문인지 살벌한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개념 없는 팬들의 상대 배우 폄하 및 비난으로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도 했다.

팬들의 경쟁이 치열한 것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안시현과 김진모는…….

“아침부터 삼겹살이라니 미쳤다.”

“정장 입기 전에 먹어야 냄새 안 배지.”

“그 대신 집에 배겠지만. 미용실 가기 전에 환기시켜 놓고 나가야겠는데?”

“그게 좋겠네. 아무튼 이사를 기념하며 건배.”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건배하는 건 우리밖에 없을걸. 뭐…… 기분 좋은 날이니까 받아 줄게. 크흐흐.”

안시현이 『너와 나의 시간』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올랐듯, 김진모 또한『너를 부르다』의 흥행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안시현만큼은 아니지만 회귀 전보다는 반향이 컸다.

몇 개의 광고와 화보 촬영을 했으며, 거기다 『너를 부르다』의 촬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5월부터 촬영 예정인 조선 시대 배경의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덕분에 김진모가 아파트를 구매했기에 1월 초 있을 그의 이사를 기념하며 집에서 조촐한 삼겹살 파티를 하고 있었다.

뭐, 그래 봐야 안시현이 사는 집 바로 옆 라인이었지만 말이다. 프라이버시 때문에 옆집까지는 곤란하고, 2층은 무서워서 안 된다나 뭐라나.

삼겹살 파티 후.

뒷정리를 하고 씻은 김진모와 안시현이 미용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는 사이, 박정상과 최봉팔은 일룡백화점에 가서 정장 협찬을 받아 왔다.

안시현이 광고를 한 명품 정장 브랜드에서 며칠 전 출시한 따끈따끈한 신상품이었다.

안시현의 메이크업이 끝나 갈 즈음.

“시현아!”

미용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여성이 안시현을 발견하고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차연우였다.

“음? 누나도 미용실 여기 다녔어요?”

“이번 달 초에 옮겼는데 몰랐어? 그러고 보니까 미용실에서 너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제가 요 근래 미용실 올 일이 없었거든요. 팬 미팅 끝내고 한량으로 살았더니…….”

“고생했으니 푹 쉴 자격 있지. 차기작은?”

“봄 되면 천천히 생각하려고요. 그나저나 타이밍 좋네요. 누나한테 전화하려고 했었거든요.”

“응? 나한테?”

“네. MBS에 같이 가자 말하려고 했거든요. 제가 누나 에스코트하는 게 그림이 괜찮지 않겠어요?”

“하긴, 그게 정석이긴 하지? 다른 배우들도 많이들 그러더라고.”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이 함께 행사장에 입장하는 건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워낙 많은 사랑을 받았던 『너와 나의 시간』이기에, 팬서비스 차원에서 시상식 때 차연우를 에스코트할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이에 차연우는 흔쾌히 응했다.

덕분에 안시현은 메이크업인 끝난 김진모를 먼저 떠나보내고, 미용실에서 차연우를 기다리게 됐다.

“누나, 차기작 캐스팅됐다면서요?”

“응. 그렇다고 바로 촬영하는 건 아니고, 2002년에 방영할 드라마인데 일단 캐스팅라인부터 확정하려나 봐. 좀 틀에 박힌 스토리이긴 한데…… 대사랑 감독님의 연출력이 마음에 들어서 결정하게 됐어.”

“드라마 이름이 뭐예요? 저랑 동시간대 방영하는 거 아니면 본방 챙겨 보게요.”

“『눈의 노래』야.”

드라마 제목을 들은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우 누나는 일본에서 역대급으로 대박이 날 그 드라마를 하게 되는구나.’

일본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대한민국 드라마이자, 일본 내에서 대한민국 드라마 수입 열풍의 계기가 된 드라마.

차연우의 차기작은 바로 그 작품이었다.

문득, 안시현이 한 가지 정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너와 나의 시간』이 1월 말부터 방영한다고 했던가? 『눈의 노래』가 방영하기 전이고, 케이블이라서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정도는 지켜봐야겠네.’

『너와 나의 시간』은 도합 4개국에 수출됐다. 그리고 그중 일본에서 1월 말에 가장 먼저 방영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다.

과연 『너와 나의 시간』은 해외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까?

안시현은 휴식기가 지루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   *

“신인상 수상자는…… 축하드립니다! 『너와 나의 시간』의 정영…… 아, 죄, 죄송합니다. 안시현!”

“하하하하하!”

2000년 MBS 연기대상 신인상 부문 수상자는 상당수의 언론이 예상한 대로 안시현이었다.

전년도 신인상 수상자인 여배우의 말실수로 인해 시상식장에 웃음소리가 전염된 가운데,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왼쪽에 앉은 김진모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오른쪽에 앉은 『너와 나의 시간』가족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거의 동시에 그와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 올라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너무 많이 받아 반 이상을 바닥에 내려놓고 난 뒤에야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었다.

“아, 오늘 꽃다발 두 번만 더 받고 싶네요.”

“와아아아아아!”

진심이 섞인 농담으로 환호성을 유도하고서 안시현이 본격적으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대한영화제 때와 달리 안시현은 수상 소감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이었기에,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생각이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한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하고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연기만 보고 사는, 연기로 보답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요. 2000년은 그 꿈에 몇 걸음 다가갈 수 있었던 해였습니다. 배우 안시현이 아닌, 제가 연기한 배역들이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상 소감을 말한 안시현이 꽃다발과 트로피를 들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넘쳐나는 꽃다발을 일부 건네받은 김진모가 피식 웃었다.

“수상 소감이 생각보다 짧다?”

“준비를 안 해 왔더니 길게 말을 못하겠더라. 아, 생각해 보니까 감사한 사람들 이름도 말 못 했어. 역시 준비할 걸 그랬나?”

“무슨 걱정이야. 다음에 올라가서 말하면 되는걸. 난 한 번에 다 말하려고 아예 적어 왔다. 상 받으면 제대로 써먹어야지. 아, 제발 상 받게 해 주세요. 올해의 집안일 상 같은 건 없나요.”

다행히 바람대로 김진모는 상을 받았다.

“2000년 MBS 연기대상 우수상 수상자는…… 『너를 부르다』의 김진모 배우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어의』와 『너와 나의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시청률이 더 높은 드라마는 몇 있었지만, 『너를 부르다』의 경우 김진모가 사실상 원톱으로서 드라마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게 득표율에서 앞선 이유가 됐다.

“으어어어어! 우아! 와!”

김진모는 환호성인지 괴성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소리를 내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받은 뒤.

당당하게 준비해 온 종이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제가 대사는 잘 외우는데, 나머지는 잘 못 외워 가지고…… 보면서 수상 소감을 말하겠습니다. 흠흠흠. 일단 제게 좋은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솔직히, 데뷔를 하면서 부담이 심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부모님이 워낙 훌륭한 배우…….”

김진모는 차분하게 수상 소감을 읽어 나갔다.

배우 2세로서의 부담과 고뇌, 누군가의 자식이 아닌 배우 김진모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 과정들을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한 좋은 소감이었다.

“마지막으로 페르소나 여러분, 사랑합니다!”

팬클럽에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걸 끝으로 김진모가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우수상 수상까지 끝난 상황.

이제 남은 시상 부문은 인기상, 올해의 작품상, 최우수상, 그리고 대상까지 도합 4개였다.

그리고 변수는 발생하지 않았다.

안시현은 인기상과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인기상은 안시현의 팬덤이 워낙 두텁기에, 최우수상은 『너와 나의 시간』의 흥행 돌풍을 생각하며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올해의 작품상은 『어의』가 차지했다.『너와 나의 시간』이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사실이지만, 『어의』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는 결과였다. 『어의』의 팬들이 인기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올해의 작품상에 집중적으로 투표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영예의 대상은…….

“축하드립니다. 『어의』의 진광욱 선배님!”

최우수상을 안시현이 수상한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듯,『어의』의 주연 배우인 진광욱이 호명됐다.

무대에 오른 진광욱을 향해 수많은 배우들이 꽃다발을 건넸다. 미소를 지은 진광욱이 차분하게 제법 긴 수상 수감을 이어 나갔다.

수상 소감이 마무리 될 즈음.

“마지막으로 안시현 후배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광욱이 안시현의 이름을 언급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안시현에게 집중됐다. 카메라가 일제히 객석에 앉아 있던 안시현을 찍기 시작했다.

정작 안시현은…….

‘응? 방금 나 부르신 거야?’

진광욱이 자신을 언급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안시현이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진광욱은 안시현을 바라보며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후배님과 꼭 함께하고 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관심 있다면 소속사를 통해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개 러브콜.

진광욱이 연기대상 시상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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