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6화>
66화. 하고 싶다
‘…… 응?’
진광욱의 수상 소감을 들은 안시현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진광욱 선배님이 왜 나한테…….’
자신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진광욱이 갑작스레 작품을 같이하고 싶다며 공개 러브콜을 했으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이거, 언론들 난리 나겠는데?’
안시현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기자들이 꽤나 많았다. 분위기를 봐서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이에 안시현은 언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진광욱의 수상 소감과 함께 2000년 연기대상이 마무리된 직후, 김진모는 안시현을 데리고 재빨리 메인 홀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진광욱의 수상 소감을 듣자마자 다급히 주차장으로 향한 박정상과 최봉팔이 차에 미리 시동을 걸어 둔 상황이었다.
뒤따라 나온 기자들이 제법 있었지만…….
“진광욱 선배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속사와 협의 후 공식적으로 입장을 발표하겠습니다.”
안시현은 정석적인 대답을 하고서 차에 탔다.
그 직후.
박정상이 한숨을 내쉬며 안시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기자분들에게 말한 것처럼, 대표님하고 이야기해 본 다음에 결정해야죠. 이건 저 혼자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안시현은 곧장 김진석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도 채 가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보고 계셨죠?”
-시현이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하신 건데 유야무야 넘어가면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겠어요? 일단은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음. 역시 그렇지? 오랜만에 광욱이 얼굴 보겠구만. 제대로 사고 쳤으니 인사 대신 욕 좀 해야겠네. 내일 시간 어떠냐?
“저 요새 한량인 거 아시면서.”
-그럼 점심에 한정식집에서 보는 걸로 하자.
안시현과 김진석 대표는 최대한 빨리 진광욱 측을 만나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대상과 최우수상 수상자의 만남 성사?
-진광욱, 안시현에게 이례적인 공개 러브콜.
-JM액터스, ‘비공개 미팅 예정, 추후 보도 자료 통해 자세한 입장 밝힐 것’.
-진광욱, ‘일이 커진 것 같다, 안시현 배우와 JM액터스에게 죄송.’
-상대 배우를 배려하지 않은 연기대상 배우의 공개 러브콜.
전날 MBS 연기대상에서 있었던 진광욱의 돌발 발언과 관련된 기사가 줄지어 쏟아져 나왔다.
일부 언론사는 진광욱의 일방적인 공개 러브콜이 안시현에게 피해를 준 행동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췄다.
안시현은 공개 러브콜 수락 여부 말이다.
자고 일어난 안시현은 기사를 확인했다.
아침 운동을 하는 동안, 진광욱의 공개 러브콜과 관련된 고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스쳤다.
‘진광욱 선배님은 도대체 내게 어떤 작품을 함께하자고 하시려는 걸까?’
안시현은 시상식에서 진광욱이 한 발언이 돌발적인 것이 아닌, 미리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 진광욱 정도 되는 배우가 파급력이 엄청날 발언을 감정적으로 했을 리는 없다고 봤다.
그렇다면 정말로 함께 작업을 하고 싶어서 러브콜을 보냈다는 건데…….
도대체 어떤 작품을 함께하고 싶어서 이 난리를 친 건지 궁금했다. 배우로서의 호기심과 욕심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고, 대본을 확인한 다음에 결정하자. 일정이 너무 타이트하거나 기대 이하의 작품이라면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어.’
물론 가이드라인은 확실하게 정했다.
안시현은 최소 초여름 정도까지는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 전에 제작을 시작하는 작품이라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기대 이하의 작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오전 12시 무렵.
안시현이 박정상과 함께 한정식당에 도착하고 얼마 후, 진광욱이 안시현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 드라마의 작가를 데리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김진석 대표와 안시현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후배님도 미안해요. 내가 워낙 마음이 급해서 뒷일을 생각 안 하고 저질러 버렸지 뭡니까.”
“그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16부작이고, 캐스팅 라인이 제대로 갖춰진다는 가정 하에 35% 이상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호오. 자신감 넘치는데? 시놉시스부터 볼까?”
“여기 있습니다.”
김진석 대표와 안시현이 시놉시스와 대본 일부를 건네받았다. 먼저 확인을 끝마치고 입을 연 건 김진석 대표였다.
“색이 확실하네. 광욱이 네 말대로 캐스팅 라인만 제대로 갖춰지면 결과가 괜찮겠어. 넌 여기서 어떤 역을 맡고 싶은 건데? 주연 둘은 연령대를 손보지 않으면 네가 맡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안필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연은 관심 없고요.”
“너도 참 특이한 놈이다. 어제 연기대상 받아 놓고 조연을 자청하다니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할 거다.”
“배역의 비중보다 제게 잘 맞는 옷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신 건 선배님이십니다만…….”
진광욱은 작품을 고를 때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에게 맞는 옷인지 아닌지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안시현이 기억하는 그는 몇 년 후에도 주연이 아닌 조연을 더 많이 맡는다. 자신이 직접 빛나기보다는 다른 배우들을 빛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작품의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제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광욱은 주연이 아닌 조연을 자청했다. 작품의 핵심인 투톱 중 하나를 안시현이 맡아 주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낮췄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여기서 왜 나와?’
진광욱이 출연 제안을 한 드라마가, 안시현이 알고 있는 드라마라는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안시현이 단역으로 출연했던 드라마다.
대사는 도합 열 마디 이하, 출연 분량 3분 남짓.
문자 그대로 단역이었고, 데뷔작이었던 『나는 간첩입니다』처럼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이 드라마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평균 시청률 7%대에, 최저 시청률 3%대…… 3.2%였던가?’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 중 가장 시청률이 낮았던 드라마이기 때문이었다.
* * *
안시현은 시놉시스와 대본을 검토하며 차분히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광욱 선배님은 출연하지 않았어.’
일단 진광욱은 이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었다.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광욱이 맡겠다고 한 배역은 다른 배우가 연기했었다.
‘작가님은 그대로야. 문제는 히트 메이커 작가님을 데리고,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건데…….’
또한 대본을 쓴 작가는 훗날 김희숙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드라마 작가 중 한 명으로 성장한다. 또한 1999년에 방영된 입봉작 『그대』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실제로 안시현이 받은 대본 또한 퀄리티가 좋았다. 괜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문제는…….
‘좋은 대본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본이 좋고, 배우가 좋은 드라마라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안시현이 손에 들고 있는 이 대본은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2002년에 가장 낮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라는 불명예를 얻고 만다.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좋은 대본은 이번에도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 거다.
안시현이 대본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진광욱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께선 제가 어떤 배역을 맡길 바라십니까?”
“유성수가 잘 어울리지 않겠나 싶어요.”
“으음. 지금까지 제가 보여 준 연기만을 놓고 보면, 유성수보다는 최민이 더 잘 어울리지 않나요?”
“지금이라면 최민이죠. 『너와 나의 시간』 막바지에 연기 변신을 시도하는 게 보여서, 그 변신이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유성수가 더 잘 어울릴 거라고 말한 거예요. 아, 혹시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예리하시네요.”
진광욱의 지적은 핵심을 관통했다.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 촬영 후반부부터 조금씩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최정수와 김진모, 김진석 대표를 비롯해 안시현과 친분이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연기 내공이 탄탄한 진광욱 또한 안시현의 새로운 시도를 눈치챈 것이다.
괜히 연기대상 수상자가 아니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진광욱의 예리한 시선에도 안시현의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좋은 대본에도 최악의 결과를 낸 작품에 출연한다는 건 쉽사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송명현의 하차로, 『형아, 동생』은 주연 배우의 교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문제 요소만 제거하면 좋은 성적을 기록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작 자체가 무산됐었던 『너와 나의 시간』은, 결과적으로 몇몇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최고 시청률 55%를 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그냥 시작부터 최악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많은 걸 바꾸고 시작해야 좋은 대본이 빛을 볼 수 있는 상황이기에,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발품을 팔아서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서야만 해.’
안시현의 요청에 진광욱과 작가가 시선을 교환하고서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드라마, 주연 캐스팅 라인을 확정해야 제작비와 편성 견적이 나올 상황이거든요. 대본은 좋은데 좀…… 제대로 된 연출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방송사들이 좀 회의적이더군요.”
“일주일이면 됩니다.”
“그 정도면 저나 작가님이나 고맙죠.”
“아. 혹시 타인에게 대본을 보여줘도 되겠습니까? 외부 유출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안시현이, 답변을 일주일 후로 미뤘다.
* * *
미팅이 끝난 뒤.
안시현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벽에 기댄 채 쭈그려 앉아, 대본을 손에 쥐고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시청률 1위, 가능할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드라마가 과연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가정했을 때,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드라마가 될 수 있을까?
모든 드라마가 시청률 50%를 넘을 수는 없다.
가장 현실적인 목표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하는 거다. 다른 두 드라마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안시현은 문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한 뒤에 시청률을 예상해 보았다. 그리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아니, 사실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하고 싶다.’
대본을 본 순간, 진광욱이 제안한 배역을 맡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랐으니까. 여러 이유로 인해 거부하기엔 대본이 너무 마음에 들었으니까.
심지어 제작도 빨라야 2001년 9월부터 들어간다. 어쩌면 그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다.
푹 쉬고 나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엔 더없이 좋은 상황임이 분명하다. 솔직히 대본을 보자마자 바로 대답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요청한 건…….
‘큰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드라마는 실패할 거야. 대책을 강구해야 돼.’
회귀 전에 야기됐던 시청률 저하의 원인은 여럿이었지만, 굵직한 걸로만 따지면 도합 세 가지다.
일주일은, 그것들을 해결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는 큰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목표이니까.
안시현이 간만에 손에 쥔 대본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하면 최선의 선택지들만을 고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때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서며 일주일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JM액터스 사옥에서 다시 만난 진광욱과 드라마 작가를 보자마자, 안시현은 첫 번째 본론을 꺼냈다.
“출연하겠습니다. 대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안시현은 진광욱이 아닌 작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드라마 작가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시현이 진심으로 탐이 났다.
안시현과 함께라면 이 드라마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일찌감치 캐스팅을 요청한 진광욱 또한 같은 생각을 해서 시상식에서 공개 러브콜을 하게 된 것이다.
안시현이 캐스팅에 응한다면야 가능한 모든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주연 배우의 권한을 넘지 않는 선에서, 뭐든지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주연 두 명을 확정지은 다음, 나머지 배역만을 놓고서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