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7화>
67화. 퇴사하겠습니다
최영만.
1999년 드라마 『그대』를 통해 입봉했으며, 두 번째 작품의 편성 확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작가.
『그대』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전형적인 클리셰들을 차용한 독창성 없는 작품이라는 전문가들의 혹평 또한 받았다.
최영만 작가는 세간의 평가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 작품은 틀에 박히지 않은, 자신이 쓰고 싶은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6화까지의 대본을 완성했지만…….
방송 3사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대본은 나쁘지 않았지만, 제대로 만들기 힘들고 시청률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해 주고 거기에 연출까지 뒷받침돼야 제대로 해야 빛을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연출력이 있는 PD들은 대부분 담당 작품이 내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문제가 됐다.
기껏 미팅을 잡아도 지겹도록 퇴짜만 맞았다.
그러던 중.
『그대』에서 함께했던 진광욱이 최영만 작가의 대본에 흥미를 보였고, 투톱 자리에 어느 배우가 어울릴지를 놓고 오랜 시간 회의를 하게 됐다.
그 결과가 바로 M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진광욱이 내뱉은 폭탄 발언이었다.
어쩌면 무리수가 될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다행히 성공했다.
미팅을 가지고 일주일 만에, 안시현이 투톱 중 하나인 유성수 역을 맡아 주겠다고 한 것이다.
다른 투톱 배역인 최민 역을 제외하고 공개 오디션을 보자는 제안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최영만 작가는 안시현의 진의를 곧장 파악했다.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자?”
“그러는 편이 제작비와 편성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공개 오디션에 대한 부담 또한 한결 줄어들 테고요.”
“동의합니다. 오디션 없이 최민 역에 캐스팅 할 좋은 배우가 있다면요.”
“8월 이후 촬영에 들어간다는 가정하에, 김진모 배우가 최민 역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순간 최영만 작가와 진광욱의 두 눈이 커졌다.
『너를 부르다』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김진모의 연기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만약 최민 역을 맡아 주기만 한다면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은 삽시간에 주연 두 명을 모두 확정 짓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지금껏 보여 준 연기 스타일만 놓고 보면 안시현은 최민이, 김진모는 유성수가 어울린다는 거다. 상반된 연기 스타일을 요구하는 배역을 맡게 된다는 거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세 작품 연속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한 안시현과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김진모라면, 기존의 연기 스타일과 상반되는 배역도 제대로 소화해 줄 거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말 나온 김에 불러도 괜찮을까요?”
“그,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김진모 배우님은 최민 역 후보군에 있었는데, 차기작이 일찌감치 확정됐다는 말을 듣고서 포기했었습니다.”
“저도 혹시나 싶어서 보여 준 건데, 최소한의 휴식 기간만 보장되면 무조건 하고 싶다 하더라고요.”
“허허허. 이거 후배님 덕분에 주연 배역 캐스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렇게 김진모가 미팅에 참여하게 됐다.
결과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김진모의 경우 『너를 그리다』의 촬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찌감치 차기작을 확정지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게 될 영화에, 공개 오디션을 통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주연 배역을 따낸 것이다.
해당 영화의 촬영은 3월부터 6월까지다. 때문에 촬영을 8월 이후에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회귀 전에도 긴 휴식기 없이 다작을 소화하며 매번 좋은 연기를 보여 줬던 김진모이기에 두어 달 정도면 휴식 기간으로는 차고 넘쳤다.
이에 최영만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성을 2002년 초로 잡는 한이 있더라도 8월 이후에 촬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출연 계약서에도 구체적으로 명시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주연 배우 두 명이 낙점됐다.
이에 안시현은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진모가 수락해 줘서 다행이야. 진모랑 다른 배우들이 모두 제안을 거절했다면 막막했을 텐데 말이야.’
출연을 결정하자마자 안시현은 자신이 아는 20대 배우 중 연기력이 검증된 몇몇 이들에게 순차적으로 대본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중 첫 순서가 바로 김진모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제안이었는데, 김진모는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그 역시 안시현과 마찬가지로 좋은 대본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일단 미스 캐스팅은 해결됐고…….’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은 미스 캐스팅으로 인해 방영 전부터 논란이 제법 있었고, 방영 후에는 미스 캐스팅이 시청률 하락의 주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일단 자신과 김진모라면 최소한 주연 배우의 미스 캐스팅으로 발목이 잡힐 일은 없다고 봤다.
나머지 배역이야 공개 오디션을 진행할 예정이고, 안시현이 심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미스 캐스팅만큼은 막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럼에도 큰 문젯거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단은 MBS나 STS에서 방영을 하게 만들어야 돼. 아무리 생각해 봐도 KNC는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은 KNC에서 방영해야 하지만, 그 또한 작품의 흥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어 버리고 만다.
미스 캐스팅 또한 KNC 드라마국이 강력하게 추천한 배우들의 연기력이 기대 이하였던 게 큰 영향을 미쳤다.
거기에 제작 과정에서 PD와 최영만 작가 사이의 의견 다툼이 제법 발생했다. 최영만 작가가 생각하는 그림을 PD가 제대로 연출해 주지 못한 게 불화의 원인이 됐다.
이에 안시현은 방송사를 바꾸지 않으면 드라마가 성공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KNC 드라마국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함께한다면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귀 전의 시청률과 혹평이 그 판단을 증명했다.
“작가님, 실례지만 어느 방송사와 작업할 예정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MBS와 하게 됐습니다.”
“MBS요?”
“네. 원래는 방송 3사 모두에 다시 한번 제안을 넣을 생각이었는데, 연기대상 이후 MBS에서 먼저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해 줘서요. 안시현 배우님이 주연을 맡아 주면 최고고, 설사 거절하더라도 진광욱 배우님만으로도 제작할 가치가 있다 판단한 것 같더라고요.”
공교롭게도 진광욱의 공개 러브콜이 역사를 바꿨다.
원래는 방송 3사에서 몇 차례 거절을 당하다가 어렵사리 KNC에서 제작을 하게 됐어야 하는데, 공개 러브콜로 인해 MBS에서 관심을 보이게 됐다.
심지어 조건마저도 제법 후한 편이었다.
16부작 드라마 평균 제작비를 제법 상회하는 금액이 책정될 예정이라고 했다.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굳이 자신이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방송사가 KNC에서 MBS로 바뀌었으니까.
연출이 좋은 PD가 작품을 맡아 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안시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MBS 드라마국에서 잘 판단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아, 담당 PD님도 확정됐습니다.”
“벌써요? 엄청 빠르네요.”
“그게…… MBS에서 제게 선택권을 줬습니다. 현재 담당 작품이 없는 PD 리스트를 주더라고요.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PD님을 선택했습니다. 아, 참고로 안시현 배우님도 잘 아시는 PD님입니다.”
“혹시…….”
“네. 최창국 PD님입니다.”
그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데에서 최창국 PD의 이름이 언급됐다.
* * *
안시현과 최영만 작가의 두 번째 미팅 나흘 전.
MBS 드라마국은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을 제법 후한 조건에 제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대본은 다음 담당 작품에 대해 논의하려고 국장실을 방문했던 최창국 PD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최창국 PD는 대본을 보자마자 매료가 되고 말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대본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이 드라마를 내 손으로 연출하고 싶다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솟구쳐 올랐다.
안시현과 김진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좋은 대본임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국장님, 이 작품 담당 아직 안 정해졌죠?”
“오늘 막 제작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담당이 정해졌을 리가 없잖아.”
“혹시 제가 담당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으음…….”
MBS 드라마국 국장이 신음을 흘렸다.
최창국 PD는 능력이 있다. 연출만 놓고 따지면 MBS 드라마국 내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다.
문제는…….
“최 PD, 이건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광욱 배우가 출연하고, 거기에 안시현 배우가 주연을 맡을 가능성이 높아. 연기대상을 수상한 선배가 공개 러브콜을 보냈는데 거절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이 드라마, 노리고 있는 PD가 한둘이 아니라고. 솔직히…… 자네를 낙점하기는 힘들 거야.”
최창국 PD의 능력과 별개로,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에 눈독을 들이는 PD가 너무 많다는 데에 있었다. 최창국 PD보다 연차가 많은 다수의 PD들이 이 작품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연차에서 밀리는 최창국 PD를 낙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최악의 경우 최종 후보로 언급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능력의 문제가 아닌 사내 정치의 문제였다.
MBS 드라마국 국장의 답을 들은 최창국 PD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이해해 주니 고맙…….”
“그렇다면 퇴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국장의 뜻에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최창국 PD가 늘 정장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고서 몸을 돌렸다. 동시에 진심으로 당황한 MBS 드라마국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 사람아. 왜 이렇게 급해. 일단 앉아 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고.”
MBS 드라마국 국장은 최창국 PD를 겨우 소파에 앉히는 데에 성공했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안을 던졌다.
“최 PD.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 메인 PD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너와 나의 시간』을 성공시킨 보상, 아직 제대로 못 받았잖아?”
“원하는 거 없습니다.”
“허허허.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최대한 들어준다는 건, 도가 지나친 요구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에서 수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정말로 없습니다.”
최창국 PD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국장과 협상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을 연출하는 거 외엔 지금 당장 바라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국장님. 제가 사내 정치에서 밀려 동기와 후배들이 메인 PD가 되는 걸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조연출 생활을 버틴 이유를 아십니까? 언젠가 내게도 메인 PD가 될 기회가 올 거고, 그때가 되면 제가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연출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이 꺾인 마당에,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MBS 드라마국 국장은 어떤 식으로든 최창국 PD가 최영만 작가의 차기작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최창국 PD는 요지부동이었다.
메인 PD를 맡게 해 주든가, 아니면 퇴사하든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후우…….”
MBS 드라마국 국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 PD는 절대 놓칠 수 없어.’
『너와 나의 시간』 덕분에 최창국 PD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연출력을 제대로 인정받았다.
부족한 제작비를 책정해 줬던 MBS 드라마국 입장에서는 최창국 PD가 다른 방송사로 스카우트되는 게 아닌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JM액터스에서 최창국 PD를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들리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최창국 PD를 낙점할 수도 없었다. 국장이라고 해서 연차가 있는 PD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드라마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잘못했다가는 사내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국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전례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창국 PD를 다른 방송사나 JM액터스에 뺏기는 것보다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아니었다.
결국……
“담당 PD는 드라마국 내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현재 담당이 없는 PD 리스트를 넘기고 최영만 작가가 선택하는 걸로 하자고. 이 이상은 자네가 진짜 퇴사한다고 해도 해 줄 수 없어.”
MBS 드라마국 국장이 차선책을 제시했다. 그제야 최창국 PD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실력으로만 평가받는다면, 제가 선택받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 * *
미스 캐스팅이었던 주연 배역이 각각 안시현과 김진모로 확정이 됐고, 궁합이 맞지 않았던 제작 방송사는 진광욱의 공개 러브콜로 인해 KNC에서 MBS로 바뀌었으며, 연출력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최창국 PD가 담당 PD로 배정됐다.
‘일단…… 반 이상은 성공한 거라고 봐도 돼.’
주연 배우 문제, 방송사 문제, 연출 문제 등.
일단 굵직굵직한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 불치병이 잔병치레 수준까지 격하됐다.
안시현이 직접적으로 해결한 건 김진모에게 최민 역을 제안한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상황이 매우 좋아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없는 작품은 드물다. 당장 『너와 나의 시간』만 하더라도 제작비 부족과 MBS 드라마국의 무관심으로 인해 꽤나 고생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그 문제들이 시청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다. 시청률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자잘한 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청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부정적 요소 세 가지가 모두 사라진 상황.
그제야 안시현이 근심을 내려놓았다.
‘아. 이제 다시 푹 쉴 수 있겠다.’
두 번째 미팅 다음 날.
JM액터스는 보도 자료를 통해 안시현과 김진모가 진광욱의 러브콜에 응해 최영만 작가가 집필한 16부작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할 것임을 알렸다.
-진광욱과 안시현의 만남 성사!
-진광욱은 주연 아닌 조연, 투톱 안시현과 김진모 뒷받침한다.
-진광욱, ‘무리한 부탁 들어준 안시현 후배님에게 감사, 좋은 작품 만들고 싶어’.
-진광욱과 안시현의 차기작, 『그대』의 최영만 작가가 집필.
-최창국 PD, 『너와 나의 시간』에 이어 다시 한 번 안시현과 호흡 맞춘다.
-MBS, 최영만 작가 차기작 완성도 위해 제작비 추가 투입 결단!
이에 언론들은 일제히 기사를 쏟아 냈다.
MBS 연기대상 이후 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진광욱의 공개 러브콜은 그렇게 최선의 결과를 낳으며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