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8화>
68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갑작스러운 진광욱의 공개 러브콜로 인해 안시현이 열흘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이, JM액터스는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너를 부르다』의 시청률 40% 돌파로 인해 JM액터스는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자체 제작할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이에 김진석 대표는 회사의 규모를 더 키우기로 결심했다. 연말부터 매니저와 홍보팀을 포함한 직원들의 추가 채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또한 신년이 되자마자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거나 소속사가 없는 다수의 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나아가 드라마 작가 및 영화감독의 영입까지도 시도했다.
JM액터스가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생산,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김진석 대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였으니까.
그 결과.
김진석 대표의 호출로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한 안시현은, 우정태와 한나래에 김희숙 작가까지 JM액터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오후에 보도 자료 배포될 거다. 세 사람 다 너와 함께 작품을 했던 사이니만큼 네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어서 부른 거란다.”
“정태 선배랑 나래는 그렇다 쳐도, 김 작가님까지 계약한 건 의외네요.”
“안정적인 환경에서 집필을 하고 싶어 하셔서, 모든 조건을 최대한 맞춰 주기로 했거든. 일단 근처 오피스텔을 1년 정도 작업실로 쓰고, 내년에 더 좋은 작업 환경을 찾아 주려고. 아, 단막극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것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이야. 듣고 보니 작가님이 계약하실 만 하네요.”
김진석 대표의 말을 들은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중요시한다고 인터뷰를 통해 여러 번 밝혔을 정도로, 김희숙 작가는 작업 환경에 유독 예민한 스타일이다.
작업실을 비롯한 안정적인 작업 환경 제공은 김희숙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제안이었다.
“정태 선배랑 나래는 어떻던가요?”
“우정태 씨는『너와 나의 시간』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연기력이 제법 안정되어 있더구나. 그전까지 데뷔 기회를 잡지 못한 건…… 운이 없었거나 눈높이를 너무 높게 잡아서겠지.”
“정태 선배가 운이 좀 없는 편이기는 했죠.”
“주연까지는 힘들겠지만, 인지도 있는 조연 배우로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게 정태 선배의 꿈이에요.”
모두 배우가 주연 배우로 성장할 수는 없다.
주연 배우가 있다면 조연 배우, 나아가서는 단역 배우 또한 존재하는 법이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주연은 극소수의 배우들에게만 주어지는 자리다.
인지도 있는 조연 배우로 성장할 거라는 건 우정태에 대한 칭찬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이제 갓 데뷔한 배우의 잠재력을 그만큼 높이 사고 있다는 뜻이니까.
“한나래 씨는…… 사정이 좀 안타깝긴 하더구나.”
“나래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회사가 문제지. 너무 가난하더라고. 모델이 배우로 갓 데뷔하는데 초짜 연기 선생을 붙여 주고, 데뷔 직전에는 연습실 대실료가 밀려 가지고 회사에서 연습했다던데 참…….”
“그 정도면 꽤 심각한데요?”
“문제는 한나래 씨가 자신을 데뷔시켜 준 사장과 끝까지 가고 싶다고 한 거지. 그래서 그냥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기로 해버렸지. 다행히 채무가 그리 많지 않아서, 월급을 일부 차감해나가는 식으로 갚기로 했고. 운영은 못 하는데 안목은 괜찮은 거 같아 실장 직함 달고 캐스팅 전담할 거란다.”
“결과적으로 잘됐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안시현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회귀 전의 한나래에 대해 관심 자체가 크지 않았다 보니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데뷔 이후 줄곧 한 소속사와 함께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으음. 그러고 보니 연기대상을 수상한 여배우의 소속사가 너무 가난해서, 빚 갚아 주려고 무리하게 스케줄을 소화한다는 이야기가 잠시 돈 적이 있었지. 그게 나래 소속사였나 보네.’
결과적으로 한나래만 영입한 게 아닌 소속사를 통째로 인수한 건 모두에게 좋은 선택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진석 대표는 안목이 괜찮은 실장급 인사 한 명을 얻었고, 한나래는 보다 확실한 지원 아래 연기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됐으며, 한나래의 소속사 대표는 운영에 대한 부담을 덜며 빚을 갚을 기회 또한 잡게 됐으니까.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한나래 씨가 진모랑 사귀는 거랑 이번 영입은 연관이 없어. 철저하게 미래 가치만 놓고서 판단한 거거든.”
“공과 사는 철저해야 하잖아요.”
“물론이지. 난 한나래 씨가 캐스팅하려고 줄을 서는 연기파 여배우로 성장할 거라고 본다. 아마 제대로 된 악역 한 번 맡으면 확 뜰 수 있을 거야.”
김진석 대표가 한나래 개인이 아닌 소속사 자체를 인수한 건 그게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나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나래로부터 장차 연기파 여배우로 성장할 것이라는 잠재력을 엿보았다.
게다가 한나래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넘치는 스타일의 배우이기도 했다.
차기작으로 경쟁률이 제법 심할 것으로 예상이 되는 공포 영화의 주연 배역을 노리고 공개 오디션을 준비할 거라는 것만 보더라도, 방향성만 제대로 잡아 주면 오래 걸리지 않아 주연급 배우로 성장할 것 같았다.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의 생각에 동의했다.
회귀 전 연기대상을 수상했던 배우이니만큼 JM액터스의 든든한 지원 아래에서 보다 빠른 성장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안시현은 한나래가 연습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하고 갈까 하다가 문을 열지 않았다.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이 한창 메소드 연기에 심취해 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저렇게 집중할 때는 방해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컨디션 관리야 알아서 잘하겠지. 대표님이 그런 건 그냥 지켜보실 분도 아니시고, 남자친구 놈도 자기관리가 철저하니까 알아서 조언해 주지 않겠어? 그럼 난…… 김 작가님한테 연락 한번 해 볼까?’
그보다는 김진석 대표로부터 들은 김희숙 작가의 최신 소식에 더욱 관심이 갔다.
‘김 작가님이…… 회귀 전에 단막극을 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일 같단 말이지.’
회귀 전 김희숙 작가는『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이 무산된 이후, 2002년이 돼서야 입봉할 수 있었다.
물론 입봉 이후에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했다. 결국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원고료를 받는 드라마 작가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 과정에서 단막극은 없었다.
김희숙 작가 정도 되는 거물이 단막극을 집필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단막극을 집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다시 말해 단막극 집필은 회귀 후 안시현과 만나고 『너와 나의 시간』이 성공하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희숙 작가가 집필한다는 단막극은 어떤 내용일까?
안시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안부를 묻는 척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슬쩍 단막극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후.
김희숙 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JM액터스 사옥 갔어요?”
“네. 볼일 끝내고 주차장 가려던 참이에요.”
-그럼 작업실 한번 놀러 와요. 안 그래도 『너와 나의 시간』 가족들한테 연락 돌리려던 참이었거든요. 나래 씨랑 정태 씨는 그저께 들러서 이사랑 작업실 정리 도와주고 갔어요. 오면 단막극 대본 보여 줄게요.
“세상에. 벌써 다 집필하셨어요?”
-2화까지는요. 『너와 나의 시간』 대본 퇴고하면서 짬짬이 작업하다 보니……. 올 거예요?
“작업실 입주 기념 선물 사서 갈게요.”
-식사 안 했으면 요깃거리 좀 사서 와줄래요? 전 그사이에 사람으로 되돌아갈게요. 집필할 때는 몰골이 사람 수준을 벗어나서…….
“문자로 주소 찍어 주세요. 1시간 후에 갈 테니.”
김희숙 작가의 단막극 대본을 볼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 *
1시간 후.
안시현이 김밥, 떡볶이, 튀김, 순대 등의 분식을 한가득 사서 김희숙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어서 와요.”
작업실 내부는 깔끔했다. 컴퓨터와 좌식 책상, 한 곳에 잔뜩 쌓인 원고지와 A4용지와 필기구 등 대본 집필에 필요한 것들만이 비치되어 있었다.
“보조 작가는 아직 없나 봐요?”
“아, 『너와 나의 시간』을 집필할 때 함께했던 보조 작가는 MBS에서 섭외해 주신 분들인데, 저랑 성향이 잘 맞는 편은 아니라서 다시 구인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튀김 냄새 미쳤는데요?”
“장담하는데, 맛도 미쳤을 거예요.”
안시현은 김희숙이 분식을 먹고서 실망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찾았던, 맛도 기가 막히고 양도 푸짐한 단골 분식집에서 사 온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반응은 안시현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김희숙 작가는 분식을 먹으면서 몇 차례나 감탄을 했고, 제법 넉넉한 양을 사 왔음에도 떡볶이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아, 제가 먹어 본 분식 중 최고였어요. 이 집 어디예요? 분식 당길 때 가서 사 먹게요.”
“문자로 주소 찍어 드릴게요. 대학로 골목 안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에요.”
식사 후.
후식으로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김희숙 작가가 안시현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타이틀은 『스무 번』이었다.
안시현이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역시나 회귀 전 김희숙 작가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임이 맞았다.
“읽어 봐도 될까요?”
“편하게 봐요. 그러라고 준 거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안시현이 차분하게 대본을 읽어 나갔다.
약 10분 뒤, 대본을 손에서 내려놓은 안시현이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대본을 보자마자 『너와 나의 시간』과의 차이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변화를 시도하신 건가?’
김희숙 작가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고증이나 개연성보다는 철저하게 재미 위주의 대본을 쓴다는 데에 있었다.
철저한 재미 추구는 그녀를 대한민국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드라마 작가로 성장시켜 줬다. 대중들이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불호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막극이라 그런가? 김희숙 작가님 스타일이긴 한데 주제 의식 또한 확실해.’
단막극 『스무 번』의 대본은 조금 달랐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분명 잘 쓴 대본이고, 김희숙 작가 특유의 스타일은 여전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제 의식이었다.
『스무 번』은 철저하게 재미 위주로만 집필했다면 절대 포함되지 않았을 주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안시현은 이 대본에 호기심이 생겼다.
김희숙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스타일에 변화를 줬는지 알고 싶었다.
“이 대본, 『너와 나의 시간』과는 분위기가 약간 다르네요. 주제가 확실한데요? 의도한 건가요?”
“네. 이런 스타일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장편으로는 힘들겠지만, 단막극으로 시도해 보면 차기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괜찮았어요?”
“좋은 대본이네요. 제가 연기하고 싶을 정도로요.”
“시현 씨가 해 주면 저야 좋죠. MBS에서 제작하기로 한 거 말고는 캐스팅 라인도 확정되지 않았는걸요. 물론 스케줄 때문에 힘들겠지만요.”
“말 나온 김에 해 볼까요? 저 캐스팅 좀 해 주세요.”
안시현의 태연한 대답에 오히려 제안을 한 김희숙 작가가 당황했다. 반쯤 농담 삼아 해 본 말인데 진짜로 하겠다고 들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진짜로 하려고요? 근데 시현 씨, 진광욱 배우님과 차기작 같이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 그 작품은 촬영이 9월부터 시작이라 문제없어요. 게다가 제가 원하는 배역은 이거인걸요.”
안시현은 대본을 펼쳐서 자신이 원하는 배역이 무엇인지를 김희숙 작가에게 알렸다. 이는 김희숙 작가를 다시 한번 당황시켰다.
“진짜 그 배역을 원한다고요?”
“네. 아, 혹시 제가 주연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주연은 아니더라도 비중 있는 배역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저 여러 번 당황시키네요. 진짜 시현 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김희숙 작가가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안시현이 원하는 배역은 주연도 조연도 아닌, 대사 몇 마디가 전부인 단역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