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9화>
69화. 이러다 진짜
안시현이 원하는 배역은 비중이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다.
주인공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니까.
짧은 등장이지만 임팩트는 강렬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변화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차기작에서 연기하게 될 유성수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될 배역이라고 봤다.
단역 출연은 이슈를 만들어 김희숙 작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지만, 이왕이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배역을 원하는 게 당연했다.
“대본 집필 끝내고 캐스팅 라인 확정하고 촬영 들어가려면, 빨라야 여름이겠죠?”
“MBS 드라마국에서는 7월 촬영을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편성은 11월에나 될 것 같았고요.”
“7월이면 딱 좋네요. 저 좀 단역으로 써 주세요, 작가님.”
“……연기대상 3관왕이 단역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말하면,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요?”
“작가님이 미친 게 아니냐고 하겠죠.”
“역시 그렇겠죠? 저야 시현 씨가 출연해 주면 단역이라도 대환영이죠. 아, 혹시 시현 씨 캐스팅된 걸로 단막극 홍보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다음 날.
JM액터스는 보도 자료를 통해 안시현이 김희숙 작가의 단막극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됐으며, 출연료를 전액 기부할 것임을 알렸다.
주연이 아닌 단역이기에 김희숙 작가와의 의리로 출연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팬들은 연달아 출연 소식을 알린 안시현의 행보에 반가워하면서도, 동시에 아쉬움 또한 느꼈다.
단막극 『스무 번』의 촬영은 6, 7월 사이에 진행해서 연말인 11월에 방영할 예정이며, 차기작은 9월이 돼서야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제 겨우 연초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연기를 다시 볼 수 있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시현이 주기적으로 팬클럽 카페를 통해 근황을 전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1월 말.
안시현은 [푹 쉬다 오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고향에서 한 달가량 머물다 올 것임을 알렸다.
* * *
이번에도 이전에 연기했던 배역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배역을 연기하게 된 만큼, 최선의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다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준비가 아닌 휴식이었다.
안시현은 지금의 휴식이 단막극과 차기작에서 보여 줄 연기에 밑거름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시동은 5월부터 천천히 걸어도 돼. 이왕 쉬는 거, 한 달 정도 고향에 내려갔다 올까?’
안시현은 이왕 쉬는 거 고향에 내려가 한 달 정도 머물다 오기로 결정했다. 간만에 부모님 일도 도와 드리고, 여유롭게 바다낚시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결정된 고향행에는 박정상과 최봉팔, 거기에 김진모까지 동행하게 됐다.
세 사람은 며칠 동안 실컷 놀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다.
‘가능하면 겨울은 고향에서 보내자.’
다시 촬영에 들어가면 한동안 고향에 내려오기 힘들 거다. 김진모만큼은 아니지만, 안시현 또한 촬영을 시작하면 연기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니까.
기껏해야 안부 전화를 꾸준히 드리는 게 전부일 거다.
단막극에서의 단역과 16부작 드라마의 주연을 맡기 전, 간만에 아들 노릇 좀 제대로 하고 싶었다.
“아이고. 아들 왔어? 진모도 왔네? 뒤에 두 분은 우리 아들 매니저죠?”
“며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어머님.”
“신세는 무슨 신세예요. 방은 남고, 식사는 수저 몇 개만 더 놓으면 되는걸요? 다들 식사 안 했죠? 여럿이서 온다 해서 고기 준비해 놨는데.”
“엄마, 숯 창고에 있죠? 제가 준비할게요.”
“됐어, 됐어. 엄마가 구워 줄 테니까 아들은 손님들이랑 같이 맛있게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버지는요?”
“네가 손님 데려온다고 해서 막걸리 받으러 갔어.”
“크으…… 막걸리 좋죠. 역시 어머님밖에 없다니까!”
매 끼니 밥상 위를 한가득 채운 진수성찬은 최고였고, 바다낚시를 나가 즉석에서 떠 먹는 회는 진미였다.
5일 장 때문에 읍내에 나갔다가 때아닌 즉석 사인회가 열리기도 했다.
나흘이 삽시간에 흘러갔다.
박정상과 최봉팔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된 김진모는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 일주일만 더 있다 가고 싶다.”
“더 쉬다 가. 네가 일손도 잘 거들어 주고, 워낙 싹싹하게 굴어서 부모님도 좋아하실걸?”
“마음 같아서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음 주부터 대본 리딩이라서 안 돼.”
“벌써? 빨리 시작하네?”
“강 감독님이 작정하고 준비하시는 작품이라 그래. 마음에 드는 장면이 안 나오면 추가 촬영도 불사하겠다고 하셔서, 다들 스케줄 넉넉하게 잡았잖아.”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모의 차기작은 200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촬영하고, 2002년에 겨울에 추가 촬영을 거친 뒤, 긴 편집 기간을 거쳐 2003년 말에야 개봉하게 된다. 그만큼 감독이 해당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최대한 퀄리티를 높이고 싶어 했다.
그 노력은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두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보답 받는다.
여하튼 김진모는 대본 리딩 때문에, 박정상과 최봉팔은 휴가가 끝나서 서울로 올라가게 된다.
세 사람이 돌아간 뒤, 안시현은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거나 읍내에서 사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철저하게 휴식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연예계에 어떤 일이 있는지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됐다.
오죽하면 『너와 나의 시간』이 1월의 마지막 주에 일본에서 첫 방영을 한다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였다.
* * *
안시현이 『너와 나의 시간』의 일본 방영에 대해 떠올린 건, 2월의 마지막 주가 되어서였다.
잘 지내고 있냐는 지인들의 연락을 받으며 슬슬 서울로 올라갈 때가 됐나 고민하던 차에, 박정상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가 계기였다.
박정상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형,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 당연히 있지! 『너와 나의 시간』이 시청률 50% 넘었을 때만큼이나 좋은 일이야!
“무슨 일인데요. 뜸 뜰이지 말고 말해 주세요.”
-나도 출근해서 들은 건데 말이야…….
박정상의 말을 들은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너무 놀라서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확실히 박정상이 잔뜩 들뜰 만한 충격적인 정보였다.
“형, 제가 요즘 귀가 좀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너와 나의 시간』…… NHK에서 1화부터 다시 방영하기로 했다고! 위성 방송에서 방영하다가, 방영 요청이 쇄도해서 정규 편성 확정됐다고!
“…… 오 마이 갓.”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2월의 마지막 날.
안시현은 예정보다 조금 빨리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장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미리 연락한 덕에 스케줄을 잡아 놓지 않은 김진석 대표와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휴가는 잘 보내고 왔어?”
“어제까지는 잘 보냈죠.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더니 더 이상 쉴 수가 없더라고요. 어제 정상 형한테 들은 소식, 저 놀리려고 거짓말한 거 아니죠?”
“허허허…… 이거 보렴.”
김진석 대표가 안시현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2면에 전날 들은 소식과 관련된 기사가 떡하니 실려 있었다.
-『너와 나의 시간』, 3월 초 NHK에서 재방영 확정!
농담이 아니었다.
『너와 나의 시간』은 정말로 NHK에서 다시 재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JM액터스가 돌린 보도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까지 난 이상, 확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이거 말고도 기사 더 떴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라 제법 화제가 되고 있어. 뭐, 그래 봐야 시청률 안 나오면 바로 사라질 관심이지만.”
“NHK에서의 방영은 어떻게 결정된 거예요?”
“운이 좋던 건지, 아니면 취향저격을 제대로 했던 건지는 애매하지만…… 『너와 나의 시간』이 일본 주부들 사이에서 꽤나 입소문을 탔나 보더라고. 처음에는 낮 시간 재방송 요청이 쏟아지다가, 지속적인 요청으로 인해 NHK에서 재방송을 하게 된 거야. NHK 측에서는 워낙 주부들의 반응이 뜨거워서,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더라고.”
그랬다.
『너와 나의 시간』이 NHK에서 재방송을 하게 된 건, 일본 주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다가 지속적인 재방영 요청이 이어진 덕분이었다.
차연우가 주연을 맡게 될『눈의 노래』가 일본에서 역대급 흥행 돌풍을 일으킨 것과 패턴이 비슷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눈의 노래』가 당시 일본에서 보기 힘든 스타일의 로맨스 드라마였고, 이것이 일본 주부들의 마음을 제대로 취향저격하며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일본에서 가장 흥행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반면 『너와 나의 시간』은 로맨스와 재벌물이 적절하게 혼합된 스타일의 드라마다. 『눈의 노래』만큼 일본 주부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기는 힘들 거라는 게 안시현의 견해였다.
“시청률은 기대 안 해야겠네요.
“혹시 알아? 10% 넘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강제로 일본 진출하는 거죠.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요. 지금 일본 드라마는 사극이 너무 강세라서, 로맨스는 힘들지 않겠어요?”
말은 시청률에 대해 전혀 기대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안시현 또한 내심 시청률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왕 위성방송을 넘어 NHK에서 방영하게 됐으니, 대박은 아니더라도 평균치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길 바라는 게 당연했다.
* * *
시간이 흘러 3월 말.
안시현은 최영만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자, 자신의 차기작인 『빌딩 숲』의 오디션 심사에 주연 배우 자격으로 참여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552명의 배우가 오디션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많네요. 주연을 빼놓고 오디션을 보는 거라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봤는데요.”
“투톱이 시현 씨와 진모 씨인데다, 진광욱 씨까지 출연하지 않습니까.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합니다. 아. 게다가 저희에겐 연출의 신도 함께 하고요.”
최창국 PD가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너와 나의 시간』을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았음에도, 그는 아직까지 칭찬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면전에서 들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너무 띄워 주시면 부담스러운데요.”
“최 PD님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제가 『너와 나의 시간』의 연출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네. 아마 스무 번은 넘게 들었을 겁니다.”
공개 오디션을 앞두고 분위기는 훈훈했다.
안시현과 최영만 작가와 최창국 PD는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해 주길 바라며 오디션의 시작을 기다렸다.
‘뭐, 내가 할 건 딱히 없겠지만 말이야.’
사실 말이 심사위원이지 안시현은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예정이다. 진광욱과 김진모가 오디션 심사를 거절한 상황에서, 배우를 대표해서 자리를 채운 정도라고 보는 게 맞았다.
오디션에 참여한 배우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김진석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걸 확인한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한테 전화가 왔네요. 잠시만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천천히 받고 오세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회의실 밖으로 나온 안시현이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보기 드물게 흥분한 듯한 김진석 대표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시현아, 아무래도 사고 제대로 친 거 같다.
“사고요? 무슨 일 있으세요?”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너와 나의 시간』 8화의 시청률이 6.2% 나왔어.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NHK에서 방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지금 이 소식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 정말요? 진짜 6.2% 나왔어요?”
-그래. 무릎베개 키스신을 본 일본 주부들이 열광하면서 입소문이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더라. 허허허. 세상에 이런 경사가…….
대한민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무릎베개 키스신에 대한 반응이 제법 컸다.
다만 반응이 온 시청자층은 달랐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20대와 30대 미혼 여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반면, 일본에서는 30대와 40대 기혼 여성들이 관심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뭐, 시청자층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6.2%의 시청률이 중요하지.
“대표님, 이러다 진짜…… 시청률 10% 진짜 넘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너와 나의 시간』에 대한 일본에서의 반응이, 안시현과 김진석 대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 동안 시청률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안시현마저도 기대감을 드러낼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