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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70화 (7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0화>

70화. 내가 뭘 어쨌다고

『너와 나의 시간』이 8화에서 기록한 6.2%의 시청률은 낮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의 드라마 트렌드와 『너와 나의 시간』이전에 한국산 드라마들이 일본에서 기록한 성적을 감안하면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었다.

또한 NHK의 경우 방송사의 규모에 비해, 드라마는 아침드라마와 대하드라마만 시청률이 높은 경향이 강한 방송사다.

다른 장르의 드라마가, 그것도 오후 11시 10분에 방송해서 힘을 쓰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것을 『너와 나의 시간』이 해낸 것이다.

게다가 주 시청자층은 30대와 40대 주부들이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도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있다.

무엇보다 8화에서 6.2%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건, 남은 16화 동안 입소문을 타고 시청률이 상승할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너와 나의 시간』은 8화 이후의 입소문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상승세를 기록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쯤 되자 안시현의 생각도 달라졌다.

‘진짜로 10% 넘을지도 모르겠는데?’

NHK에 정규 편성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자 기대감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만 『눈의 노래』처럼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6.2%를 기록한 것도 대단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10%를 넘길 기대하는 정도였다.

그것마저도 엄청난 목표치라고 생각했다.

‘이러다 일본에 강제 진출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뭐…… 한류의 흐름이 빨라지면 좋은 거 아니겠어? 『눈의 노래』의 대성공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이 얻었던 반사 이익이 조금 앞당겨지는 정도라고 보면 되겠지. 물론 규모는 그때처럼 크지 않겠지만.’

놀랐고 기대감을 품게 된 건 사실이지만, 안시현의 반응은 딱 그 정도 선에서 그쳤다. 과하게 흥분하거나 지나친 설레발을 치지는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일본 흥행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쪽은 안시현의 능력으로 결과를 바꿀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혹여나 NHK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온다면 응해 주는 것 정도가 전부이리라.

지금 중요한 건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이다.

확정된 배역은 도합 셋.

안시현과 김진모가 맡게 될 주연 유성수와 최민, 진광욱이 맡게 될 조연 안필석이 전부다. 그 외 모든 배역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어울리는 배우를 발굴해야 한다.

공개 오디션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철저하게 해당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는지만을 놓고 판단하기로 했다.

『너와 나의 시간』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   *

공개 오디션 심사에서 캐스팅 권한은 전적으로 최영만 작가와 최창국 PD에게 존재한다. 안시현의 역할은, 두 사람이 특정 배우 대해 질문하면 대답을 해 주는 것 정도에서 그칠 예정이었다.

‘내 역할은 조언 정도가 전부야. 선 넘지 말고 역할에만 충실하자.’

안시현이 심사위원으로서 참가한 건 심사를 위해서가 아닌, 어떤 배우가 어떤 배역에 캐스팅될지 미리 확인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안시현은 뜻밖의 배우와 마주치고서 적잖게 놀랐다.

‘저 양반도 오디션에 참여하는 거야? 의외네. 드라마에서 쓴맛을 봐서 영화로 다시 눈길을 돌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야.’

바로 류성웅이었다.

딱히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었음에도 안시현은 고개를 숙였다. 오디션을 앞두고 성격 나쁜 류성웅과 괜히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아…… 오랜만이야, 후배님. 잘 지냈어? 살 좀 쪘네? 보기 좋다. 리수철 연기할 때는 너무 말라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싶었었거든. 아, 참. 주연 축하해. 연기대상 3관왕도 축하하고. 대상은 좀 아쉽더라. 진광욱 선배님이 워낙 막강해서…….

간만에 만난 류성웅은…… 안시현이 기억하는 것과 이미지가 180도 달랐다.

*   *   *

오전 11시 정각.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이 시작됐다.

준비해 온 지정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보면서도 안시현은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디션 직전 만났던 류성웅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왜 갑자기 순한 맛이 된 거지? 다른 참가자들을 의식해서? 아니야. 그런 것치고는 분위기 자체가 아예 달랐어. 진짜로 착해진 것 같았다고.’

지난 해 대한영화제 이후 간만에 만난 류성웅은 분명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이 착해져 있었다.

이전처럼 타인 앞에서는 철저하게 착한 척 이미지 메이킹을 하며, 만만한 사람 앞에서는 본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도 싶었지만…….

‘아냐. 만약 그게 연기라면 당장이라도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아도 될 거야.’

몇 번을 생각해봐도 연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이전에는 류성웅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에겐 착한 척 연기를 하는 게 티가 났지만, 이번에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혹시 『사랑하고 싶어』를 촬영하는 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워낙 쫄딱 망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것보다……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궁금하네. 아까 보니까 계속 대사 읊조리고 있던데.’

못 본 사이 분위기가 변한 류성웅이 낯설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안시현은 류성웅의 연기가 기대됐다.

인성에 문제가 없다는 가정하에 류성웅은 분명 좋은 배우다. 게다가 인성 문제 또한 1000만 배우가 된 이후부터 드러나는 거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만만한 후배들에게 간혹 시비를 거는 정도가 전부다.

류성웅이 어떤 배역을 원하느냐에 따라 『빌딩 숲』의 캐스팅 라인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오디션을 시작하고 몇 시간 뒤.

“55번 참가자, 인사드립니다.”

마침내 류성웅이 오디션장에 들어왔다.

프로필을 살펴본 최창욱 PD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류성웅에게 물었다.

“어떤 배역을 준비해 왔습니까?”

“하진욱 역의 두 번째 신을 준비해 왔습니다.”

류성웅이 준비해 온 하진욱은 주연 배역인 유성수와 최민, 그리고 진광욱이 맡기로 한 안필석 다음으로 비중 있는 배역이다.

“준비되면 바로 시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류성웅이 곧장 준비해 온 지정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차장님.”

첫 마디부터 류성웅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몰입 제대로 했는데? 『나는 간첩입니다』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안시현은 류성웅의 대사를 듣자마자 감탄을 했다.

이전보다 배역에 몰입하는 시간도 빨라졌고, 감정 이입 또한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못 보는 사이 연기가 발전한 게 눈에 띄었다.

“그 기획안, 유성수 씨가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먹고 자며 준비한 겁니다. 그걸 김 과정님이 가져갔다고요. 실적? 승진? 좋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직원 전환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회 초년생의 꿈을, 이렇게 짓밟아서야 되겠냐고요!”

류성웅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가 아니었다. 상사의 부조리에 항의하는,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사회 초년생이 겪지 않길 바라며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이는 직장인이었다.

완벽하게 몰입했고, 맛깔나게 표현해 냈다.

최영만 작가와 최창국 PD, 거기에 안시현까지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아니라고요. 차장님이 나서지 않겠다면, 제가 직접 사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대사를 거듭할수록 류성웅의 연기는 점점 빛이 났다.

류성웅보다 먼저 연기를 선보인 54명의 배우 중 하진욱 역을 원한 이는 여럿 있었지만, 그중 류성웅이 가장 눈에 띄는 게 사실이었다.

안시현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분명 『사랑하고 싶어』막바지에 연기력이 무너진 걸 확인했는데, 몇 달 사이 훨씬 더 좋아졌어.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랑하고 싶어』 방영 막바지에, 그나마 1인분을 하던 류성웅마저 혹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혹평을 받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연기에 대해 전문 지식이 없는 대중들이 보기에는 류성웅의 연기력은 이상하리만큼 무너졌으니까.

『사랑하고 싶어』에 일절 관심이 없던 안시현이었지만, 류성웅의 연기력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호기심이 생겨 해당 회차만 모니터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처참한 연기력을 보고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시 류성웅은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치지 못했다. 연기 초보를 몇 달간 가르치고 연기를 시켜도 류성웅보다는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악의 모습을 보여 줬다.

제작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잡음들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지만, 본인이 말을 하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실망스러운 연기를 보여 줬던 배우가, 고작 몇 달 만에 연기력이 눈에 띄게 발전한 채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진짜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밑바닥을 찍고 나니까 연기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뭐 그런 거야?’

지정연기가 끝난 뒤.

최영만 작가가 류성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진욱 배역 오디션에 참가한 계기가 있습니까?”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요?”

“지난 작품에서 많은 문제들을 겪으며 제 연기 인생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오만하게, 건방진 생각으로 연기를 해 왔는지 깨닫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제 연기 인생을 돌아보게 해 준 안시현 배우님과 함께 연기를 하고 싶어서,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순간.

오디션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안시현 한 명에게로 집중됐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정작 안시현은 류성웅이 어째서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나는 간첩입니다』 이후의 접점이라고는 대한영화제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게 전부인데, 언제 어디서 영향을 받았단 말인가.

인터뷰까지 끝마친 류성웅이 퇴장하자마자 최영만 작가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보기에는 어땠습니까?”

“전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막바지에 심각하게 연기력이 무너졌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발전했더군요. 더 좋은 배우가 한지욱 역에 지원하지 않는 한, 일단 낙점하고 간다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과 같네요. 안 배우님은 어땠습니까?”

안시현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류성웅이 보여 준 모습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보였다. 오로지 그가 지정 연기를 통해서 보여 준 연기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고민 끝에 안시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지 않는 한, 하진욱 역은 류성웅을 낙점하는 걸로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다.

그만큼 류성웅이 보여 준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   *   *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은 꼬박 일주일이 진행된 끝에야 마무리가 됐다.

캐스팅 라인과 관련된 논의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진행될 예정이었다. 최영만 작가와 최창국 PD가 합의점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진욱 배역만 제외하고 말이다.

하진욱 배역을 노린 수많은 배우들 중 류성웅보다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는 없었다. 합의점을 찾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렇게 다른 배역과 달리, 하진욱 배역만큼은 공개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확정이 나게 됐다.

‘확실히…… 연기는 잘한다니까. 『사랑하고 싶어』 막바지에 연기력이 확 무너진 게 이해가 안 될 정도야.’

류성웅은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배우가 아니다. 인성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1000만 배우가 되기 전에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문제 아니던가.

심지어 그 인성마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여 줬다.

설사 그 모습이 연기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인성이 안 좋다는 이유 하나로 거르기에는 류성웅의 연기가 너무 아까웠다. 하진욱 역에 지원한 배우들 중 류성웅의 절반 수준의 연기조차 보여 준 배우가 없었을 정도이니 말 다 한 거였다.

‘진짜 개과천선을 한 거라면 좋겠네. 그럼 1000만 배우로 성장한 이후에 그렇게 허무하리만큼 자취를 감추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안시현은 류성웅이 공개 오디션 당시 보여 준 태도가 연기가 아닌 진심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2000년 M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각각 연기대상과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한 배우 세 명과 훗날 1000만 관객을 두 번이나 동원하게 될 배우가 한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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