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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72화 (7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2화>

72화. 잘 만들어 봐요

안시현이 류성웅과 약속을 잡은 건 , 『스무 번』의 촬영을 끝낸 직후의 일이었다. 대뜸 류성웅의 소속사를 통해 안시현에게 직접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혹시 불편하면 통화로 본론만 이야기하겠는 뜻을 전해 왔다.

안시현은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사랑하고 싶어』의 종영 이후 류성웅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워낙 간곡하게 부탁해서 거절하기가 난감했던 것이다.

뭐, 정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혹시나 싶어 김진모에게 류성웅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가 있냐고 물어보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이 돌아왔다.

“허 참. 너한테도 연락 왔어? 나한테도 지난주에 연락 왔는데, 얼굴 보는 건 좀 그래서 전화로 용건만 말하라고 했더니 대뜸 사과하더라.”

“사과? 무슨 사과를 했는데?”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할 때 못살게 군 거 미안하더라. 이 양반이 미쳤나 싶어 그냥 적당히 대답하다가 끊었지 뭐. 사과를 하던 무릎을 꿇던, 그냥 상종하고 싶지를 않아서 말이야.”

류성웅이 김진모에게 연락을 한 건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정황상 아마 안시현에게도 비슷한 이유로 연락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과라니…… 진짜 개과천선한 건가? 이 시기엔 딱히 인성 문제가 대두되지 않아 이미지 세탁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 당시 보여 준 모습도 그렇고, 대뜸 사과를 하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진짜 사람이 달라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다.

판단은 류성웅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 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안시현이 류성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안시현은 류성웅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류성웅은 안시현의 눈치를 살피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용기를 낸 류성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안시현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면서 내가 보였던 언행들, 진심으로 사과할게. 분명 감정이 상했을 거야.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이미 상한 감정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진모에게도 전화로 사과했다던데, 혹시 저희 말고 다른 배우들에게도 사과한 거예요?”

“응. 직접 만나 준 건 후배님 외에 한 명뿐이었지만. 뭐…… 마주칠 때마다 사과하다 보면 언젠가 다들 진심을 알아주시지 않겠어?”

류성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안시현은 그 모습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빌딩 숲』 공개 오디션 당시 류성웅이 보여 줬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선배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요. 대한영화제 때만 하더라도 저 도발했잖아요.”

“그사이 좀 많은 일이 있었어. 괜찮다면 들어 줄 수 있을까?”

“…… 그래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사랑하고 싶어』의 방영 초반만 하더라도 류성웅은 자신감이 넘쳤다.

주연 배우와 PD 사이에 갈등이 있긴 했지만 심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은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더 좋은 연기력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출에 문제가 생기고, 주연 배우와 PD 사이의 갈등이 커지고, 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며 촬영장 분위기가 뒤숭숭해졌으며, 급기야 시청률까지 수직하강하기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다.

류성웅의 마음속에서 확신이 사라진 것이다.

좋은 연기도 시청률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빛이 나는 법이다. 시청자들이 외면한 가운데 좋은 연기를 보여 줘 봐야 알아주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랑하고 싶어』를 선택한 게 필모그래피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을까? 오히려 앞으로의 연기 인생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부정적인 생각들은 연기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그나마 좋은 연기를 선보이던 류성웅마저도 드라마 후반부에 무너지면서 혹평 대열에 동참하고 말았다.

그 이후.

류성웅은 한동안 멘탈이 제대로 나가 있었다고 한다. 외출조차 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변한 건 MBS 연기대상 이후였다.

연기대상에서 신인상과 인기상과 최우수상을 수상한 안시현을 보면서, 자신의 연기 인생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이내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내 연기가 최고라 믿으면서 오만했고, 후배들을 업신여기고 폭언을 했던 게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그때부터 좀…… 연기를 접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거 같아. 때마침 후배님이 주연을 맡기로 한 『빌딩 숲』의 공개 오디션 소식을 듣고서 준비를 하게 된 거고. 사과 받아 주지 않아도 괜찮아. 혹시 내가 이러는 게 불편하면, 촬영장에서 아는 체도 하지 않을게. 진심이야.”

“…….”

류성웅의 허심탄회한 고백을 들은 이후, 안시현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싫어했어요.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선배랍시고 초면에 분위기 잡으면서 명령하고 무시하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요.”

“응.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아마 나 좋아하는 후배들 한 명도 없었을 거야. 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인생 진짜 잘못 산 거 같네.”

“솔직히 선배 말을 다 들었는데도 반신반의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사과하는 건지, 제가 확 떠서 그러는 건지 헷갈려요. 하지만…….”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답을 기다리던 류성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심으로 사과한 거라고, 달라진 거라고 믿어 볼게요.『빌딩 숲』, 함께 잘 만들어 봐요.”

그 순간.

류성웅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안시현이 내민 손을 잡았다. 물기어린 목소리로 답을 했다.

“……고마워. 절대 후배님이나 진모 후배님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미래에 인성 쓰레기 천만 배우로 성장했어야 할 배우가, 개과천선하는 순간이었다.

*   *   *

8월 1일.

『빌딩 숲』의 첫 대본 리딩 날.

안시현과 김진모와 진광욱 외에는 모두 배역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캐스팅이 진행됐고, 수많은 배우들 중 해당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고 수준급 연기력을 지닌 이들로만 선별된 상황.

대본 리딩을 시작하기 전의 분위기는 좋았다.

배우들은 최영만 작가와 최창국 PD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통성명을 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 대화가 이어졌다.

대본 리딩이 예정된 시간으로부터 10분 전.

MBS 드라마국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낸 최창국 PD가 기분 좋은 소식을 배우들에게 알렸다.

“제작비 추가 편성됐습니다.”

MBS 드라마국에서 『빌딩 숲』에 제작비를 추가 편성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01년 상반기.

MBS 드라마국에서 기대한 드라마들은 대체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고 종영했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드라마가 세 개 있었지만 기대치를 충족시키지는 못했고, 시청률 40%를 넘는 드라마는 단 하나 있을 뿐이었다.

2000년에 대박이 난 드라마를 여럿 배출한 것과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이에 MBS 드라마국은 캐스팅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빌딩 숲』을 작정하고 지원하기로 했다.

16부작이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제작조차 들어가지 않은 드라마가 꾸준히 화제가 되고 있기에 판만 제대로 깔린다면 최고 시청률 40% 이상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추가 제작비 편성이었다.

“PD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MBS 드라마국 미친 거 아니죠? 제작비 많이 편성됐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또 추가 편성을 했어요?”

“그만큼 기대감이 높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블록버스터급은 아니지만, 제작비 부족으로 걱정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와. 갑자기 어깨가 확 무거워지는데요?”

“여러분은 최선의 연기를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완전 멋있어. 순간 반할 뻔했잖아요.”

배우들을 비롯한 제작진은 MBS 드라마국의 판단에 놀라긴 했으나,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캐스팅 라인이 좀 미쳤어야 말이지.’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와 최우수상 수상자와 우수상 수상자가 함께하게 됐다. 거기에 연출력을 인정받은 PD가 담당을 하게 됐고, 흥행 여부와 별개로 『빌딩 숲』대본 자체는 잘 집필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공개 오디션을 통해 철저하게 연기력을 기준으로 남은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기까지 한 상황.

기대감을 가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특히나 상반에 런칭한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전체적으로 기대 이하였던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9월.

첫 촬영을 앞둔 상황에서, 드라마국에 들렀다 온 최창국 PD가 배우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저희 드라마, 11월 13일부터 방영합니다. 월화드라마로 편성됐습니다.”

“와. 11월이면 빠듯하네요.”

“그래도 뭐…… 무리라고 생각되는 스케줄 아닌 게 어디예요. 게다가 쪽대본도 아닐 거고요.”

“맞다. 작가님 대본 집필 끝나 간다고 했던가요?”

“방금 전화 통화하고 오는 길입니다. 14화 집필 마무리하셨다고 하니 쪽대본은 없을 겁니다.”

“와. 진짜 빠르신데요?”

“이제 저희만 잘하면 되겠어요.”

『빌딩 숲』은 2001년 11월 13일 월요일에 첫 방영을 시작해서, 2002년 1월 2일 화요일에 최종화가 방영되는 걸로 확정이 났다.

편성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자 배우들은 그제야 촬영이 임박했다는 걸 실감했다.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배우들과는 관점이 조금 달랐다.

‘2001년 연기대상 심사 대상에 아슬아슬하게 포함되겠네. 다행이야.’

MBS는 11월 15일 전에 첫 방영을 시작한 작품까지 해당 년도 연기대상 심사 대상에 포함하곤 했다.

11월 13일에 첫 방영을 시작하는 『빌딩 숲』은, 단 이틀 차이로 2001년 연기대상 심사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빌딩 숲』이 2002년 연기대상 심사 대상에 포함됐다면, 2001년 연말에 방영된 작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심사에 불리했을 거다.

반대로 2001년 연기대상 심사 대상에 포함됐기에, 상대적으로 평가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다. 아무래도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가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연기대상을 받고 말겠어.’

지난해 연기대상에서 안시현은 최우수상을 비롯해, 인기상과 신인상까지 도합 3관왕을 달성했다.

세 번째 작품에서 이뤄 낸 성과치고는 엄청났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진광욱이 열연한 『어의』와 경쟁하지 않았다면 연기대상 수상이 유력한 상황이었으니까, 『너와 나의 시간』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는 연기대상을 수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2001년에 방영한 MBS 드라마 중에서는 눈에 띄는 족적을 남긴 드라마가 없었다.

KNC와 STS가 시청률 50%를 돌파한 드라마를 각각 하나씩 배출한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MBS 드라마국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시현은 이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빌딩 숲』의 시청률 대박과 연기대상 수상, 2001년 하반기에 안시현이 진심으로 바라는 두 가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빌딩 숲』의 첫 촬영.

“……오케이.”

최창국 PD는 경악했다.

무려 네 신 연속, 원 테이크로 촬영이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연기를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 배우가 존재했다.

연기대상 수상자 진광욱, 그리고 과감하게 연기 변화를 시도한 안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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