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4화>
74화. 느낌이 옵니다
제작 발표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받은 건 주연 배우인 안시현과 김진모였고, 마지막 두 질문을 받은 건 담당 PD인 최창국과 최영만 작가였다.
“최창국 PD님께 묻겠습니다.『빌딩 숲』은 방영조차 하기 전에 일본 NHK 방송사에서 수입을 결정한 걸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담당 PD의 입장에서는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한데요, 일본에서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10월 초.
일본 NHK 방송사에서는 아직 방영을 시작하지도 않는 『빌딩 숲』을 방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단순히『나와 나의 시간』으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안시현의 차기작이라서가 아니었다.
9월 말까지 촬영된 분량 중 최창국 감독이 연출한 신을 일일이 확인하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빌딩 숲』이 일본에서 평균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시청률보다는, 국내에서의 시청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안시현 배우님이 말한 대로, 저 또한 최고 시청률 40% 이상을 기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 방영과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최창국 PD는 정석적으로 답을 했다. 일본에서 시청률이 잘 나오면 좋은 게 사실이지만, 일단은 국내 시청률부터 잘 나오길 바라는 게 맞았다.
다음은 최영만 작가의 차례였다.
“최영만 작가님께 묻겠습니다. 지난주부터 광고하고 있는 예고편만 놓고 보면, 『빌딩 숲』은 회사원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실제 작품 소개 또한 비슷한 맥락이고요. 작가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집필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걸 목표로 집필하였습니다. 『빌딩 숲』을 보면서 웃고, 울고, 화내고,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빌딩 숲』의 제작 발표회는 큰 문제없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제작 발표회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야간 촬영 있으신 배우분들은 사옥 앞 식당에서 식사한 뒤에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는 저녁에 하는 촬영이 제일 좋더라고요.”
“왜? 촬영 끝나고 한잔할 수 있어서?”
“크흐흐. 당연하죠. 내친김에 오늘 한잔하실 분?”
“술 좋지. 간만에 후배님들하고 한잔 마셔볼까?”
“오오오오! 영광입니다, 선배님! 제게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와 대작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야간 촬영이 예정된 배우들은 MBS 사옥 근처의 식당에서 제작진과 함께 식사를 한 뒤 단체로 촬영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다들 수고하세요. 모레 뵙겠습니다.”
“모레? 아, 맞다. 시현이 너 내일 간만에 촬영 없구나. 매일 봐서 당연히 내일도 볼 줄 알았잖아.”
“후배님, 간만에 쉬는 날인데 뭘 한 건가요?”
“아마 대학로에 있을 거 같습니다. 간만에 최정수 선배님을 뵙기로 해서요. 혹시 시간 되시면 내일 저녁에 합석하시겠어요?”
“저야 좋지요. 간만에 정수랑 한잔하겠네요. 내일 촬영 끝나고 연락할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빌딩 숲』의 촬영이 시작된 이후, 안시현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촬영장에 나왔다. 심지어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을 지켜볼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그랬던 안시현이 두 달여 만에 촬영장에 나오지 않는 날이 생겼다. 간만에 늦잠 좀 자고, 오후에나 느긋하게 대학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먼저 갈 데가 있지만.’
일단 그 전에 방문할 곳이 있었다.
『빌딩 숲』의 방영이 시작되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미뤄 놨던 약속이 급하게 잡힌 까닭이었다.
* * *
오후 8시경.
안시현이 간만에 연예인 아파트라 불리는 아파트에 방문했다. 후드 점퍼를 꾹 눌러쓴 채로 정혜영의 집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안시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벨을 누르자마자 현관문이 열렸다. 안시현을 집 안으로 들인 정혜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파파라치 안 붙었죠?”
“기자들은 이 아파트에 절대 출입 못 하는 거 알고 있잖아요.”
“혹시 몰라서요. 괜히 집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스캔들 나면 미안하잖아요.”
“밖보다 여기가 더 안전할걸요?”
정혜영이 거주하는 연예인 아파트는 외부인 방문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하다. 입주민이 직접 와서 방문 신청을 하지 않으면, 전화로 백날 이야기해도 아파트 내에 들어올 수 없다.
때문에 연예인 아파트는 연예인들의 비밀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밖에서 만났다가 스캔들이 나느니 안전하게 집에서 만나는 걸 선호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어떤 연예인이 연예인 아파트에 들어가는 건 확인할 수 있지만, 누굴 만났는지 확인하지를 못하니까 기사를 내는 게 불가능하다.
‘2008년에 주차장에서의 키스 장면을 몰래 촬영해 열애설을 단독 보도한 용감한 언론사가 나타나긴 하지만……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니까.’
적어도 지금은 정혜영의 집이 스캔들이 나지 않는 가장 안전한 만남의 장소임이 맞았다.
“그나저나 냄새 좋네요. 저녁 메뉴 뭐예요? 냄새로 봐서는 고기 쪽 같은데…….”
“스테이크에 파스타요. 직접 만들었어요.”
“사 온 게 아니고 직접요?”
“언제 한번 대접한다고 했잖아요. 이왕 하는 거 제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어요.”
“오. 이거 완전 기대되는데요?”
“하느님, 부디 제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기를 바랍니다. 배탈 나거나 식중독 걸리는 일은 없게 해 주세요.”
정혜영의 엄살과 달리…….
“맛있어요.”
“정말요?”
“네. 진짜 맛있어요.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요?”
“후우. 다행이네요.”
안시현은 정혜영이 해 준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스테이크와 파스타보다 맛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집에서 한 것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맛이 괜찮았다.
무엇보다 집에서는 음식을 해 먹지 않는다는 정혜영이 자신을 위해 직접 준비한 음식 아니던가.
맛있게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식사가 끝난 뒤.
안시현과 정혜영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저 본부장님 만날 때 아니면 술 한 잔도 입에 안 대는 거 알아요?”
“기쁘네요. 제 앞에서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거잖아요. 역시 친구 하자고 하길 잘했다니까.”
“요즘도 일룡백화점에 일본인들 많이 와요?”
“말해 뭐해요. 일본 여성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됐다니까요. 덤으로 제가 협찬 연결해 준 일룡호텔도 일본인 예약이 지난해에 비해 3배 넘게 늘었다고 좋아하더라고요. 셋째 오빠가 저한테 고맙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서 순간 당황스러웠어요.”
“도움이 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안시현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정혜영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의 시간』은 방영 초기에 제작비 문제로 꽤나 허덕였을 거다. 그녀가 일룡백화점과 일룡호텔에서의 촬영을 흔쾌히 주선해 줬기에, 추가 제작비가 편성되기 전까지 비교적 여유롭게 버틸 수 있었던 거다.
방영 이후 일본인 관광객의 증가로 매출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고 하니 안시현 또한 진심으로 기뻤다.
『너와 나의 시간』과 관련된 대화를 한참 나눈 이후에야, 화제가 『빌딩 숲』으로 넘어갔다.
“당분간 월요일하고 화요일 저녁에는 스케줄 비워 놔야겠네요. 이번에는 『너와 나의 시간』 때와 달리 재방송으로 보고 싶지 않아서요.”
“보고 바로바로 감상 말해 줘요.”
“노력할게요. 이번 작품 끝나고, 또 한동안 쉬다가 작품 들어갈 생각이에요?”
“그럴 것 같아요. 2년 2개월 동안 쉬어야 하니까요.”
“2년 2개월요? 아…… 혹시 군대 가요?”
“네. 내년 4월에 갈 것 같아요. 소속사랑도 이미 이야기 다 끝났고요.”
“……그렇구나.”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정혜영이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이야기를 꺼낸 안시현이 당황할 정도였다.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군대 간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지금까지 안시현과 김진모의 입대에 대해 아는 건 당사자와 가족들, 그리고 김진석 대표와 두 사람의 매니저인 박정상과 최봉팔이 전부였으니까.
정혜영은 한참 후에야 쓴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뭐가요?”
“그냥 여러 가지로요. 2년 2개월 동안 시현 씨의 연기도, 시현 씨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좀 그래요.”
“연기는 모르겠고, 얼굴은 더러 볼 수 있을걸요? 휴가 나오면 연락할게요. 성실하게 복무해서 포상 휴가 자주 받을 테니까,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스케줄 많을 때보다 더 자주 볼지도 몰라요.”
“그러면 좋겠네요.”
그제야 정혜영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다행히 안시현이 집을 나설 때까지 정혜영이 다시 의기소침해지는 일은 없었다.
* * *
『빌딩 숲』의 첫 방송을 앞둔 상황.
MBS 드라마국과 JM액터스는 여론전에 집중했다.
MBS 드라마국 입장에서는 직전에 방영한 40부작 드라마『일기장』이 마지막 회차에서 시청률 15.5%를 기록할 정도로 고전했기에, 『빌딩 숲』이 기대치만큼의 시청률을 기록해 주기를 빌고 또 비는 게 당연했다.
JM액터스는 소속 배우 두 명이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이니 여론전을 거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제법 좋았다.
최창국 PD는 예고편을 세 가지 버전으로 제작했다.
주연인 유성수와 최민의 시점에서 각각 하나씩, 그리고 다른 배역들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담은 버전 하나.
하나같이 드라마가 아닌 영화 예고편을 방불케 하는 퀄리티로 제작됐다. 세 예고편 모두 시청자들의 기대 심리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중들은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안시현과 김진모가 라이벌로서 어떤 식으로 경쟁하게 될지, 지난해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인 진광욱이 이번에는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기대감을 품은 채로 첫 방영을 기다렸다.
‘진짜 예고편이 잘 나오긴 했어. 최 PD님이 작정하고 만드신 게 티가 확 난다니까. 하긴, 제작비를 마구잡이로 퍼 주는데 이런 데 써야지 어디에 쓰겠어.’
예고편의 퀄리티가 비약적으로 높아진 건 넘쳐나는 제작비가 큰 역할을 했다.
제작비가 많다 보니 최창국 PD는 연출진부터 확실하게 보강을 했고, 일부는 외주를 맡기면서까지 각 잡고 연출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 시작이 바로 예고편이라고 보면 됐다.
‘본 방송을 보면 더 난리가 나겠지만.’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1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모를 만큼 넋 놓고 보게 되는 드라마를 만들자.
『빌딩 숲』의 담담 PD가 확정될 당시 최창국 PD가 품은 포부였고, 자신의 모든 역량과 넉넉한 자본을 총동원해서 배우들의 연기를 맛깔나게 연출해 냈다.
첫 방송 나흘 전.
배우들은 1화와 2화를 미리 시청했다.
혹여나 수정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민 아래, 최고의 결과물을 위해서 최창국 PD가 선시청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을 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와…… 내 두 시간 어디 갔는지 아시는 분?”
“이거 진짜 연출 장난 아닌데요? 연출이 저희가 한 연기를 120% 살려 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냥 연출이 미친 것 같아요!”
“이건 제작비도 제작비인데…… 그냥 최 PD님 연출 실력이 신의 경지에 오른 것 같네요.”
“맞아요. 돈 많이 퍼붓는다고 모든 드라마가 수려한 연출을 보여 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것도 기본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거지.”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기를 십분 살려 준 연출에 감탄하며 최창국 PD를 추켜세웠다.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드라마라고 해서 모두 연출이 좋은 건 아니다. 좋은 연출도 능력이 있어야지 가능한 법이기에, 제작비가 아닌 최창국 PD의 능력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안시현은 최창국 PD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걸로 소감을 대신했다.
그리고 진광욱은…….
“최 PD님, 이거…… 느낌이 옵니다.”
“느낌이요?”
“이 퀄리티가 16화까지 유지될 수 있다면, 우리 드라마 진짜 40% 넘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50%를 넘을지도 모릅니다.”
촬영 이후 처음으로 설레발을 쳤다.
제작진과 배우들마저 한껏 기대감을 품은 가운데, 마침내 『빌딩 숲』의 1화가 전파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