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5화>
75화. 심상치가 않네
『빌딩 숲』의 1화 초중반부는 투톱인 유성수와 최민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전업주부, 4년제 국립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군 복무 후 3년 동안 취업에 실패한 뒤 어렵사리 중견 제과회사 ‘일품제과’에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된 유성수.
아버지는 교수, 어머니도 교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일품제과를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품고서 입사하게 된 최민.
전혀 다른 성향의 두 남자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일품제과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 주는 게 『빌딩 숲』의 주요 스토리 라인이다.
물론 비중은 유성수 쪽이 더 높았다.
굳이 따지자면 유성수가 주인공이고, 최민은 유성수의 라이벌 역할이라고 보는 게 맞았으니까.
실제로 1화의 시작은 유성수가 일품제과 최종 면접에서 낙마하고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제안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이후 유성수의 삶을 되짚은 뒤 입사 첫날의 모습을 보여 주며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마케팅팀 계약직 신입사원 유성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성수의 목표는 단 하나.
3년 만에 어렵사리 취업한 일품제과에서 성실하게 일해, 능력을 인정받고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유성수는 마케팅팀 차장 안필석과 대리이자 안필석의 오른팔인 하진욱의 밑에서 일품제과의 첫 업무를 시작하게 됐다.
물론 업무라고 해 봐야…….
“유성수 씨,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유성수 씨, 이거 10부만 복사해 주세요.”
“유성수 씨, 이 문서 타이핑 좀 해 주세요.”
잡일을 도맡아 하는 게 전부였다.
유성수는 온갖 집일을 하면서도 군말하지 않았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앞세워 모든 직원들을 웃는 낯으로 대했고, 말끝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본 안필석 차장은…….
“일을 잘하는지는 모르겠고, 싹싹한 게 마음에 드네.”
“에이. 그래 봐야 계약직 아닙니까, 차장님.”
유성수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반면 안필석 차장의 오른팔이자 4년 차 대리인 하진욱은 유성수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겹도록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계약직이 뭐 그리 특별하다고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계약직이라고 정규직 전환되지 말라는 법 없잖아? 저 친구, 한 달 정도 허드렛일을 시키다가 기획안 하나 써 오라고 시켜 봐. 보자…… 봄에 출시할 새 과일음료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으음. 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성수에게는 입사 후 처음으로 번듯한 업무를 할 기회가 예정됐다.
유성수의 입사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최민이 일품제과에 입사했다.
“하 대리, 쟤는 뭔데 입사하자마자 사장실부터 가냐.”
“왜 그 있잖습니까. 서울대 경영학과 다닌다는 사장님 조카. 그 친구입니다.”
“아, 사장님이 회식 때마다 회사 물려줄 거라는 말 입에 달고 살던 놈?”
“네, 그 친구 맞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저희 회사에 이력서 넣었다고 합니다.”
“부럽다, 부러워. 누구는 똥꼬에 불나게 뛰어다녀도 부장 달고 퇴직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데, 누구는 입사 때부터 미래가 창창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아, 갑자기 힘이 쭉 빠지네요.”
“힘 빠질 땐 알코올이 최고지. 퇴근하고 한잔?”
서울대학교 출신에 사장의 조카.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상당수의 직원들은 최민으로부터 거리감을 느꼈다. 신입사원이 아니라 장차 자신들에게 월급을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입사원 최민입니다. 저에 대한 소문 잘 알고 있습니다. 일품제과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나 그 전에 여러분께 인정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차기 사장이 아니라 평범한 신입사원으로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민은 스스로 자세를 낮췄다.
모든 직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회사를 물려받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시작한 최민은 깔끔한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점차 직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나갔다.
그 와중에 한 달 가까이 항상 웃는 낯으로 허드렛일을 해 오던 유성수는 마침내…….
“거, 기획안 하나 써 와 봐요. 혹시 알아요? 좋은 기획안 써 오면 정직원 될지도 모르잖아요. 유성수 씨가 열심히 해서 차장님이 특별히 주시는 기회니까 열심히 해요.”
허드렛일이 아닌 다른 업무를 부여받았다.
차민욱 대리가 유성수에게 기회를 주는 장면을 마지막으로『빌딩 숲』의 1화가 마무리됐다.
* * *
-MBS 새 월화드라마『빌딩 숲』, 우리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다.
-『빌딩 숲』 첫 방송, 시청률 17.5%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 알려.
-또다시 가치를 입증한 안시현의 명품 연기.
-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었다.
-『빌딩 숲』,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는 명품 드라마.
『빌딩 숲』의 첫 화 방영 후.
언론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회사 생활을 리얼하게 살려 낸 건 물론이거니와, 주연이건 조연이건 할 거 없이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연기를 보여 줬으며,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은 보너스였다.
일단 보기 시작하면 예고편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극찬이 더러 나올 만큼 『빌딩 숲』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
이는 곧 시청률을 통해서 증명이 됐다.
KNC 『호텔 1997』 - 13.5%
MBS 『빌딩 숲』 - 17.5%
STS 『마음대로 할 거야』- 22.3%
첫 방송부터 무려 17.5%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정조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이러다 다음 회차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 기록하는 거 아니에요?”
“음. 충분히 가능하지 않으려나요?”
“2화가 울림이 좀 큰 회차라서 가능할 것도 같아요.”
“와. 우리 이러다 진짜 최고 시청률 50% 넘는 거 아닌가? 26부작도 아니고 16부작인데?”
“시작부터 17.5%인 거 보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첫 방송의 시청률을 확인한 『빌딩 숲』 촬영 현장이 들떴다. 이 기세라면 16부작임에도 이례적으로 시청률 50%를 돌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봤다.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네.’
안시현 또한 들뜬 분위기에 가담했다.
첫 방송의 경우 시청률 15% 정도가 한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시청자가 『빌딩 숲』의 첫 방송을 지켜봐주었다.
거기에 방영 이후 기사를 통해서 연신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2화의 예고편도 분위기 있게 뽑혔다.
유성수와 최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다가,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유성수 혼자 있는 모습을 5초 가까이 조명하며 예고편이 끝났다.
유성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째서 혼자 남아 있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2화에서 유성수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을 암시하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진짜 최 PD님 예고편 뽑는 능력은 미쳤다니까. 시청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
회귀 전부터 안시현은 최창국 PD의 연출을 좋아했다.
본방송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예고편 또한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청자가 안 볼 수 없게 만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예고편이 너무 좋았었다.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 상승세에 영향을 끼쳤던 예고편이, 『빌딩 숲』에서도 제대로 그 활약을 해 주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첫 방송이 나간 뒤.
-첫방 잘 봤다. 연기 스타일 바꿨더라? 어쩐지 대학로까지 와서 조언을 구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바뀐 것도 괜찮더라. 대박 내고 와서 김치찌개나 쏴라.
-아들, 드라마 너무 잘 봤어. 우리 아들은 어쩜 맡은 배역마다 그렇게 소화를 잘하나 몰라. 주변에서 다들 재미있다고 난리야.
-너무 재밌게 봤어요. 얼른 촬영 끝나서 함께 와인 한잔했으면 좋겠어요. 할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서 기대돼요.
-시청률 좋네. 드라마도 재밌더라. 홍보에 총력을 다할 테니까 50% 한번 달성해 보자. 아, 박 대리 통해서 홍삼 엑기스 좀 보낼 테니까 현장에서 나눠 먹어.
-MBS 드라마국…….
안시현과 친분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조심스럽게 다음 회차의 내용과 관련된 추측을 하기까지 했다.
예의상 보낸 문자메시지가 아니라 첫 방송을 시청하고서 보낸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심지어 작품 평가에 깐깐하기로 유명한 최정수나 김진석 대표마저도 재미있게 보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거, 잘하면 2화에서 시청률 20%를 넘길지도 모르겠어. 그럼 진짜 대박 각 잡히는 건데 말이야.’
유성수와 최민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1화와 달리, 2화부터는 유성수와 최민의 본격적인 회사 생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최영만 작가가 직접 회사 생활을 하며 겪은 경험담이 녹아든 사건들이 발생하며 시청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할 예정이었다.
2화에서 유도할 감정은 분노였다.
2000년 11월 14일 화요일 저녁.
『빌딩 숲』의 2화가 방송을 탔다.
유성수는 원래 하던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야근을 하면서 짬짬이 기획안을 준비해 나갔다.
하진욱 대리가 준 시간은 보름.
그사이에 그럴듯한 기획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기획안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획안만 제대로 만들면 정직원이 될 수 있어. 재계약되지 않을까봐 눈치 보고, 다시 면접 보러 다닐 고민할 필요 없다고.’
제대로 된 기획안을 만들어 정직원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유성수는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기획안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기획안의 마무리를 앞둔 날 저녁.
“성수 씨, 퇴근 안 하고 뭐해?”
“아…… 기획안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슬슬 퇴근하려던 차입니다.”
“그래? 그 기획안, 내가 한번 봐줄까?”
“괜찮습니다. 이제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봐주겠다는 거지. 자, 맡기고 바람 좀 쐬다가 와. 그사이에 기획안 검토해 줄게.”
“정말 괜찮은데…….”
유성수의 거듭된 거절에도 김 과장은 억지를 부리다시피 자리를 빼앗아 앉았다. 결국 유성수는 10분 동안 바람을 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
유성수가 완성된 기획안을 제출하기 몇 시간 전, 그가 작성한 기획안의 핵심 내용을 바탕으로 한 기획안을 김 과장이 먼저 제출하는 촌극이 발생했다.
이후 뻔뻔하게 유성수를 불러낸 김 과장은.
“미안해, 성수 씨. 성수 씨는 계약직이지만 난 정규직이잖아. 거기에 내년 봄이면 둘째까지 태어나. 나가는 돈이 장난 아니라고. 승진하면 내가 한턱 쏠 테니까, 너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라는 말을 남기고서 유성수에게 비밀 유지를 당부했다. 유성수의 정규직 전환 평가를 자신이 한다는 협박과 더불어 말이다.
그날 저녁,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유성수가 홀로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출근 이후 매일 웃는 낯이었던 유성수는, 이날만큼은 웃지 못했다.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려고 노력해 봤지만 도통 소용이 없었다.
유성수가 넋 나간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유기농 과일음료 마케팅 기획안]이라는 타이틀만 덩그러니 적힌 문서 파일을 열어 둔 채로 말이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빌딩 숲』의 2화가 끝났다.
2화과 방영된 뒤.
-아들! 김 과장 잘려? 잘리지? 제발 잘린다고 말해 줘! 안 그러면 화병 나서 잠 못 잘 거 같으니까!
-저희 회사에 김 과장 같은 후안무치한 인간이 없는 게 아닐까 한번 확인해 봐야겠네요. 남의 기획안을 빼앗아 가다니,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네요.
-2화 모니터링 잘했다. 시청자들 분노 폭발하겠던데? 김 과장의 밉상 연기가 기가 막혔어.
안시현의 지인들은 2화를 시청하고서 분노가 폭발해 연락을 해 왔다.
특히나 안시현의 부모님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하더니, 김 과장이 퇴사하는지 안하는지를 집요하며 물어보면서 화병이 날 것 같다며 호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빌딩 숲』2화, 시청률 23.7% 기록!
-2화 만에 20% 고지 돌파, 『빌딩 숲』의 최고 시청률은?
시청률도 함께 폭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