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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76화 (7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6화>

76화. 고소한다더라

『너와 나의 시간』에서 최창국 PD는 캐릭터들의 매력에 집중한 연출을 했다. 정영빈과 안수진, 매력이 넘치는 조연들의 캐릭터성을 부각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반면『빌딩 숲』의 연출 방향은 각각의 캐릭터보다는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췄다.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할 계획이었다.

연출의 방향성이 빛을 발한 게 바로 2화였다.

기획안을 도둑질한 상사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한 파리 목숨 신세인 계약직 직원의 무기력함을,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빈 기획안을 띄워 놓은 모니터를 한참 동안 쳐다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덕분에『빌딩 숲』의 2화는 방영 이후 일주일 또한 꽤나 많은 이슈를 낳았다.

가장 이슈가 된 건…….

-2화 보고 마누라 몰래 화장실에서 울었습니다. 과장한테 기획안 뺏겼던 몇 년 전이 생각나더라고요. 하. 잘 지내니, 정 과장 개자식아. 난 네 덕분에 더러워서 회사 때려치우고 창업한 고깃집이 대박 나서 연 매출 5억 기록하는 사장님 됐다.

-대기업 부장입니다. 저도 신입 시절 상사에게 기획안 몇 번 뺏겼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부조리한 관행을 답습하는 직원이 보이면 질책하고 있습니다. 『빌딩 숲』의 방영을 계기로, 관행이라는 핑계 아래 자행되는 악습이 뿌리 뽑히길 바랍니다.

-아, 나이 마흔에 드라마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은 퇴사하고 자영업을 하고 있지만, 회사 다니면서 겪었던 온갖 고초가 떠오르니 먹먹해지더군요.

-가족들과 함께 치킨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는데, 아들 녀석이 물어보더라고요. 아빠도 신입 때 저랬어? 순간 목이 매여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빌딩 숲』의 시청자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시청자 후기였다. 유성수의 절망을 보며 직장 생활을 하며 경험했던 일들을 떠올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남긴 것이다.

처음에는 몇 개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청자 게시판은 자신이 직장 생활을 하며 겪은 부조리를 성토하는 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에는.

-『빌딩 숲』, 우리네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다.

이런 기사까지 나고 말았다.

기사의 내용을 확인한 최창국 PD가 미소를 지었다. 방영 전 생각했던 퍼즐 조각들이 고작 2화만에 맞춰져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작은 계획대로 되고 있어. 이 분위기를 잘 이끌고 나갈 수만 있다면, 직장인들을 시청자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시청률 50%.

2화 만에 시청률 20%를 돌파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16부작이기에 넘기 쉽지 않은 목표다.

최창국 PD는 만에 하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그 시작이 직장인들을 사로잡는 거라고 봤다.

『너와 나의 시간』의 경우 여성 시청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율로 따지면 8 대 2가 조금 넘을 정도로 여성 시청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저격한 드라마라고 보는 게 맞았다.

반면 『빌딩 숲』은 직장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다. 기획 단계부터 여성 시청자뿐만 아니라 남성 시청자들 또한 노린 드라마이다.

일단 2화까지의 반응만 보면 기획 의도가 성공적으로 적용되는 모양새였다.

‘아직 좋아하기는 일러. 무엇보다 로맨스 없는 드라마를 여성 시청자들이 얼마나 좋아해 줄지도 의문이고.’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었다.

초반에 좋은 평가를 받다가 무너지는 드라마를 수없이 봐 왔다. 게다가 『빌딩 숲』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해 로맨스를 철저하게 배제한 드라마다.

여성 출연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로맨스가 아닌 직장 생활에서의 부조리함을 표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었다.

어쩌면 방영 회차가 늘어나면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이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최창국 PD는 방영 초반의 엄청난 상승세에도 좀처럼 마음 편하게 좋아하지를 못했다.『너와 나의 시간』때처럼, 마음 편하게 좋아하는 건 목표를 달성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   *   *

『너와 나의 시간』때와 달리, 『빌딩 숲』은 2화까지의 방영이 끝난 가운데 안시현의 연기에 대해 칭찬하는 기사를 찾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기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너와 나의 시간』에 비해 그 빈도가 확연하게 줄어든 게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연기력을 칭찬하는 기사가 왜 없냐고, 우리 아들이 연기를 얼마나 잘했는데 다들 무시하는 거냐고 대뜸 화를 냈지만…….

안시현은 오히려 자신의 연기력에 대해 칭찬하는 기사가 줄어든 게 기분이 좋았다.

‘기대치가 올라갔다는 증거 아니겠어?’

『형아, 동생』과『너와 나의 시간』의 흥행으로 인해 안시현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 또한 덩달아 상승했다. 이제는 안시현의 연기력에 대해 대중들이 바라는 눈높이가 제법 높아진 것이다.

이로 인해 연기력과 관련된 기사가 줄어들었다.

안시현의 연기에 감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애초부터 기대하던 바가 있었기에 호들갑을 떨지 않고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이게 된 거다.

물론 칭찬이 없다고 해서 『빌딩 숲』의 초반 선전에 안시현의 공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2화의 마지막 신은 최창국 PD의 연출력과 안시현의 기가 막힌 연기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안시현이 연기했기에 많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거다.

칭찬에 인색했던 언론들도 2화의 마지막 신을 보고는 안시현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너와 나의 시간』 때와 달리 골고루 관심을 받는 느낌이라서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네.’

『빌딩 숲』은 방영 초반부터 안시현과 김진모과 진광욱, 거기에 류성웅 정도가 탄탄한 연기력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네 명의 배우가 관심을 나눠 받으니 자연스레 안시현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줄어드는 게 당연했다.

덕분에 안시현은 조금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지나친 관심보다는 지금처럼 적당한 수준의 관심이 훨씬 더 좋았다.

‘뭐…… 그래봐야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물론 오래 가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보다 시청률이 더 오르면, 결국 주연인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테니까.

*   *   *

『빌딩 숲』은 3화에서 25.7%, 4화에서 28.8%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고작 4화 만에 30% 시청률을 눈앞에 두게 됐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는 보너스였다.

KNC와 STS의 동시간대 드라마 중 시청률 30% 이상을 기록하며 독주하던 드라마가 없던 상황이었기에, 폭발적인 상승세인『빌딩 숲』의 동시간대 시청률 1위는 드라마 자체에 문제가 없는 한 예견된 것이었다.

문제라면 너무 빨리 달성한 것 정도였다.

물론 MBS가 아닌 경쟁사인 KNC와 STS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4화의 방영이 끝난 직후.

『빌딩 숲』에 대한 대중들의 주된 관심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유성수는 언제쯤 정직원이 될 수 있을까, 유성수는 과연 빼앗긴 기획안을 되찾아 올 수 있을까?

4화의 막바지.

하진욱 대리가 유성수를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기획안을 뺏긴 뒤로 좀처럼 웃지 못하고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유성수를 보며, 기획안을 뺏기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펑펑 울었던 신입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고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이에 안필석 차장에게 허락을 받고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김 과장이 유성수의 기획안을 훔쳤다는 걸 폭로하기로 작심했다.

어쩌면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직원들로부터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혼자만 깨끗한 척하냐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진욱 대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하진욱 대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4화가 끝이 났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유성수가 기획안을 되찾아오길 바란다는 성토가 줄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성수는 5화에서 기획안을 되찾게 됐다.

사자대면 자리에서 자신이 기획안을 훔쳤다면 사직서를 내겠다며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던 김 과장은, 하진욱 대리가 들이민 증거와 날카로운 질문들로 인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덕분에 사장은 어렵지 않게 판단을 내렸다.

“김 과장…… 스스로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그렇게 자신이 쓴 기획안을 되찾게 된 유성수에게, 사장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유성수 씨.”

“네, 사장님.”

“김 과장이 제출한 당신의 기획안은 훌륭했습니다. 내달 말에 출시될 새 음료 마케팅에 적용할 예정이었는데…… 안 차장을 도와 이 프로젝트를 맡아 보지 않겠습니까? 기대치를 충족시킨다면, 매출액에 비례하는 보너스와 정직원 자리를 보장하죠.”

바로 기획안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면 정직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유성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에 기획안을 되찾았고, 기획안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기회 또한 얻었다. 기대치를 충족시킨다면 정직원까지 될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유성수가 제안을 받아들인 가운데, 마케팅 팀은 두 부류로 나눠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마케팅 준비에 사활을 걸었다.

일품제과가 내달 말에 출시하는 제품은 두 개.

두 개의 기획안을 바탕으로 각각의 제품에 다른 마케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유성수의 것이 아닌 다른 하나의 기획안은, 최민이 작성한 것이었다.

“두 기획안 다 좋으니 둘 다 해 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민이의 기획안이 더 좋을지, 아니면 계약직의 기획안이 더 좋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   *   *

『빌딩 숲』은 5화에서 31.3%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30% 고지를 넘어섰다.

4화까지 보여 준 상승세가 워낙 기대 이상이었기에, 5화의 내용에 큰 문제가 없다면 시청률 30% 돌파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5화의 방영 후.

야간 촬영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현아, 광고 요청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근데 광고 요청한 제품들이 좀…….

“너무 남성들 위주의 제품이에요?”

-어. 심지어 속옷도 있다. 드라마의 분위기 때문인지 남성 관련 제품들의 광고 문의가 좀 많네.

“『너와 나의 시간』에서 아쉽게 못 보여 준 복근을, 광고에서 보여 주면 되는 건가요? 아, 참고로 저 그 후에도 운동 꾸준히 해서 아직 복근 살아 있어요.”

-크흐흐. 광고는 종영 전까지는 2, 3개 정도 선별해서 찍고, 종영 후에 추가로 몇 개 더 찍자. 아, 맞다. 그리고 무슨 협회에서 너 고소한다더라.

순간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소요? 무슨 고소요? 저 고소당할 만큼 잘못된 행동은 한 적 없는데요.”

-대한민국 중소기업 CEO 협회? 뭐 그런 이름이던데, 너 때문에 직원들이 월요일하고 화요일에 야근을 안 해서 회사 일이 안 돌아간다고 고소한데.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까 제대로 된 협회는 아니고, 너 고소해서 관심 좀 끌어 볼 생각인 것 같더라고.

“허…….”

안시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다하다 직원들이 야근을 안 해서 고소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아무리 노동법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2001년이라 해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대로 된 협회가 아니라고 하니 이해가 됐다.

물론 야근을 안 하는 직원들 때문에 진짜로 골머리를 앓는 회사 대표들이 제법 있을 테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까?”

“역공 한번 제대로 때려 주죠. 그쪽에서 우릴 이용하려고 한 건데, 저희도 그쪽 이용해서 드라마 홍보 수단으로 써도 되는 거잖아요.”

-그럴 것 같아서 준비해 뒀다. 제대로 명치 후려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촬영에만 집중해.

“네, 그럴게요.”

통화를 끝낸 안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정혜영과 통화를 하면서 들었던 내용이, 별거 아닌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던 정보가 문득 떠올랐다.

-그거 알아요?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월요일, 화요일에 야근 안 하는 게 유행이 되고 있데요. 『빌딩 숲』 봐야 한다고 회식도 월요일, 화요일은 피한다던데…… 이거 조만간 이슈될 거 같지 않아요?

그때는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서 넘어갔지만, 고소까지 당하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이거 진짜, 야근 기피가 사회 현상으로 이슈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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