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77화 (7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7화>

77화. 이거 완전

『빌딩 숲』 6화에서 유성수는 안필석 차장과 하민욱 대리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기획안을 바탕으로 한 신제품 마케팅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최민 또한 마케팅팀 직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마케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필요하면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기까지 하며 열정을 불태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계약직인 유성수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장차 일품기업을 물려받게 될 최민이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된 상황.

가진 능력과 배경만 놓고 보면 최민 쪽의 우세를 점쳐야 하는 상황이지만, 유성수 쪽에는 일품제과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온 안필석 차장과 그의 오른팔인 하민욱 대리가 존재했다.

두 사람이 유성수를 든든하게 도와줬다.

“자신감 가져, 유성수. 네 기획안 괜찮았어. 그러니까 김 과장 그놈이 기획안을 도둑질을 한 거지. 제대로 살려 낼 수만 있다면, 이번 승부 우리가 이긴다.”

“근데 차장님. 이거 꼭 우리가 이겨야 됩니까? 타 업체와의 경쟁이 아닌 내부 경쟁이잖아요. 서로 윈윈 해도 되는 거잖습니까.”

“윈윈은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겨야 돼.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미래의 사장님을 이겨 보겠어?”

“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데요?”

최민의 사내 이미지는 좋은 편이다.

입사하자마자 훗날 일품제과를 물려받을 거라는 게 알려졌음에도 사원을 자처했다. 기획안도 작성자를 비공개한 채 투표를 통해 선별된 것이지, 최민이 차기 사장이라서 선별된 것이 아니었다.

안필석 차장과 하민욱 대리도 최민을 좋게 생각했다. 그가 차기 사장이 되도 나쁠 게 없다고 봤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계약직인 유성수가 차기 사장과의 맞대결에서 이기는 걸 보고 싶을 뿐이었다.

유성수가 정직원이 되길 내심 바라기도 했고 말이다.

6화의 막바지.

두 신제품의 출시 후 광고가 연속으로 나가고, 일품제과의 사장이 그걸 지켜보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6화가 마무리된다.

6화의 방영 이후.

-『빌딩 숲』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다.

-눈을 땔 수 없는 드라마, 1시간이 사라지는 마술.

-고조되는 긴장감, 신제품 마케팅의 결과는?

-로맨스 없는 드라마도 성공할 수 있다.

언론들은 『빌딩 숲』에 대해 극찬을 쏟아 냈다.

『빌딩 숲』은 방영 전 예고편부터 엄청난 퀄리티를 보여 주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또한 매 회차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연출력으로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첫 화부터 줄곧 몰입도가 좋은 드라마라며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이번 6화는 그 이상이라며 호평을 받았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마케팅 준비에 열을 올리는 유성수와 최민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 지나갔다는 평가가 넘쳐났다.

그 와중에.

안시현의 팬클럽 팔색조의 카페에 올라온 글 하나가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비가 처음부터 여유롭게 책정됐다면, 시청률 60% 넘지 않았을까요? 다시 보니 방영 초반과 중후반의 연출 차이가 조금 있네요. 부족한 제작비로 인해 초반에는 최창국 PD님 혼자서 고군분투한 결과겠죠. 그래서 더 아쉽네요. 돈 걱정 안 시키니 이렇게 숨 막히는 연출을 보여 줄 수 있는 분을 쥐똥만 한 제작비로 고생시킨 거잖아요.

평소 카페에 종종 접속하는 안시현 또한 해당 글을 확인했다.

그리고 딱 절반만큼만 공감했다.

시간을 되돌려『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비가 넉넉하게 책정됐다고 가정했을 때, 최창국 PD의 연출이 더욱 빛을 발했을 거라는 부분은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좋은 시청률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때처럼 의기투합하는 분위기가 안 나왔을지도 몰라. 악에 받쳐 연기하던 몇몇 배우들의 일취월장이 없었을 수도 있고. 풍족한 제작비가 반드시 시청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너와 나의 시간』이 부족한 제작비와 『거짓말』의 독주라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제작진과 배우들이 똘똘 뭉친 덕분이었다.

제작비가 넉넉했다면 그때처럼 의기투합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안시현의 견해였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현재 최창국 PD의 연출력이 절정이라는 것.

‘시대의 흐름에 따른 특수 효과의 발전을 제외한 채, 연출만 놓고 보면 최PD님의 인생작인 『내 아내는 처녀귀신』 때보다 더 좋은 거 같아.’

안시현은 최창국 PD의 연출력이 절정에 오른 이유를, 최창국 PD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빌딩 숲』은 자신과 김진모의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일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 그리고 제작진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는 작품일 테니까.

‘이제 곧 반환점을 지나게 된다. 그쯤 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견적이 나오겠지.’

*   *   *

『빌딩 숲』 6화가 후 7화가 방영되기까지의 일주일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슈 하나가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야근 좀 해 주세요, 사장들의 하소연.

-직장인 90%, 『빌딩 숲』 보기 위해 월요일과 화요일 야근 피한다고 밝혀 화제.

-C사, 야근 중 드라마 시청 위해 휴게실에 TV 설치.

-야근 수당 주면서 야근 시켜라, 직장인들의 분노.

월요일과 화요일에 『빌딩 숲』을 보기 위해서 직장인들이 야근과 회식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6화의 종영 이후 JM액터스가 안시현을 고소한 한 협회를 맞고소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였다.

이전에도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야근을 안 하고 집에서 본 방송을 챙겨 본다는 직장인 시청자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이 일을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한 언론사는 직장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무려 90%의 직장인이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야근을 하지 않고 『빌딩 숲』을 챙겨 보려 하고 있다는, 『빌딩 숲』의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월요일과 화요일의 야근 기피 현상이, 직장인과 고용주 간의 갈등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야근을 안 해서 회사가 적자를 볼 지경이라고 주장하는 고용주들과, 야근을 시킬 거면 야근수당부터 주면서 말하라고 권리를 주장하는 수많은 직장인들 사이의 의견이 인터넷상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기사를 접한 진광욱은.

“이거 완전 『어의』가 한창 방영할 때 한의원 열풍을 보는 것 같구만.”

『어의』가 방영될 당시를 떠올렸다.

『어의』의 전국적인 인기와 의약 분업 문제가 맞물리며 전국에서 한의원 열풍이 불던 그때를 말이다.

『빌딩 숲』의 방영 이후 직장인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월요일과 화요일의 야근 기피 현상이, 마치 2000년 초반의 한의원 열풍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진짜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심지어 시현이는 얼마 전에 고소까지 당했잖아요. 무슨 CEO 어쩌고 협회라던데, 그럴 시간에 야근 수당이나 좀 잘 챙겨 주지.”

“로맨스 없는 드라마가 이렇게 이슈가 되는 날을 보게 될 줄이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인 거지. 20대와 30대뿐만 아니라, 그 위로 올라가도 많이들 공감할 거야.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악습이 어디 한둘이었겠어? 공감을 넘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좋은 거지.”

사실 『빌딩 숲』을 시작할 때가지만 하더라도 제작진과 배우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로맨스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주제 의식으로 꽉 채운 드라마이니만큼, 최대한 많은 배중들이 실제로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그 공감이 야근 기피 현상으로 이어지며 분위기가 묘해진 건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시청률만 놓고 보면 나쁠 건 없었다.

야근 기피 현상으로 인해 『빌딩 숲』에 대한 언급이 꾸준히 되고 있었으니까.

‘반환점을 돌고 나서 치고 올라가려면…… 7화에서 이목을 확 집중시킬 필요가 있어.’

7화의 방영을 하루 앞둔 2001년 12월 2일 일요일.

최창국 PD가 몇몇 기자들이 모아 둔 가운데 짧게나마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편집하러 가야 돼서 그러는데, 10분 정도 안에 끝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물론입니다. 일단…….”

능숙한 언론 플레이는 빼어난 연출력과 어깨를 견줄 만한 최창국 PD의 장점이다.

과하지 않은 스포일러,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포일러를 위해 기자들을 이용한다. 과한 스포일러로 대중들의 흥미를 떨어트리는 제작진이 더러 있지만, 최창국 PD는 딱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선을 지킨다.

이를 테면.

“많은 분들이 유성수와 최민의 마케팅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 유성수는 과연 정규직이 될 수 있을지를 놓고 궁금해하고 계시다는 거 압니다. 7화에서 속 시원하게 모두 풀어낼 예정이니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곧 방송될 회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맛보기 수준으로만 알려 주곤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거니, 궁금하면 본 방송으로 확인하라는 식이었다.

인터뷰를 끝낸 뒤.

최창국 PD가 편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창 편집에 매진하던 조연출이 그를 반겨 주었다.

“선배님, 커피 사다 놨습니다. 단 게 먹고 싶어서 도넛 몇 개 사 왔는데 드십시오.”

“땡큐. 잘 먹을게.”

“피곤해 보이시는데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1차는 제가 작업해도 되잖습니까. 솔직히 그러다 쓰러지시는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최종본 확인하고 넘긴 다음에 좀 자고 올게.”

『빌딩 숲』의 촬영을 시작한 이후.

최창국 PD는 줄곧 하루에 두세 시간 자고, 정 못 버티겠다 싶으면 믿음직한 후배 조연출에게 촬영이나 편집을 맡기고 몇 시간씩 자고 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세 달 사이 몸무게가 4kg이나 줄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로 최창국 PD는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해 나갔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사람인 이상 몇 달 동안 자는 시간을 줄여 가며 강행군을 하면 지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순간도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지칠수록 미소를 짓고 촬영장에서 파이팅을 외치며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퇴사 소식이 알려지고 따라 나올 녀석들을 제외하면, 다들 MBS에서 계속 근무해야 돼. 나를 위해서도, 녀석들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빌딩 숲』은 무조건 성공시킬 거야.’

『빌딩 숲』은 최창국 PD가 MBS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메인 PD를 맡는 작품이니까.

『빌딩 숲』의 종영 이후 퇴사가 예정되어 있으니까.

『빌딩 숲』의 메인 PD가 된 이후, 최창국 PD를 바라보는 MBS 드라마국 내부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다. 공정하게 선택된 게 아니라 안시현과의 인연으로 인해서 선택된 거라는 질투 어린 소문이 퍼져 나갔다.

급기야는 최창국 PD가 접대를 해서 『빌딩 숲』의 메인 PD가 됐다는 소문이 아내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 순간.

최창국 PD는 대학 졸업 후 20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함께한 MBS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내 정치도, 『너와 나의 시간』 이후 들려오는 온갖 헛소문들도 이제는 지겨웠다.

오로지 제작과 연출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결과물로만 평가받는 직장을 원했다.

때마침 조건에 딱 어울리는 제안도 왔고 말이다.

MBS 드라마국 국장은 외제차를 포함한 온갖 조건을 제시하면서 최창국 PD의 마음을 돌려 보려 애썼지만, 한 번 떠난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2002년 2월을 기점으로 최창국 PD의 MBS 퇴사가 확정됐다.

최창국 PD는 혹여나 『빌딩 숲』의 촬영에 영향을 끼칠까 봐 종영 때까지는 퇴사 소식이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고 국장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단 세 사람에게만 자신의 퇴사 소식을 알려 줬다.

아내, 안시현, 그리고 훗날 자신의 고용주가 되게 될 김진석 대표였다.

‘이번 작품만 끝내면 당분간 쉴 수 있을 테니까, 일단은…… 『빌딩 숲』에만 집중하자. 반환점이 코앞이잖아.’

이제 곧 방영될 7화와 8화를 기점으로 『빌딩 숲』은 반환점을 돌게 된다. 반화점을 돌고 나서부터는 보다 본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며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보여 줄 예정이다.

배우들은 최선을 다해서 연기를 했다.

그 결과물을 보고 대중들이 얼마나 공감해 줄지는 최창국 PD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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