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8화>
78화. 명심해
『빌딩 숲』의 7화가 전파를 탔다.
유성수와 최민의 마케팅 승부는, 결과적으로 유성수의 판정승이었다.
최민의 마케팅 전략은 괜찮았다.
타 브랜드의 음료에 비해 양이 30%가량 많은데 가격이 비슷하다는 걸 핵심 전략으로 앞세웠고, 이를 통해 첫 2주 동안은 판매 성적에서 앞섰다.
반전이 일어난 건 3주 차부터였다.
유성수는 최민과 달리 유기농 과일 음료,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료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가격대는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고급 음료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광고를 기획했다.
첫 2주 동안의 판매 실력은 별로였지만…….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직접 나가서 홍보를 하는 열정까지 보여 주면서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며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다.
결국 3주 차에는 유성수가 마케팅을 한 음료의 판매랑이 최민이 마케팅을 한 음료의 판매량을 추월했고, 4주 차에는 격차가 제법 벌어지기까지 했다.
4주차까지의 판매량을 확인한 뒤, 일품제과 사장이 유성수를 사장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찌익. 찌익. 찌익.
유성수의 계약서를 찢어 버리며 미소를 지었다.
“뭐하나? 계약서 새로 쓸 준비 안 하고. 아, 사원증은 점심 먹고 오면 나와 있을 거야. 안 차장에게 말해 놨으니,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회식을 즐겨. 자네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이니까.”
회식이 끝난 뒤.
적잖게 취한 유성수는 홀로 회사로 돌아왔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낮에 발급된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마케팅팀 유성수 사원.
그토록 얻고 싶었던 타이틀을 입사 후 8개월 만에 손에 넣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정사원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입사 후 겪었던 온갖 고초들이 유성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계약직이라고 허구한 날 무시당했던 나날들, 김 과장에게 기획안을 빼앗겼던 일,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고 진지하게 퇴사를 결심했던 순간까지.
마침내, 어렵사리 이 자리까지 왔다. 이제는 계약직이 아닌 정직원이다.
유성수가 고개를 숙였다.
사원증을 쥔 손끝이 덜덜 떨리고, 어깨가 들썩였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7화가 끝이 났다.
* * *
『빌딩 숲』은 7화에서 시청률 35.2%를 기록, 35%를 돌파해 40%를 정조준하게 됐다.
문자 그대로 가파른 상승세였다.
7화의 방영 이후.
마지막 신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후기가 시청자 게시판에 줄지어 올라왔다. 언론에서도 안시현의 연기력에 대해 간만에 극찬을 쏟아 냈다.
7화의 마지막 신에서, 최창국 PD는 유성수가 눈물을 흘리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마등처럼 보여 주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감정이 복받쳤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안시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촬영했지만, 고민 끝에 최종 편집본에서는 빠지게 됐다.
때로는 절제된 감정이 폭발적인 감정 표현보다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김 과장에게 기획안을 뺏긴 후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여 줬던 2화와 대조되는 그림을 노리기도 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안시현이 절제된 감정 표현을 잘해 줬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실제로 시청자 후기에는 연출에 대한 이야기보다 안시현의 절제된 감정 표현을 보고 감동받았다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
간만에 안시현의 존재감이 제대로 폭발한 것이다.
‘간만에 이슈가 된 걸 보면, 확실히 『너와 나의 시간』 때에 비해 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 좋은 현상이야.’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을 끝마치고 긴 휴식기를 가지며, 안시현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너와 나의 시간』에서는 자신이 너무 돋보이려 했다고, 정영빈의 비중이 높아서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라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실제로 『너와 나의 시간』을 방영할 당시에는 안시현의 연기력을 극찬하는 기사가 넘쳐났다. 이는 곧 『너와 나의 시간』의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빌딩 숲』은 그러해서는 안 되는 드라마다.
특정 배역을 맡은 배우보다는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에피소드들이 주목받아야 한다. 에피소드가 아닌 배우가 주목받는다면 방향성이 어긋난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서 연기 변신을 시도한 것이기도 했다.
메소드 연기를 통해 배역에 완전에 몰입하기보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성수라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쪽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빌딩 숲』의 시청 후기를 보면 안시현, 혹은 김진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적었다. 그보다는 연출력과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이 더 집중됐다.
안시현이 촬영 대기 시간 동안 『빌딩 숲』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을 때, 박정상이 차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채 촬영과 관련된 내용을 전달했다.
“시현아, 촬영 장소 섭외됐단다. 1시간 후에 바로 촬영 들어갈 수 있냐고 하는데?”
“저야 언제든 스탠바이죠.”
“그래. PD님께는 그렇게 전달하마.”
간만의 야외 촬영을 앞둔 상황.
보나마나 팬들이 엄청나게 몰려들 거고, 안시현은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팬들의 사인 요청에 응대할 생각이었다.
간만에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겠지만…….
안시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보다는 『빌딩 숲』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대중들의 공감을 자아내야 한다는 데에 여전히 공감하고 있었다.
야외 촬영 현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안시현은 휴식 기에 최정수로부터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주연은 나 혼자 돋보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배역 중 가장 대사가 많은 배역일 뿐이야. 명심해. 혼자서 돋보이고 싶어 하는 배우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 * *
8화를 기점으로 『빌딩 숲』이 반환점을 돌았다.
8화의 시청률은 38.2%로, 종영까지 8화를 남겨 둔 시점에서 40% 달성은 사실상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중요한 건 50%인데…….
과연 2001년에 16부작 드라마가 시청률 넘을 수 있을지를 놓고서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50%를 기록한 드라마는 2010년에 나오지만, 20부작 이하로 기준점을 잡으면 2005년을 끝으로 실종된다.
2005년 당시.
해당 드라마의 방영 시간이 되면 길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본 방송을 챙겨 봤다. 관련 상품과 OST의 인기는 엄청났고, 온갖 예능 프로그램에서 명대사를 패러디하곤 했다.
문자 그대로 신드롬이었다.
안시현은 2005년 한 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의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직장인들 사이에서 『빌딩 숲』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빌딩 숲』의 방영 이후 노동조합이 생기는 회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빌딩 숲에서의 명대사와 명장면을 패러디하는 예능 프로그램 또한 하나둘씩 생겨났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대놓고 패러디를 한 건 보너스였다.
OST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건 두말하면 입 아팠다.
덕분에 김진석 대표는 살맛이 났다.
『빌딩 숲』의 주연 배우는 JM액터스 소속인 안시현과 김진모다. 거기에 MBS에서 퇴사 후 입사하기로 한 최창국 PD가 연출을 맡았다.
『빌딩 숲』의 대박은 곧 JM액터스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나 김진석 대표를 기쁘게 한 건…….
‘최창국 PD를 영입하면 우리 배우들을 데리고 자체적으로 콘텐츠 생산이 가능해져. 지금처럼 눈치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방송사들이 우리가 제작한 콘텐츠를 구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만들어 주겠어.’
최창국 PD의 영입에 성공했다는 거다.
무려 8번이나 러브콜을 보내 끝에 이뤄 낸 성과였다.
최창국 PD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며 영입이 성사된 것이었지만, 과정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결과적으로 영입에 성공했으면 된 거지.
‘아들 녀석과 아들과도 같은 녀석이 군대에서 열심히 삽질하고 있는 동안, 콘텐츠 생산 시스템을 완전히 정립해 놔야겠어. 그래야 녀석들이 제대한 뒤에 제대로 판을 키울 수 있지 않겠어?’
김진석 대표는 하루빨리 최창국 PD가 퇴사를 하는 날이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정직원이 된 유성수는 자신이 앞으로 꽃길을 걷을 거라고 확신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고,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하고, 퇴근 후에는 자기 개발을 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가 있나.
야근은 밥 먹듯이 하고, 그놈의 회식이랑 접대는 뭐 이렇게 많은지 알 수 없고, 어떻게 하면 자사 상품들의 매출을 조금이라도 더 올릴 수 있을지 기획안을 작성하고 때론 직접 영업도 나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계약직과 정직원의 차이점은 하루살이인지 아닌지와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 액수의 차이, 딱 그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품제과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다.
일품제과의 몇몇 제품 수출 건을 놓고 해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잡히게 된 것이다.
이에 최하민 사장은 모든 직원들을 불러 모은다.
“이번 미팅은, 제가 직접 참여합니다.”
이내 드물게 자신이 미팅에 직접 참여할 것임을 선언하고서, 미팅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 인원 두 명을 호명하기에 이른다.
“안필석 차장, 미팅 관련 자료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최민 사원도 참여합니다. 혹시 최민 사원보다 스페인어 잘하는 사람 있나요? 통역을 거치지 않고, 바이어들의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대처할 수 있는 사원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최하민 사장의 직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안필석 차장은 직접적으로 미팅을 준비하고, 최민은 통역을 거치지 않고 바이어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4개 국어 능력자이기에 선별이 됐다.
“미팅 3일 남았습니다. 모두 안필석 차장 서포트해서 미팅 자료 준비하도록 합니다. 이번 해외 수출 건에 일품제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아, 안 차장과 최 사원은 미팅에 함께 참여하고 싶은 직원 한 명씩 선별해서 내게 직접 보고하세요.”
안필석 차장은 자신의 오른팔인 하진욱 대리를 미팅에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최민은…….
“유성수 씨, 저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유성수를 선택한다.
워낙 큰 미팅이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유성수의 두 눈이 커졌다.
“저를 데려가겠다고요?”
“스페인어 할 줄 안다면서요?”
“학교 다닐 때 조금 배운 정도예요. 어려운 단어는 알아듣지도 못한다고요.”
“분위기 정도만 파악할 수 있으면 됩니다. 제게 필요한 건 유성수 씨의 다른 능력들이거든요.”
최민이 유성수에게 바라는 건 크게 세 가지였다.
바이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마케팅 기획안 작성에 도움을 주는 것,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미팅 자리에서 적절하게 분위기를 띄워 주는 것, 마지막으로…….
“지난번에는 서로 경쟁했지만, 이번에는 힘을 한 번 합쳐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튼튼한 간이었다.
유성수에게 손을 내미는 최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12화가 마무리됐다.
* * *
『빌딩 숲』의 방영 이후 언론들은 야근 기피 현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노사 간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중들의 인식 변화를 법의 변화가 따라오질 못했다.
그래도 유의미한 성과는 있었다.
몇몇 대기업에서 노조가 설립되며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에 힘쓰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분위기에 고용주들이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일련의 일들이 쌓이고 쌓여『빌딩 숲』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심지어는.
“빌딩 머시기인지 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난리를 치는지 어디 한번 봐 보자고!”
야근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한 중견 기업의 대표가 잔뜩 화가 나서는 『빌딩 숲』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겠다며 나섰고.
“……뭐야. 벌써 1시간이 다 지나갔다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푹 빠져서 재방송까지 모두 챙겨 본 뒤, 본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정시 퇴근을 명령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빌딩 숲』의 인기는 비단 직장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IMF 사태로부터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수많은 가장들이 회사를 떠나는 아픔을 맛봐야 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야기됐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은 『빌딩 숲』을 보면서 공감하고 여러 감정을 느꼈다.
『빌딩 숲』이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노사 간의 문제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며,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은 상황.
덕분에…….
마지막 신에서 유성수와 최민이 합심할 것이라는 걸 예고한 12화는, 무려 50.4%를 기록하면서 결국에는 50% 고지를 넘어났다.
종영까지 남은 건 단 4화.
2001년 MBS 연기대상까지 정확히 열흘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