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9화>
79화. 싹쓸이 갑시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요 시청자층인 40대 이상을 공략하는 드라마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20대와 30대 시청자들도 어느 정도 고려하는 드라마들이 제법 나오고 있었다.
20대 여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공략한 『너와 나의 시간』과 20대와 30대 직장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빌딩 숲』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그렇다고 주요 시청자층을 무시한 것도 아니다.
『빌딩 숲』의 경우 전 연령대의 직장인들, 나아가서는 이미 퇴직을 한 장년층도 많은 공감을 하며 시청을 하고 있었으니까.
로맨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표현하고 공감을 자아낸 드라마.
겉으로만 보면 이례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성공 사례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본,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 준비한 작품이니까.
그 결과가 종영까지 4화를 남겨 둔 시점에서 시청률 50% 돌파라는 성과였다.
시청률 50% 돌파한 이후.
“제발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 주세요. 폭설 내린다니까 집에 있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폭설이나 한파, 둘 중 하나라도 내려 주세요. 둘 다도 좋습니다.”
『빌딩 숲』 촬영장에서는 휴식 시간 때마다 무언가를 비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가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비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설레발치지 않고서 묵묵하게 촬영과 연출에만 힘썼던 최창국 PD마저도…….
“아, 인터뷰 한 번 더 할까요? 저녁에 데이트 못하게 만들 만한 스포일러가 뭐 있을까요?”
제작진과 배우들의 호들갑에 동참했다.
『빌딩 숲』의 촬영 현장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때문이었다.
보통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 방영하는 드라마는 이전 회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하락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아무래도 젊은 시청자들이 집 밖으로 나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녁 드라마에서 젊은 시청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로 적은 건 결코 아니니까.
시청률 50%를 돌파했다고는 하나, 남은 4화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려면 한 사람의 시청자도 아쉬운 판국이었다.
하지만…….
『빌딩 숲』제작진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빌딩 숲』 14화, 시청률 53.2% 기록!
-유성수의 맹활약, 시청자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다!
-2화 남은 『빌딩 숲』, 유종의 미 거둘까?
-군계일학『빌딩 숲』, 연기대상 시상식 싹쓸이?
13화에서 타 제과업체의 견제와 음모로 인해 해외 수출 미팅이 좋지 않게 마무리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신제품과 관련된 루머로 일품제과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14화에서는 유성수가 해외 바이어를 다시 만나서 수출 건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바탕으로 바이어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에 14화의 마지막 신은.
“유성수 사원이 아니었다면 해외 수출 계약 건은 무산됐을 겁니다. 원하는 보상이 있으면 말해 봐요. 승진? 보너스?”
“저는…….”
유성수가 원하는 보상을 말하려던 순간에 끝이 났다. 어떤 보상을 원하는지는 예고편에서도 끝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다음 화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드는 최창국 PD의 전매특허 연출이었다.
13화에서는 수출 계약 실패 위기로 인해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14화에서는 유성수가 해외 수출 계약을 극적으로 성사시키며 짜릿함을 선사해 줬다.
거기에 유성수가 받을 보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자아내며 15화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건 보너스였다.
이는 곧 시청률로 이어졌다.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
외부 요소는 『빌딩 숲』의 상승세를 막지 못했다.
13화에서는 52.2%, 14화에서는 53.2%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 나간 것이다.
남은 회차는 단 2화.
대중들은 『빌딩 숲』의 최고 시청률이 55%를 넘을 것인지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며칠 후에 있을 연기대상에서 『빌딩 숲』과 출연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상을 받을 것인지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됐다.
MBS 연기대상 시상식을 이틀 앞둔 2001년 12월 28일 금요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이제 연기대상과 종방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겠네요!”
“연기대상 싹쓸이 갑시다!”
『빌딩 숲』의 모든 촬영이 마무리됐다.
촬영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회식이 진행됐다.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 때와 마찬가지로 일회용 카메라를 사 왔다. 종영 기념으로 제작진과 배우들과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일회용 카메라 2개 분량의 사진을 찍은 뒤.
안시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진은 내일 바로 인화 맡겨서 종방연 때 드릴게요. 아, 그리고 내일 기사 하나가 뜰 거예요.”
“기사? 무슨 기사?”
“에이. 그걸 미리 말해 주면 재미없죠. 내일 보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다음 날.
-[단독] JM액터스 ‘안시현과 김진모의 차기작은 당분간 없다, 2002년 중 입대 예정’.
JM액터스는 안시현과 김진모가 2002년에 입대할 것이라는 보도 자료를 돌렸다.
* * *
안시현과 김진모는 입대 사실을 언제 알릴 것인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일단 『빌딩 숲』의 촬영 중에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괜히 말했다가 촬영 분위기를 망칠까 봐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빌딩 숲』의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후에 말하느냐, 아니면 바로 말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그냥 빨리 말하고 차분하게 준비하자. 너나 나나 입대 전에 푹 쉬면서 팬들 한 번 더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
“음. 역시 그게 좋겠지?”
『빌딩 숲』의 촬영이 종료된 직후 발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보도 자료가 나간 이후.
안시현은 팬클럽 카페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요약하자면 항상 응원해 주시는 팬 여러분 덕분에 힘이 난다, 입대 전에 팬미팅 한 번 할 예정이다, 건강하게 복무 잘하고 올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정도였다.
이후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연락이 쏟아졌다. 대부분 입대 전에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었다.
그리고 그 연락 중에는 차연우도 있었다.
-시현아. 기사 봤는데, 너 내년에 입대한다며?
“5월 중에 가게 됐어요. 촬영 분위기에 영향 끼칠까 봐 비밀로 하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그래도 좀 서운하네. 기사보다는 먼저 알기를 바랐는데 말이야.
“아하하…… 미안해요, 누나. 군대 가기 전에 한턱 쏠 테니까 기분 풀어요.”
-그래? 그럼 말 나온 김에 1월 중순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 드라마 첫 방영 하고 나면 숨 좀 돌릴 거 같으니까.
“네. 날짜랑 장소, 문자메시지로 보내 줘요.”
차연우와의 통화를 끝낸 뒤.
안시현은 1년 전을 떠올렸다. 배우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며 촬영에 모든 걸 쏟아 냈던 그때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너와 나의 시간』 가족들을 못 본 지도 제법 됐네. 아버지는 『빌딩 숲』 촬영 직전에 찾아뵀었지만…… 입대 전에 한번 만나는 게 좋겠지?’
간만에 동고동락했던 배우들이 보고 싶어졌다.
입대 전 할 일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 *
2001년 12월 29일 토요일 오전.
MBS는 연기대상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새로 신설된 수상 부문을 포함, 도합 15개 부문의 후보를 발표했다.
『빌딩 숲』은 올해의 작품상, 인기상, 신인상, 우수상, 최우수상, 대상, 올해의 PD상까지, 도합 7개 부문에서 후보를 배출하며 다시 한번 인기를 증명해 보였다.
이에 대중들은 『빌딩 숲』이 과연 7개 부문에서 모두 수상을 할 것인지를 두고 호기심을 품었다.
일단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수준을 넘어 7개 부문 모두에서 수상을 못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MBS뿐만 아니라 2001년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빌딩 숲』처럼 화제가 된 드라마는 찾기 힘들었으니까.
언론뿐만 아니라 『빌딩 숲』의 제작진과 배우들 또한 내심 7개 부문 모두에서 수상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를 만났다.
“촬영 끝났으니 밥 한 끼 하자. 입대 전 스케줄에 대해서 할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한정식집.
지겹도록 자주 왔지만, 매번 올 때마다 맛에 감탄하는 식당에서 안시현과 김진석 대표가 만났다.
“대상, 받을 수 있을 거 같냐?”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데…… 어떤 상이 됐건 하나는 받지 않겠어요? 그래도 이왕이면 가장 큰 걸 받고 싶긴 하네요.”
“하하하. 그래, 이왕이면 제일 큰 게 좋긴 하지. 개인적으로 진모는 『빌딩 숲』 전에 촬영한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기대해 봐도 될 것 같더구나. 2월에 추가 촬영을 할 거라던데, 각본이 아주 괜찮아.”
“저는 연기대상을 받고, 진모가 남우주연상을 받으면 정말 최고겠는데요?”
“그럼 난 너희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일단 이야기의 시작은 연기대상 관련이었다. 그 외에도 연말에 있었던 몇몇 이슈들에 대해서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끝난 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김진석 대표가 본론을 꺼냈다.
“미뤄 뒀던 외부 일정 소화랑 팬 미팅 말고는 아직 생각해 둔 계획 없지?”
“하나 있어요. 고향에 2주 정도 내려가 있는 정도?”
“고향 가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없으면…… 흐음. 이 계획 진행해도 될 것 같네.”
“어떤 계획이요?”
“NHK에서 널 초대하고 싶다더라. 『빌딩 숲』을 방영하기 전에 단독 팬미팅을 열어 줄 테니, 제발 널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너와 나의 시간』이 일본에서 제법 인기를 끈 건 사실이다. NHK에서의 두 번째 방송에서도 평균 시청률 6.8%를 기록하면서 선전했으니까.
그렇다고 설마 NHK에서 단독 팬미팅을 주최해 주겠다고 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안시현이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NHK의 이레적인 제안이 나온 배경을 짐작하게 됐다.
“『빌딩 숲』이 일본의 주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거군요.”
“일본이라고 회사 내의 부조리가 없는 게 아니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보다 심한 부분도 많고, 주 시청자 층의 공감을 충분히 살 거라는 게 NHK의 판단이야.”
“그래서 방영 전에 팬미팅 한번 열어서 분위기 좀 화끈하게 띄워 달라는 거고요?”
“『너와 나의 시간』으로 화제성을 끌어모았으니, 네가 직접 와 주는 게 가장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거지. 어떻게 할래?”
김진석은 안시현에게 선택지를 넘겼다.
안시현이 원하면 일본 방문 스케줄을 잡는 거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놔둘 생각이었다.
안시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스케줄 잡아 주세요.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 오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알아서 팬미팅을 주최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팬이니, 만남의 시간이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현 사마가 될지, 시현 상이 될지 한번 봐 보자고.’
일본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다.
제대 이후의 미래까지 감안한 결정이었다.
다음 날.
-[단독] 안시현, 일본 내 단독 팬미팅 개최 확정.
-NHK 방송사, 안시현을 초대하다.
-안시현 ‘좋은 기회 준 방송사에 감사’.
JM액터스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를 통해 안시현이 일본에서 팬미팅을 개최할 거란 소식이 알려졌으며…….
“MBS 연기대상에 시상식에 참여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과 팬 여러분, 그리고 TV를 보고 계시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MC 신정엽 인사드립니다!”
예정대로 MBS 연기대상 시상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