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1화 (8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1화>

81화. 비슷해졌네?

“오오오! 대상이야, 대상!”

“축하한다, 시현아!”

“짜식, 군 입대를 앞두고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됐네.”

『빌딩 숲』에 출연한 배우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안시현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주위의 축하를 받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넘쳐나는 꽃다발을 건네받고 한쪽에 내려놓은 뒤에, 준비해 온 소감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9월부터 동고동락한 『빌딩 숲』의 제작진과 배우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상은, 여러분과 함께했기에 받을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20년 하고도 3년.

연기대상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회귀 전 『위장취업』의 흥행을 바탕으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음에도, 연기대상은 안시현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회귀 후 이뤄 낸 가장 뚜렷한 성과다.

연기대상과 남우주연상.

회귀 후 1차적으로 바랐던 목표 중 하나를 달성했다. 꿈에 그리던 연기대상을 마침내 손아귀에 쥐게 됐다.

그럼에도 안시현이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한 건…….

“국민배우가 되는 그날까지, 제 모든 걸 다 바쳐 연기하는 배우 안시현이 되겠습니다.”

연기대상 수상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   *   *

연기대상 수상 후 보름 동안 안시현의 스케줄은 꽤나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일단 당장 2001년의 마지막 날과 2002년의 첫날에 각각 『빌딩 숲』의 15화와 최종화가 방영될 예정이었다. 최종화의 방영일에는 종방연이 함께 진행될 예정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빌딩 숲』은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최종화의 마지막 배경은 유성수가 일품제과의 신입사원 면접을 보던 때로부터 3년 후였다.

해외 수출 계약의 보상으로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유성수는, 이후에도 꾸준히 능력을 인정받으며 마케팅팀의 핵심 인력이 됐다.

최민은 지난 3년 동안 묵묵히 사내 업무를 배우며 직원들의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됐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직원들에게 항상 존대를 하고 예의를 갖췄다. 특히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유성수와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찰떡궁합을 보여 줬고, 새로운 해외 수출 프로젝트를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으로 마지막 등장을 끝맺었다.

안필석은 부장으로, 하민욱은 과장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 모두 마케팅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력으로 내부 평가가 매우 좋았다.

『빌딩 숲』의 마지막은 신입 사원 면접이 있는 날, 유성수가 잔뜩 긴장한 채 대기하는 면접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3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너와 나의 시간』때와 달리 대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빌딩 숲』, 유성수의 성공과 함께 유종의 미 거둬.

-울고, 웃고, 분노하며 공감했던 8주의 시간.

-『빌딩 숲』,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다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명품 드라마.

-로맨스는 없었지만, 감동은 있었다.

깔끔한 엔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많았다.

직장 생활을 하며 일어나는 각종 부조리와 관행들을 직시하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고, 최종적으로는 그 모든 것들을 이겨 내고서 능력을 인정받은 유성수의 모습이 대리만족을 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빌딩 숲』15화에서 55.9%, 최종화에서는 무려 57.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빌딩 숲』의 종영 이후.

“오늘 광고 하나에 인터뷰 세 개 있고, 내일은 광고 하나에 인터뷰 둘에 화보 둘이야.”

“와…… 빡빡하네요?”

“빨리 치워 버리고 입대 전에 푹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대표님이 그러시더라고.”

“동의해요. 나눠서 처리하느니 한 번에 처리하는 쪽이 더 편하죠. 일본 팬미팅이랑 국내 팬미팅 정도 말고는 1월 말 이후에 스케줄 없었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라. 최대한 빨리 다 끝낼 테니까. 그나저나…… 너 없는 동안 나랑 봉팔이는 뭐하면서 사냐.”

“새 배우 담당 맡으셔야죠?”

“일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대표님이 한 명만 고르라더라. 2년 동안 숨 돌린다 생각하래.”

“1명이면 진짜 숨 돌릴 수 있겠네요.”

안시현은 한동안 미뤄 뒀던 광고 및 인터뷰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1월 말까지 최대한 많은 스케줄을 소화한 뒤, 2월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몇몇 스케줄만을 소화하며 입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스케줄을 소화하고 3일째 되던 날.

박정상과 최봉팔이, 안시현과 김진모의 복무 기간 동안 우정태를 담당하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보너스였다.

보름 동안의 스케줄 중 하나는, 바로 MBS 예능국과의 토크쇼 출연 관련 미팅이었다.

“전화로 콘셉트 설명을 드렸던 최재한 PD입니다. 미팅에 흔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대 전에 예능에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아, 물론 제 특집으로 한 회차를 구성할 거라는 말에 마음이 혹한 것도 있습니다.”

“몇몇 배우분들이 출연할 거지만, 기본적으로 안시현 배우님의 특집이 맞습니다. 두 작품 연속으로 최고 시청률 55%를 넘긴 드라마의 주연 배우의 특집 토크쇼,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안시현 배우님은 예능 출연 경험이 단 한 번뿐이기도 하고요.”

“아하하. 작년에는 출연해서 말도 거의 안 했죠. 제가 예능 출연은 좀 어색해서요.”

회귀 전, 안시현은 몇 차례의 예능 출연 경험이 있다.

다만 예능 출연 자체가 워낙 어색하다 보니 연기할 때와 달리 낯을 가리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줬고,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반전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며 나름대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MBS 예능국에서는 안시현의 특집 토크쇼를 기획했다는 건데…….

필연적으로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시현은 혹여나 자신의 예능 낯가림 때문에 방송이 재미없어질까 봐 내심 걱정이 됐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전에 질문 리스트를 미리 전달해 드릴 거고, 최대한 편안한 환경에서 진행될 테니까요. 촬영이 아니라 배우 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신다고 생각해 주세요.”

“으음. 노력해 볼게요.”

“녹화는 이달 둘째 주에 하고, 마지막 주나 2월 초에 방영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 다른 배우 분들은 안시현 배우님 특집 방송이라면 스케줄 빼서라도 출연하시겠다고 모두 OK하셨습니다.”

“제가 들은 건 진모랑 최정수 선배님이랑 송강식 선배님이었는데, 혹시 더 있나요?”

“손해수 배우님과 진광욱 배우님도 출연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두 분은 스케줄 때문에 사전 촬영으로 대신하기로 하셨습니다.”

안시현, 김진모, 최정수, 송강식, 거기에 사전 촬영이지만 손해수와 진광욱까지 출연한다. 최정수를 제외하면 모두 안시현과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들이다.

문득.

출연 배우 리스트를 들은 안시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거, 지금 당장도 화제가 되겠지만, 훗날 명품 배우 특집으로 엄청 화제가 되겠는데? 이 조합을 예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자신의 특집 토크쇼가, 훗날 명품 배우 특집 토크쇼로 화제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안시현 때문에 흔쾌히 출연하기로 한 배우 중 몇 명은,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얼굴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한 이들이었으니까.

*   *   *

2002년 1월 14일.

『빌딩 숲』으로 인해 월화드라마에서 8주 동안 고난의 시간을 겪어야 했던 KNC가, 예고편부터 작정하고 준비한 티를 낸 드라마 『눈의 노래』가 첫 방송을 탔다.

『눈의 노래』는 전형적인 클리셰와 막장 요소를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방영 당시 동시간대 시청률 1위와 최고 시청률 35%대를 기록하며 제법 인기를 끈 드라마다.

하지만.

『눈의 노래』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게 된 건, 역시나 일본에서의 엄청난 성공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게 맞다.

『너와 나의 시간』이 일본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뒀고 『빌딩 숲』의 방영이 1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될 예정이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눈의 노래』는 일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눈의 노래』는 일본 기혼 여성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며 신드롬을 일으키는 드라마이니까.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의 수출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면 모를까, 부정적인 방향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봤다.

게다가…….

‘회귀 전에 비해 연우 누나의 연기력이 일취월장한 것도 영향을 끼칠 거야.’

스타성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더러 받던 차연우가, 『너와 나의 시간』을 기점으로 연기력이 발전한 것 또한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고 봤다.

주연 배우가 연기력이 좋아져서 나쁠 게 뭐 있겠는가.

이에 안시현은 기대감을 가지고 『눈의 노래』의 첫 회차 본방송을 시청했다.

그리고…….

“비슷해졌네?”

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눈의 노래』 첫 방송에서 보여 준 차연우의 연기력은, 『너와 나의 시간』의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가 있었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본 2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연우의 연기력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 있었다. 『너와 나의 시간』에서 보여 준 눈부신 연기력 발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발음이 좋아졌다는 것 정도?

『너와 나의 시간』 방영 당시 대중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감정 표현이, 『눈의 노래』에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뭐지…… 연우 누나 연기력 분명 좋아졌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   *   *

차연우의 연기력과 별개로, 『눈의 노래』는 1화와 2화에서 각각 15.1%와 17.2%의 시청률로 기대 이상의 괜찮은 시청률 기록했다.

차연우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 또한 생각만큼 거세지는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안수진을 연기할 때에 비해 부족한 거지, 주연 배우로서 자격이 없는 수준의 연기력이라고는 보기 힘들었으니까.

다만 안시현과 마찬가지로 보다 높은 수준의 연기력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 주긴 했다.

그래도 뭐…….

회귀 전보다 조금 더 좋은 시청률로 시작했으니, 좋은 성적으로 방영을 마무리하고 일본에 진출해서 초대박이 나는 데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2화의 방영 다음 날.

-시현아, 『눈의 노래』 봤어?

“그럼요. 누나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인데 당연히 모니터링해야죠.”

-…… 어땠어?

“재밌게 봤어요. 최고 시청률 30%는 가뿐하게 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실제로 시청률로 괜찮게 나왔던데요?

-정말? 후우. 다행이다. 나 너무 긴장돼서 기사고 뭐고 아예 확인 안 하고 있었거든. 안수진을 연기할 때와 달리 몰입이 잘 안 돼서 걱정하기도 했고 말이야.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아, 우리 내일 저녁에 보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지?

“네. 레스토랑 예약해 놨다면서요.”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데, 시간대별로 한 팀만 예약을 받아 운영하는 곳이라 편하게 식사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좀 비싸겠는데요?”

-그 대신 편하게 식사할 수 있잖아. 아무튼 내일 봐. 오랜만에 얼굴 볼 생각하니까 기대되네.

차연우와의 통화를 끝낸 뒤.

안시현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며 발전했던 연기력이 다시 퇴보했고, 스스로 몰입이 잘 안 된다 인정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차연우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몇몇 일들을 떠올리며…….

안시현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다만 결론을 내자마자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결론이었기에 확신을 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안수진이 유독 차연우와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몰입이 잘 됐을 수도 있는데, 괜히 자신이 확대 해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차연우의 입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차연우와 만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안시현이 간만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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