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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2화 (8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2화>

82화. 커피 한잔할래요?

『눈의 노래』 2화 방영 다음 날 저녁.

안시현은 차연우가 알려 준 레스토랑에 먼저 도착했다.

혹시 몰라 주차장에 들어온 이후 뒤따라오는 기자가 없는지 무려 30분 동안 기다리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에이. 선배는 무슨. 저 연기 안 한 지 한참 됐잖아요. 편하게 생각해요, 편하게.”

레스토랑은 차연우의 학교 선배이자,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한 배우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하이틴 스타 출신이었던 아내와 연애하며 불편했던 점이 너무 많아, 연예인들이 편하게 데이트 할 장소가 하나쯤 있었으면 싶어 자신의 소유 건물 4층에서 직접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나 뭐라나.

“연우는 언제 온다고 하던가요?”

“차가 막혀 30분 정도 더 걸리신다고 하네요.”

“마실 거라도 한잔 줄까요? 제가 요즘 서비스 차원에서 칵테일 연습하고 있는데, 생각 있어요?”

“논알코올도 가능하다면…… 부탁드릴게요.”

“기다려 봐요.”

전 배우이자, 현 레스토랑 사장인 사내는 즉석에서 칵테일 쇼를 보여 줬다.

논알코올 칵테일 한 잔을 건네받은 안시현이, 한 모금을 마시고서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요. 잘 마실게요. 아 참, 혹시 저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나요? 선배님이 출연하신 작품 엄청 재밌게 봤었거든요.”

“입장이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사인은 제가 해 주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저도 해 드리면 되죠. 선배님이 원하시면 몇 십 장이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원…… 민망하네요. 퇴물 배우가 연기대상 수상자에게 사인을 해 줬다고 하면 주위에서 욕해요.”

“선배님도 연기대상 수상하셨잖습니까.”

“저야 뭐 어부지리였죠. 그 해에 워낙 흉작이 많았거든요. 전년도만 하더라도 다들 50% 중반에 60% 찍었는데, 유독 그 해에만 죄다 죽 쒀서 50% 겨우 돌파했는데도 받은 거예요.”

안시현은 90년대를 주름잡았던 선배 배우와 연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꽃피웠다. 배우가 아닌 한 명의 팬으로서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을 좋아했기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그 시간들을 즐겼다.

약 30여 분 뒤.

차연우가 레스토랑에 들어오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이제 전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간만에 연기와 관련된 대화 재밌었어요, 후배님. 식사는 어떻게?”

“A코스로 해 주세요.”

“비싼 거 시켜 줘서 감사합니다, 후배님들.”

차연우가 패딩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안시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늦어서 미안해. 차가 너무 많이 막히더라고.”

“퇴근 시간이니 그럴 만도 하죠. 아, 음식 맛있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기대되네요.”

“전에 나래 씨랑 몇 번 왔는데 진짜 맛있어.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을 거야.”

안시현과 차연우가 자리에 앉아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나눴다. 통화나 문자메시지를 더러 했지만 만나는 건 간만이었기에 할 이야기가 꽤나 많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코스 요리가 하나둘씩 나오며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가 나온 뒤, 레스토랑 사장은 논알코올 칵테일 한 잔을 더 가져다주며 말했다.

“자, 그럼 나는 당구 몇 게임 치고 있을 테니 식사 다하고 연락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식사하면 돼. 이따가 봐.”

레스토랑 사장이 떠난 뒤.

식사를 하며 차연우가 안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입대 5월 달이라고 했던가?”

“네. 5월 첫째 주에 입대할 것 같아요. 진모랑 같은 날 입대하기로 했어요. 다른 날 입대할까도 고민해 봤지만, 같은 부대로 갈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입대하기로 했어요. 훈련소에서라도 같이 있으려고요.”

“2년이면…… 고생 많겠네.”

“다 가는 군대인걸요, 뭐.”

차연우의 걱정과 달리 안시현은 비교적 무덤덤하게 입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미 반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군 입대는 피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는 늦추는 것만 가능하지 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피하지 못한다면 2년 동안 제법 긴 휴식기를 가지고 온다 생각하자, 쉬다가 돌아오면 연기가 한층 성숙되는 계기가 될 거라고 믿자.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입대를 두 번 해야 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았다.

“편지 써 줄까?”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시간 맞으면 면회도 갈까 싶은데…….”

“괜찮아요. 저 부모님한테도 면회 안 와도 된다고 했어요. 포상 받아서 휴가 자주 나오면 되는데, 왜 굳이 바쁜 시간 내서 면회를 오냐고 그랬거든요.”

“너무 덤덤한 거 아냐? 다들 군대 가면 면회 좀 와 달라고 난리던데 말이야.”

“모르죠. 막상 가면 너무 힘들어서 면회 좀 와 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될 수도 있고요.”

군 입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한동안 레스토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차연우는 계속해서 안시현의 눈치를 살폈고, 안시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채 식사를 이어 나갔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테이블 밑으로 양손을 꽉 움켜쥔 차연우가 마침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 빙빙 돌리는 건 역시 내 스타일이랑 안 맞아. 후우. 그냥 대놓고 말할게. 시현아, 나 너 좋아해. 누나 동생 사이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넌…… 어때?”

용기를 냈음에도,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 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말끝이 흐려졌다. 할 말을 다 하고 나서는 고개를 푹 숙이기까지 했다.

안시현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드러낸 차연우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속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전조는 있었다.

『너와 나의 시간』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유독 안시현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대접했고, 데뷔 때부터 잘만 다니고 있던 미용실을 안시현이 다니는 곳으로 옮겼다.

또한 『너와 나의 시간』의 방영이 끝난 이후에도 꽤나 자주 연락하며 유독 안시현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 줬으며, 바빠서 연애도 못 하고 어떻게 하냐며 안시현을 떠본 적도 몇 번 있다.

거기다 『너와 나의 시간』과 『눈의 노래』에서 보여 주는 감정 신에서의 연기력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만약 『너와 나의 시간』에서 보여 준 안수진의 감정 표현이 연기가 아니었다면? 귓불까지 빨개지며 부끄러워했던 그 모습들이 진짜였다면?

차연우가 보여 준 행동들을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눈의 노래』 첫 방영 이후, 안시현은 추측을 했지만 확신하지 않았다. 차연우가 직접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끝까지 모른 척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추측은 결국 차연우의 고백으로 인해 확신이 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던 안시현은…….

용기를 낸 차연우를 위해서라도 돌려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안해요, 누나. 그 마음, 못 받아줄 것 같아요.”

안시현의 선택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고개를 든 차연우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태라는 게 확연히 티가 났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저랑 성격이 잘 맞는다고도 생각해요. 다만…… 입대 전에,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차연우의 마음에 대해 추측을 하게 된 이후로 안시현은 잠조차 제대로 못 잔 채로 고민했다.

만약 차연우가 고백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백을 받아 줘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를 놓고서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차연우의 고백을 받아 줄 수가 없다는 걸, 자신의 마음은 차연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차연우를 포함한 그 어떤 여성과 사귀는 생각을 해도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성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연애세포 같은 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30대 중반의 마지막 연애를 끝으로 이성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접어 두었다. 오로지 연기만을 보고 달리며 배우로서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연애세포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저 마음을 흔드는 사람이 없어 반응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안시현의 진심을 확인한 차연우는 애써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울컥하는 감정을 숨겼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네.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네 진심을 듣고 감동했으면 좋겠다. 잘되기를 바랄게.”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네요.”

*   *   *

차연우가 안시현에게 호감을 품은 건 『너와 나의 시간』의 첫 촬영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점부터였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입장이다 보니 함께 촬영하는 신이 많았고, 그때마다 안시현은 차연우를 배려했다.

또한 안시현은 매 순간 놀라운 연기력으로 최선을 결과물을 만들어 냈고, 촬영장에서 좀처럼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열정까지 보여 줬다.

차연우는 그런 안시현을 동경했다.

동경은 어느 순간 호감으로 발전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안시현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덕분에 안수진을 연기하며 눈에 띄게 발전함 감정 연기로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 드러난 것이었지만, 적어도 촬영장 내에서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촬영 중에 친해진 한나래가 유일했다.

차연우는 처음에는 속마음을 티내려고 했다.

안시현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굳이 다른 배우들과 함께 본방송을 시청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잘 다니던 미용실을 바꾸었으며, 그 외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내면서 안시현에게 자주 연락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괜히 혼자서 티를 내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안시현에게 피해가 갈 테니까, 당분간은 이대로 좋은 누나 동생 사이로 남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봤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입대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기사를 보자마자 그녀는 안시현에게 진심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여라는 공백이 그녀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말았다.

설마 거절을 당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후회하니, 속 시원하게 고백을 하고 털어 내는 게 나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

막상 거절당하고 나니 감정이 복받쳤다.

안시현의 앞에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차에 타자마자 억지로 참고 있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차연우가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후유증이 제법 오래갈 것 같았다.

*   *   *

차연우는 먼저 레스토랑을 떠났다.

만에 하나라도 같이 나갔다가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혔다가는 스캔들이 터질 게 뻔하니까.

안시현은 꼬박 1시간 후에 나가기로 했다.

당구를 치다 온 레스토랑 사장이 식사를 끝낸 식기들을 설거지하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안시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연락해 볼까? 아니면 내일? 아니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

번호를 눌렀다 삭제하길 수 차례 반복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손을 뗀 것만 해도 스무 번이 넘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였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안시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길 20여 초.

-여보세요.

휴대폰을 통해 안시현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많이 바빠요?”

-샌드위치로 대충 끼니 때우고 마케팅 기획안 검토하다가,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에요. 시현 씨는요?

“전 이제 막 식사 끝났어요. 혹시, 저녁에 시간되면 잠깐 커피 한잔할래요? 와인도 괜찮아요.”

-둘 다 괜찮으니까 시현 씨 편한 걸로 마셔요. 얼굴 볼 수 있는 게 중요하지, 뭘 마시느냐가 중요하겠어요? 집에서 볼까요?

“커피 사서 그쪽으로 넘어갈게요.”

통화를 끝낸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 사장과 인사를 나누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곧장 차에 타고서 시동을 걸었다.

오늘 꼭, 정혜영을 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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