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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3화 (8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3화>

83화. 솔직히 걱정했어요

레스토랑에서 나오고 약 30여 분 뒤.

안시현이 정혜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자 아직 정장 차림인 정헤영이 문을 열어 줬다.

“빨리 왔네요? 저도 이제 막 도착한 참이에요. 응? 등 뒤에 그건 뭐예요?”

“선물이요.”

안시현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게 된 정혜영의 두 눈이 커졌다.

“선물로 꽃은 처음 받아 봐요. 혹시 제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퇴근하시면서 종종 장미꽃 한 송이씩 사 오셨는데, 그 모습이 어린 나이임에도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면서요.”

“아,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감동이네요.”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제가 받아본 선물 중에 최고에요. 고마워요.”

정혜영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장미꽃을 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안시현이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저 오늘, 연우 누나한테 고백받았어요.”

“배우 차연우 씨요?”

“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고백을 받으니까 당황스럽긴 하더라고요.”

“받아…… 줬어요?”

정혜영이 눈치를 살폈다.

톱배우들의 연애에 관심을 가진다는 느낌치고는 꽤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안시현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확신했다.

“거절했어요.”

“어째서요?”

“연우 누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도 저와 다르지 않을 거라 믿고 싶어요.”

자신의 마음과 정혜영의 마음이 같을 거라고.

진심을 말할지, 아니면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안시현은 전자를 선택했다.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정혜영과 좋은 친구 사이로 만족할 자신이 없었다.

“본부장님. 아니, 혜영 씨.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미사여구는 없었다.

안시현은 담백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혹여나 거절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시현의 기습 고백을 들은 그녀는…….

“솔직히 걱정했어요.”

“뭐가요?”

“시현 씨가 입대 때문에 고백을 망설이면, 2년 동안 어떻게 기다려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이야기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였어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시현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다행히 그녀의 마음 또한 안시현과 같았다. 그녀의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안시현을 향했고, 최근에는 포커페이스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이 커졌다.

결국 누가 먼저 고백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그런 고민하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누가 먼저 고백하느냐가 중요한가요?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게 중요하죠.”

안시현과 정혜영이 눈을 마주쳤다.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더 이상의 대화도, 확인도 필요하지 않았다.

*   *   *

안시현은 정혜영과의 관계를 쉽게 생각하고서 진심을 털어놓은 게 아니었다.

회귀 전 30대 중반에 마지막 연애를 한 이후.

또다시 연애를 하는 날이 온다면 결혼을 전제로 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단순한 호감이나 연애 감정으로 이성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안시현의 고백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정혜영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정혜영의 생각 또한 비슷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윈 그녀이기에 가족에 대한 갈망이 컸다. 20대 초반에 짧게 했던 두 번의 연애 후,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가 없다면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 공부와 일에만 매진했다.

몇 년이 흘러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가 나타났다. 진심을 이야기하는 게 어렵고 낯선 정혜영이, 먼저 고백을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이번 달 말에 일본 간다고 했잖아요. 그 전에 만나서 고백할 생각이었어요. 차이면 뭐…… 지금까지처럼 제 인생에 남자는 없다 생각하고 살았겠죠.”

“선수 쳐서 다행이네요.”

“선수 쳐 줘서 고마워요.”

연인이 됐지만, 안시현과 정혜영의 관계는 겉으로 봐선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데이트는 정혜영의 집에서만 하기로 했고, 호칭 또한 이전과 똑같았다. 바뀐 게 있다며 애정 표현과 스킨십이 더해졌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귄다는 걸 비밀로 하기로 했다.

“우리가 먼저 밝힐 필요는 없잖아요. 밝혀지고 나서 시현 씨 입대해 버리면, 2년여 동안 온갖 루머가 난무할걸요? 전 그 꼴 보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최대한 조심해요. 그리고…… 미안하네요.”

“뭐가 미안해요?”

“사귀고 몇 달 후에 바로 입대해야 하잖아요.”

“괜찮아요. 입대 안 해도 서로 바빠서 자주 보기 힘들잖아요. 평소보다 조금 덜 본다고 생각하면 되죠. 휴가 나오면 볼 거고요.”

다행히 정혜영은 안시현의 군 입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미안하지 말라고 별일 아닌 척 배려하는 건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시현은 그런 정혜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대신 군대 가기 전에 자주 시간 보내요. 일본이랑 국내 팬미팅 일정 후에는 백수이니까, 최대한 혜영 씨랑 함께 시간 보낼게요.”

“퇴근했는데 집에서 시현 씨가 기다리고 있다면 기분 최고일 거 같은데요?”

“스페어 키 주면 자주 그래 줄게요.”

입대까지 남은 몇 달.

안시현은 정혜영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   *   *

정혜영과 사귀게 된 이후.

안시현은 고백을 거절한 차연우의 안부가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연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우정태로부터 간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이거다.’

안시현은 자연스럽게 차연우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우정태는 『눈의 노래』에 조연으로 출연 중이니, 촬영장 분위기를 물어보는 걸로 차연우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네, 선배.”

-촬영하다가 네 이야기 나와서 한 번 전화해봤어. 목소리 들어 보니까 잘 지내고 있는 거 같네.

“푹 쉬고 있는데 못 지낼 게 뭐 있겠어요? 선배는 어때요? 촬영은 할 만하고요?

-할 만하지. 촬영장 분위기야 엄청 좋아. 연우 누나가 메이커야. 스케줄 빡빡해서 지칠 법한데도 항상 웃고 농담하고 그래. 최근에 편두통이 심하다고 하루 정도 분위기가 안 좋긴 했는데, 다행히 다음 날부턴 다시 멀쩡해지더라고.

다행히 차연우는 프로였다.

안시현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것과 별개로, 촬영장에서는 거의 티를 내지 않고 연기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안시현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행히 잘 이겨 내고 있나 보네.’

우정태와 통화를 끝내고 약 1시간 뒤, 차연우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군대 가기 전에 『너와 나의 시간』 가족들 다 함께 모여서 송별회 해 주기로 했어. 4월 중순에나 할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고, 자세한 일정은 스케줄 조율되는 대로 알려 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차연우와의 관계가 서먹해질 것까지 감수하고서 단호하게 거절했건만, 예상과 달리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이제…… 홀가분하게 남은 스케줄과 혜영 씨에게만 집중할 수 있겠네.’

군 입대 전까지 남은 큰 스케줄은 도합 셋.

안시현은 입대 전까지 남은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활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   *   *

2002년 1월 19일.

안시현은 한 토크쇼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특집 방송 녹화를 하게 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정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특정 배우를 대상으로 한 특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안시현 한 명 때문에 기획된 특집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김진모와 최정수와 송강식이 흔쾌히 출연에 응해 줬고, 거기에 사전 촬영이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손해수와 진광욱 또한 출연한다.

메인이 안시현이지, 좀처럼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여러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것이다.

이에 MBS 예능국에서는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기에 어느 정도 시청률이 보장될 거라 판단했고, 스태프를 한시적으로 2배 가까이 늘리는 결단을 내렸다. 다양한 구도에서 촬영하며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 시청률을 끌어올리기로 한 것이다.

대본 작성, 촬영 장소 섭외, 소품 준비까지.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인 끝에, 강원도의 한적한 캠핑장에서 촬영을 하게 됐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MC분들과 배우분들이 자연스럽게 캠핑을 즐기면서 대화를 나누는 콘셉트입니다. 질문을 하기 전 스케치북을 통해 미리 알려 드릴 테니 당황하지 마시고요.”

“허허허. 카메라 짬이 몇 년인데 당황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촬영합시다.”

“형님이 옳은 말 하셨네. 배고픈데 빨리 시작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 준비 끝나는 대로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촬영을 앞둔 배우들은 여유로웠다.

대부분 데뷔 연차가 제법 되는 배우들이나 보니 예능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촬영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김진모의 경우 어느 상황에든 잘 적응하는 성격을 앞세워 예능 촬영 또한 즐기는 모양새였다. 일전에 출연한 몇몇 예능에서 탁월한 입담을 과시한 전력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유일하게 긴장한 건 안시현이었다.

회귀 전에 수차례 출연한 경험이 있음에도, 예능 출연은 늘 긴장이 됐다.

“촬영 덕분에 우리 막내들이랑 캠핑도 오게 되고 좋네. 요 앞에 낚시터 있는데 내일 낚시나 할까?”

“낚시 좋지요. 물 얼었나 보고 올까요?”

“내가 오면서 미리 확인했어, 인마. 완전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시현이 너 낚시 잘한다고 했지?”

“네. 바닷가 출신이잖아요. 회도 잘 떠요.”

“민물 낚시하는데 회는 무슨. 즙이나 내서 먹는 거지. 아무튼 잘한다니까 기대한다.”

“낚시하는 모습도 촬영할까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마음껏 해요. 장소 섭외하느라 고생 좀 했을 텐데 뽕은 뽑아야 할 거 아닙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안시현의 경우 촬영 초반에는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촬영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급기야 나중에는 촬영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함께 촬영을 한 배우들이 신경을 써 준 덕분이었다.

특히나 최정수가 안시현을 잘 챙겨 줬다.

“시현이를 처음으로 본 게…… 1997년 12월이었어요. 아직도 생생히 생각납니다.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놈들이 찾아와서는 수능 끝났다면서 잡일이라도 시켜 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당황은 했는데 받아 줬어요. 자유연기를 시켰는데 기대 이상이더라고요. 시현이의 경우…….”

좀처럼 예능에 출연하는 법이 없는 최정수는, 안시현을 위해 마음먹고 출연한 이유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네 배우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제작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게 만들었다.

최정수의 멘트만 잘 편집해도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정작 최정수는 촬영이라는 생각보다 후배 배우들과 놀러 왔다는 기분으로 즐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음 날.

낚시를 실컷 하다가 늦은 저녁에야 겨우 촬영이 마무리됐다.

안시현은 배우들과 함게 촬영을 위해 잡아 놓은 펜션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뒤, 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김진모와 함께 올라올 최봉팔을 펜션에 남겨 준 채 박정상과 단둘이서 말이다.

“형, 몇 시 출국이었죠?”

“5시. 집에서 좀 쉬다가 갈래?”

“네. 2시쯤에 데리러 와 주실래요?”

“그래. 이틀 동안 촬영했는데 피곤할 만도 하지. 시간 맞춰서 데리고 갈 테니까 쉬고 있어.”

이제 남은 큰 스케줄은 두 개.

일본 팬미팅과, 국내 팬미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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