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5화>
85화. 아, 생각났다
불과 며칠 사이.
JM액터스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공들이고 있던 김진모와 안시현의 열애설이 터졌다. 심지어 김진모의 열애설 상대는 같은 JM액터스 소속 배우인 한나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신년이 되자마자 터졌던 톱아이돌 커플의 열애설처럼 큰 논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이었다.
해당 아이돌 커플은 열애설이 터지기 불과 며칠 전, 여성 쪽에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금껏 연애를 해 보지 못했다고 한 게 문제가 됐다.
심지어 열애설의 도화선이 된 파파라치의 사진이 찍힌 시점이, 해당 예능 프로그램 촬영 몇 시간 전이라는 게 알려지자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반면 김진모와 한나래 커플은 달랐다.
열애설이 터지고 두 시간 만에 빠르게 인정했으며, 김진모가 직접 팬클럽 카페에 진심이 담긴 글을 남기면서 팬들에게 진심을 전했다.
이에 두 배우의 팬들은 대체적으로 헤어지지 말고 결혼에 골인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돌과 달리 배우의 열애에는 대중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강하기도 하거니와, 깔끔하게 대처를 한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다만…….
안시현, 정혜영 커플 같은 경우는 김진모와 한나래 커플처럼 마냥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정혜영이 비연예인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연예인 커플의 경우에는 양측 모두 팬덤이 존재하기에 여론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지 않지만, 한 사람이 비연예인일 경우에는 다른 한쪽의 팬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난을 당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몇 차례 있기도 했고 말이다.
JM액터스의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가 중요한 상황, 이를 알기에 안시현은 곧장 사옥으로 향했다. 정혜영과 통화를 하며 입장을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걸렸으면 계속 숨기려고 했는데, 걸렸으니까 당당해져야지 어쩌겠어요. 결혼 전제하에 진지하게 만나는 중이라고 하죠.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데이트하게 될 수 있게 됐으니 잘됐다고 생각해요.
“일단은 최대한 팬들의 반발을 사지 않는 단어들을 선택해서 보도 자료를 돌릴게요. 아, 혹시 일룡그룹에서는 별 이야기 없던가요?”
-오빠들은 나중에 사업 차 써먹을 일 있을지도 모르니 시현 씨 사인 좀 받아 달라 하고, 할아버지는 시간 되면 식사나 같이하자고 하셨어요.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네요?”
솔직히 안시현은 열애설이 터진 걸 확인하고서 대중들의 반응보다 일룡그룹의 반응이 더 걱정됐다.
본인의 말로는 백화점을 물려받으면서 후계 구도와는 완전히 멀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정혜영의 말만 들으면 반대를 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많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딜 감히 우리 집안에 딴따라를 들여! 뭐 이런 느낌?
“아하하…… 네. 솔직히 그 생각했어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할아버지는 좋아할 걸요? 내놓은 막내 손녀가 그룹 홍보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돈 한 푼 안 쓰고 언론에서 일룡그룹의 이름을 지겹도록 언급해 줄 텐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안시현은 정혜영의 말을 믿기로 했다.
더불어 국내 팬미팅까지 홀가분하게 끝났을 때에 맞춰서 정혜영의 할아버지인 정일룡 회장과 식사 약속을 잡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정혜영과의 통화가 끝난 직후, 안시현은 JM액터스 사옥에 도착했다.
미리 모여 있던 김진석 대표와 박정상과 최봉팔, 홍보팀 직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애를 인정하기로 한 상황이니, 보도 자료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만 논의하면 됐으니까.
열애설이 터진 시점으로부터 약 3시간 뒤.
JM액터스와 일룡백화점 홍보팀에서 거의 동시에 안시현과 정혜영의 열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JM액터스, 안시현과 정혜영 일룡백화점 본부장의 열애 공식 인정.
-안시현 ‘결혼 전제하에 교제, 응원 부탁드린다’ 입장 밝혀.
-일룡 백화점 홍보팀 ‘결혼 전제한 교제 맞다’.
-안시현, 군 입대 전 유부남 되나?
-안시현의 열애설, 『빌딩 숲』의 일본 시청률에 영향 끼치나?
보도 자료 배포 후.
어마어마한 기세로 안시현과 정혜영의 열애와 관련된 기사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온갖 추측성 기사 또한 난무했다.
입대 전에 결혼을 할 것이라느니, 정혜영이 임신을 했다느니, 안시현이 배우를 그만두고 경영을 배울 것이라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리도 꽤나 많았다.
‘역시 팬 카페에 글 하나 남기는 게 좋겠지?’
안시현은 보도 자료도 좋지만, 갑작스러운 열애설에 놀랐을 팬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팬 카페에 글을 남기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접속한 팬 카페에서는…….
-열애 축하합니다!
-예쁜 사랑 하세요!
-군대 때문에 헤어지지만 마.
-아, 진짜 실망했어요. 이건 배신이야.
-배우로서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대체로 안시현의 열애를 축하해 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간혹 안시현이 팬들의 마음을 배신했다느니, 배우로서의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며 이내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쏙 들어갔지만 말이다.
‘다행히 분위기가 좋네. 진모 쪽도 이러던데.’
공교롭게도 안시현의 팬 카페 분위기는 김진모의 팬 카페 분위기와 비슷했다.
정확히는 안시현 쪽이 조금 더 좋았다.
모든 팬들이 열애설을 반길 수는 없다. 아이돌보다는 덜하겠지만, 팬들 중에는 분명 열애에 실망하는 이들 또한 있을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지. 모두가 열애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니까.’
안시현은 자신의 열애에 실망하는 일부 여론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각오였다.
어차피 정혜영과의 관계가 공개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제대 후에는 당당하게 열애 사실을 밝히기로 정혜영과 이미 이야기를 끝내 놓았으니까.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안시현과 정혜영은 제대 이후 결혼하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논의하는 중이였다.
그때 가서 팬들이 실망할까 봐 눈치 보면서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안시현과 김진모의 팬덤 반응은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었다.
두 사람 다 데뷔 때부터 줄곧 좋은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으며 팬덤을 구축했다. 잘생긴 배우가 연기까지 잘하니까 좋아하는 거지, 단순히 잘생겼다고만 해서 팬이 된 이는 아주 극소수였다.
앞으로도 좋은 연기로 보답하자.
안시현은 그것만이 팬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 *
2월 중순.
예정대로 팬미팅이 개최됐다.
이전에 개최했던 팬미팅과 마찬가지로 무료로 진행되는 팬미팅이었고, 참여 인원은 이전에 비해 정확히 두 배가 늘어난 1000명이었다.
안시현의 팬미팅에는 한 명의 게스트가 참여했다.
참여하고 싶다는 연예인은 많았지만, 조율 끝에 한 명의 게스트만 함께하게 됐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배우가 아닌, 안시현의 불알친구로서 진행을 돕게 된 김진모입니다!”
바로 김진모였다.
3월 초에 예정된 김진모의 팬미팅에 안시현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김진모가 팬미팅 진행을 맡아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김진모가 진행을 맡았음에도…….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시현이가 좋아도 그렇지, 저한테도 관심 좀 가져 주세요. 시현이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없는 사람 취급하시네.”
팬들은 안시현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김진모에게 관심을 드러낸 건 안시현이 무대에 올라오기 직전까지였다. 김진모가 서운함을 토로할 때만 잠깐 관심을 가져 주고는 이내 다시 안시현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안시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열애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응원하고 바라봐 주는 팬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 또한 존재했다.
2년 2개월의 공백.
그사이 팬들이 모두 떠날지도 모른다는, 지금껏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지만…….
“몸 건강하게 군대 잘 다녀오겠습니다. 제대 후에도 좋은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 안시현이 되겠습니다.”
안시현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입지가 불안해지면 연기력으로 증명하면 되는 거고, 팬들이 떠나면 좋은 연기를 통해 다시 데려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마음을 다잡았다.
불안한 생각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입대 전, 팬들과 만나는 마지막 자리다. 부정적인 생각을 할 시간조차도 아깝다고 여겼다.
* * *
2월 15일.
설 연휴로부터 이틀 후.
최창국 PD가 MBS를 퇴사했다.
그나마 친분이 있었던 몇몇 이들과 자신을 따라 퇴사하겠다는 후배들과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걸로 최창국 PD는 MBS에서의 지난 십여 년을 마무리하게 됐다.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선배가 MBS에 해 준 게 얼만데 송별회도 없이 이게 뭐예요?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내가 KNC나 STS로 갈 거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너희들도 같이 퇴사하니까, 죄다 끌고 나가는 모양새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런 푸대접은 아니죠. 저희 나가서 꼭 성공해요. 만드는 드라마마다 모두 대박 쳐서 MBS가 후회하게 만들어 주자고요.”
“그러다 쪽박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노숙자가 되더라도 MBS 쪽은 안 바라볼 거예요. 사내 정치질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아쉬움을 토로하는 동기와 후배들과 달리 최창국 PD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퇴사를 앞두고 보여 준 MBS 드라마국 PD들의 노골적인 푸대접에, 눈곱만큼이나마 남아 있던 미련까지 말끔하게 지워 버릴 수 있었으니까.
이제 최창국 PD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중파 방송사는 두 곳뿐이었다.
다음 날.
MBS에서 퇴사하자마자 최창국 PD는 가장 먼저 안시현과 만남을 가졌다.
“김 작가님께 얼추 듣긴 했는데, 연말까지 일본에서 지내실 거라면서요?”
“네. 대표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너와 나의 시간』에 이어『빌딩 숲』까지 일본에서 성공하고 있는 덕분이기도 하고요.”
『빌딩 숲』은 6화에서 시청률 6.9%를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일본에서 순항 중이었다. NHK 수뇌부에서는 15%까지도 노려 볼 수 있겠다는 희망적인 관측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NHK에서는 일본의 드라마 촬영 현장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최창국 PD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오히려 최창국 PD를 최대한 지원하겠다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줬다.
그렇게 최창국 PD의 일본 유학이 확정됐다.
기간은 2002년 3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이후에는 JM액터스의 콘텐츠 제작팀장으로서 맹활약을 할 예정이었다.
“PD님이라면 일본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을 거예요. 솔직히 NHK에서 거액을 제시하고 스카우트를 하려고 하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예요.”
“얼마를 줘도 JM액터스와 함께할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은 더 많이 줄 수 있겠지만, 권한까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 주지는 못할 테니까요. 거기에 대표님이 제시하신 연봉과 인센티브 조건이 결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아 참. 김 작가님이 다른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
“무슨 이야기요?”
“나중에라도 시현 씨와 한 작품을 더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아니고 한참 후? 드라마 제대로 만들려면 특수효과 기술이 한참 더 발전해야 해서, 시놉시스만 써 놓고 방치 상태라 하더라고요.”
“저야 같이하면 좋죠. 타이틀은 말씀해 주시던가요?”
“뭐였더라…… 아, 생각났다.『내 아내는 처녀귀신』이었던 것 같아요.”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최창국 PD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드라마 타이틀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