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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6화 (8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6화>

86화. 처음 뵙겠습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

이전에도 톱배우였던 김진모를 해외에서마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만들어 준 드라마이자, 케이블 채널인 TV Y에서 다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최고 시청률 29.1%를 기록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설마 그 드라마를 최창국 PD가 언급할 줄이야.

잠시 당황했던 안시현은, 이내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주인공은 아니야. 김 작가님이 진모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서 집필했다 밝힌 작품이니까. 회귀 전에 많은 게 바뀌었다지만, 그것마저 바뀌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지니 아니라고 봐야 돼. 그러면…… 결국 그 배역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주연은 김진모의 차지다.

회귀 전이나 후나 변화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애초에『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김희숙 작가가 주인공으로 김진모를 떠올리며 집필한 드라마다. 주인공 캐릭터가 철저하게 김진모에게 맞춰져 있으니, 변화를 상상하는 게 힘들다.

그렇다면 김희숙 작가는 어떤 배역을 생각하면서 안시현의 이름을 언급한 걸까?

고민 끝에 안시현은 한 배역을 떠올렸다.

조연임에도 투톱 못지않은 존재감을 내뿜었던 배역, 선역과 악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시청자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배역.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배역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주연만큼은 아니지만 비중이 있고, 더욱이나 안시현을 원할 정도로만 그 배역 말고는 없었으니까.

‘이건 좀…… 구미가 당기네.’

아직 배역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올 때가 아니기에 확신할 순 없지만, 만약 해당 배역이라면 안시현은 작품을 함께하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공개 오디션을 거칠 각오 또한 했다.

해당 배역이 자신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니와…….

‘회귀 전에는 최종에서 아쉽게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를 거야.’

회귀 전, 최종 2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놓친 배역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지금 당장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머릿속에서 지우자. 제대 후에 바로 제작될 것도 아니고, 아무리 빨라도 2010년은 훌쩍 넘겨야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드라마이니까.’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제작되려면 제대 후에도 10년 넘게 더 기다려야 하고, 그 전에 섣불리 제작을 시도했다가는 여러 문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케이블 채널에서 역대급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작품 자체가 좋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가 맞물리며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이다.

흥행보증수표 김희숙 작가, TV Y의 적극적인 홍보,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특수효과, 최창국 PD의 연출력,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적재적소에 활용된 OST까지.

이 중 하나만 빠지더라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그토록 성공하지는 못했을 거다. 성공했을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지만, 최고 시청률에서는 조금 차이가 날 거라는 게 안시현의 예상이었다.

때문에『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출연하더라도,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곽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처럼, 보험을 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겠지.’

미래를 위한 보험.

안시현은 그 정도 선에서『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관심을 가지는 걸로 마음먹었다.

*   *   *

최창국 PD는 일본 유학까지 남은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을 연출하며 소홀했던 아내에게 당분간이라도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최창국 PD와의 짧았던 만남 이후.

안시현은 낮에는 운동을 하고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었으며, 정혜영이 퇴근하는 저녁에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는 일상을 반복해 나갔다.

열애설 이후.

안시현은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전에는 혹여나 관계를 들킬까 봐서 정혜영이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일절 만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인파가 지나치게 몰리는 장소에서 데이트하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심야영화 데이트 직후.

정혜영을 집으로 데려다주며 안시현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데이트하고 싶은 장소 있어요? 제가 생각해 둔 곳은 거의 다 가 본 것 같아서요.”

“저 한 군데 있어요.”

“어디요? 말해 봐요. 혜영 씨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어요.”

“놀이동산이요. 저 애인 생기면 둘이서 놀이동산 꼭 한번 가고 싶었거든요.”

놀이동산.

나쁘지 않는 데이트 코스이지만, 배우와 재벌 3세 커플이 가기엔 몰려드는 인파 걱정으로 다소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에 정혜영은…….

“걱정하지 마요. 개학하고 나서 학생들 단체로 안 오는 평일에 가면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제가 잘 알아볼 테니까, 시현 씨는 시간만 비워 놔요.”

아주 간단하게 고민을 없애 줬다.

개학 시즌이 3월에, 학생들이 단체로 오지 않는 평일을 찾아서 방문하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제야 안시현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일룡 그룹은 놀이공원도 소유하고 있었지.

*   *   *

놀이공원 데이트 당일.

안시현과 정혜영이 아침 일찍 용인으로 향했다.

개장 시간에 맞춰 바로 입장에서 어떤 놀이기구를 타고 놀지, 점심식사로 무엇을 먹을지, 하루 계획을 차근차근 짜 나갔다.

두 사람은 제법 들떠 있었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놀이동산 데이트가 로망 중 하나였던 정혜영 쪽이 제법 들뜬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놀이동산 데이트.

안시현은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에게 인사를 해 주고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사인을 해 줬다. 가끔은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다만 데이트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데이트에 방해가 될 정도로 팬들의 사인 요청을 받아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팬들이 양해를 구하며 조심스럽게 사인 요청을 했기에 데이트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또한 정혜영은 팬들의 사인 요청과 무관하게 놀이공원 데이트를 기분 좋게 즐겼다.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타기로 작정한 듯이 순차적으로 줄을 섰다.

앉아 있는 시간은 놀이기구를 탈 때와 점심식사를 할 때가 전부일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놀이공원 데이트는 안시현 또한 처음 해 보는 것이었고, 특히나 톱배우가 된 이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해 본 데이트 방법이기도 했다.

솔직히 열애설을 인정했다 해도 쉽사리 하기 힘든 데이트 방법인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정혜영은 먼저 놀이공원 데이트를 제안했다.

정혜영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아. 24시간 개장했으면 좋겠다.”

“재밌었어요?”

“최고였어요. 드라마에서 허구한 날 놀이공원 데이트를 보여 주는지 알 것 같았어요.”

“저도 오늘 하루 즐거웠어요.”

“근데 조금 아쉽긴 했어요. 좀 더 스릴 있는 놀이기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해외에는 여럿 있다고 하던데, 셋째 오빠한테 말해서 수입 좀 해오라 할까 싶네요. 역시 놀이기구는 스릴 있는 게 최고 아니겠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 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닌 탓일까?

놀이공원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던 정혜영은 어느새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안시현은 그런 그녀가 춥지 않게 담요를 덮어 주고서, 잠에서 깰 때까지 책을 읽으며 기다려 주기로 했다.

2시간 남짓이 지났을 즈음.

“으음…….”

눈을 비비며 정혜영이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아, 자고 있으면 깨우지 왜 기다리고 그래요.”

“너무 곤히 자서요.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잘 잤어요?”

“시현 씨 꿈 꿨어요.”

“어떤 내용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시현 씨한테 돈 봉투 주는 꿈이요.”

“으으. 그건 좀 무섭네요. 소름 끼쳤어요.”

진심으로 질색하며 팔뚝을 문지르는 안시현의 모습에 정혜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안시현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요. 꿈은 반대라잖아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럼 다행이고요. 아, 우리 오늘 데이트한 거 기사 다 났대요.”

“예상하고 한 거잖아요. 반응은 좋대요?”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거라고 말해 놔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데이트하는 와중에도 팬서비스까지 잊지 않았다면서, 모범 연예인이라고 칭찬하는 기사까지 있대요.”

“다행이네요. 욕먹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십여 분 정도 대화를 한 뒤.

정혜영이 하품을 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하네요. 들어가서 씻고 일찍 쉬어야겠어요. 내일 아침에 봐요.”

“아, 가기 전에 이거 가져가요.”

안시현이 뒷좌석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정혜영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깜짝 선물이요. 직접 주고 싶긴 한데 좀 민망해서요. 집에 들어가서 확인해요. 알았죠?”

“으음. 네. 뭔지 모르겠지만 선물 감사해요. 씻고 침대에 누워서 확인해 볼게요.”

삼십여 분 뒤.

잠옷 차림의 정혜영이 안시현으로부터 작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반지 케이스가, 반지 케이스 안에는 안시현과 정혜영의 이니셜이 새겨진 은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정혜영이 약지에 반지를 끼워 보았다.

기가 막히게 딱 맞았다. 심플한 디자인 또한 정혜영의 취향과 딱 맞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반지를 고르면서 심사숙고를 했을 연인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미소가 감춰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샤워를 하는 사이 안시현으로부터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제대하면 다이아몬드 반지로 바꿔 줄게요.

*   *   *

놀이공원을 다녀온 다음 날.

정혜영과 안시현이 아침 일찍 만났다.

“후우…….”

아침 일찍 미용실에 다녀와서 머리를 하고,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안시현이 조수석에 앉아 주기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평소였다면 안시현이 운전을 했겠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긴장으로 인해 손이 떨리는 걸 본 정혜영이, 운전대 잡으면 안 되겠다며 강제로 조수석에 앉힌 것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멈출 때마다 정혜영이 손을 잡아 줬지만, 그럼에도 안시현의 긴장은 좀처럼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돼요?”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아요. 저 출발하기 전에 청심환 먹지 않았어요?”

“먹고 양치하고 나왔죠.”

“그런데도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아요. 혜영 씨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맘처럼 잘 안 되네요.”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너무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막상 뵙고 나면 긴장도 금방 사라질 거고요.”

“선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을 텐데…….”

“장담하는데 할아버지 취향이에요.”

혹시나 체할까 봐 아침 식사조차도 거를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안시현과 그런 안시현을 달래며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는 정혜영.

그런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은 커다란 마당이 있는 청담동의 한 고급 주택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세요?”

“서재에 계십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아, 이것 좀 맡아 주실래요? 이따가 제가 신호 보내면 가져다주세요. 할아버지께 깜짝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준비한 선물을 맡긴 정혜영이 안시현을 데리고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다가가 문을 노크했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오냐. 들어 오거라.”

정혜영이 몸을 돌려 안시현과 눈을 마주쳤다.

꿀꺽.

긴장한 안시현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정혜영이 문을 열고서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시현이 빠르게 방 안을 살펴보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한 명이 소파에 앉은 채 차를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시현이라고 합니다.”

“허허허. 반가워요. 출연한 영화랑 드라마 재밌게 봤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한민국 재계 1위인 일룡그룹의 수장.

안시현이 마침내 일룡전자 회장 정일룡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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