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7화>
87화. 다행이야
물을 뿌린다든지, 돈 봉투를 건넨다든지, 협박을 한다든지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일룡 회장은 진심으로 안시현을 반겨 주었다.
정말로 안시현이 출연한 작품을 본 건지, 『형아, 동생』과 『너와 나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촬영장 비하인드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안시현은 자신이 공개해도 되는 선에서 몇몇 비하인드를 이야기하며 정일룡 회장을 즐겁게 해 줬다.
“회장님께서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해서 『형아, 동생』을 재밌게 봤고, 혜영이가 모티프인 주인공이 나온다고 해서 『너와 나의 시간』도 챙겨 봤지요. 안시현 배우님의 연기,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일룡전자 신형 휴대폰 홍보 모델로 섭외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물 건너갔네요.”
“일룡백화점 홍보 모델도 제대할 때쯤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데, 재계약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괜히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좋은 판단이에요.”
정일룡 회장은 안시현에게 시종일관 호의적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우며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안시현이 선물로 준비해 온 산삼주는 화룡점정이었다.
담금주를 좋아한다는 정혜영의 말을 듣고서 안시현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는데, 정일룡 회장은 그 자리에서 반주로 마시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당분간 반주 걱정 없겠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안시현은 분위기가 훈훈해지자 조금씩 긴장을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며 가벼운 농담도 할 정도가 됐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정원에서 티타임이 이어졌다.
정혜영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정일룡 회장이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과 눈을 마주쳤다.
꿀꺽.
안시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이에 안시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정혜영이 있는 자리에서는 눈치가 보여 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나올 타이밍이라는 걸 말이다.
“언제 결혼할 생각입니까?”
정일룡 회장은 첫 질문부터 돌직구를 던졌다.
안시현은 정혜영의 돌직구 화법이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며, 잠시 고민을 한 뒤 질문에 답을 했다.
“제대 후 바로 하려고 합니다.”
“좋네요. 입대 전에 식을 올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2년 사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때도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식을 올리면 되겠어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허락하고 말고가 뭐 있겠습니까. 제 부모 사고로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인연 끊고 살겠다던 아이 억지로 유학 보내고 백화점을 떠넘겼어요. 몇 년 전까지도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심했던 아이인데…… 지금은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솔직히 전…… 반대하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습니다. 재벌들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경우도 제법 많은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혜영이는 예외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일룡 회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안시현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정혜영을 바라보며, 그녀가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혜영 씨와 함께 행복하겠습니다.”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 그리고…….”
정일룡 회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안시현이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켰다. 혹시나 지금껏 좋았던 분위기를 단번에 뒤덮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지만…….
“혜영이랑 가끔씩 밥 먹으러 와서 말동무 좀 해 주다가 가요. 허구한 날 일 이야기만 하다가 영화 이야기를 하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거 같아요.”
역시나 이번에도 기우였다.
안시현은 말동무는 핑계고, 본질은 정혜영이라는 걸 대번에 간파했다. 한 번이라도 더 손녀의 얼굴을 볼 핑계를 마련하려는 정일룡 회장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에 미소를 지은 채 화답했다.
“초대해 주시면 자주 오겠습니다.”
* * *
1월 말, NHK에서 방영을 시작한『빌딩 숲』은 3월 말에 최고 시청률 14.5%를 기록하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 주에 방영된 NHK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재방영 요청이 쏟아지며 6월 중에 다시 한 번 방영이 될 예정이라고 했다.
『너와 나의 시간』과 달리 로맨스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직장 생활에서의 부조리와 이를 이겨낸 성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 주요 시청자 층을 제대로 저격했다는 분석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NHK에서 안시현에게 다시 한 번 일본에 와줄 수 있겠냐고 요청해왔지만, JM액터스와 안시현은 심사숙고 끝에 정중히 거절했다.
입대가 임박한 시점이기에 해외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4월 초.
입대를 한 달여 앞둔 시점.
안시현이 김진모와 함게 손해수와 이아영의 결혼식에 신부 측 하객으로서 자리를 빛내게 됐다.
드레스를 입고서 행복해하는 이아영과 아직 결혼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손해수에게 안시현은 진심으로 축하를 해 줬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자신도 결혼을 하게 되면 손해수처럼 감정이 복받치는 모습을 보여 줄까?
‘어쩌면 더 울컥할지도 모르지.’
제대 후 바로 결혼을 한다고 해도, 회귀 전의 삶까지 감안하면 40대 중반에 결혼하는 셈이다. 30대 중반 이후로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렸었기에, 결혼이 유독 의미 깊게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아영과 손해수와 인사를 하고 친분이 있는 배우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은 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김진모가 슬쩍 안시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영 선배랑 손해수 선배님은 어떻게 사귀게 된 거래? 『형아, 동생』 때만 하더라도 딱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며?”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짐이 눈곱만큼도 없었거든?”
『형아, 동생』 때만 하더라도 손해수와 이아영은 사이좋은 선후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인이라고 생각될 만한 행동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었다.
심지어 손해수는 스태프든 배우든 촬영 끝나고 여자 소개 좀 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열애설조차 건너뛰고 결혼부터 발표한 건지, 안시현과 김진모는 두 배우의 연애사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손해수와 이아영의 연애사에 대해 알려 준 건 간만에 만난 최한수 감독이었다.
“『형아, 동생』 촬영 끝나고, 이 배우가 손 배우에게 여배우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 놓고 막상 나온 게 이 배우였던 거죠.”
“해수 선배님 당황했겠는데요?”
“당황했죠. 소개시켜 준다는 여배우는 언제 오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그 여배우라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이 배우를 보며 어이없어서 웃었답니다. 그 뒤로는 뭐…… 밥 먹고 영화 보고, 술도 한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한 거죠. 그게 딱 작년 이 무렵일 겁니다.”
“1년 동안 기자들에게 걸리지 않고 연애하다가 결혼에 골인한 비결이 궁금하네요. 저랑 진모는 둘 다 기자들한테 제대로 걸렸잖아요.”
“아, 그게 몇몇 기자들은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해 줬답니다. 해수 씨가 결혼해야 하니까 섣부르게 열애설 터트리지 말아 달라고, 늦둥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고 사정했더니 다들 모른 척해 줬다 하더라고요.”
손해수와 이아영의 연애사에 대해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하객들이 식장에 꽉 들어찼고, 안시현은 그중 『나는 간첩입니다』와 『형아, 동생』를 함께했던 제작진, 배우들과 간만에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곽상필 감독의 아들이자, 보조 감독으로서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을 함께 했던 곽한일 감독 또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여름에 영화 개봉한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시사회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복무 중일 때라 아쉽게 됐습니다.”
“영화 대박 나시길 바랍니다.”
“대박은 기대도 안 하고 손익 분기점만 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종본까지 넘겨 놓고도 걱정 때문에 잠을 잘 못 드는 지경입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흥행을 걱정하는 건 그 어떤 감독이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몇 편의 독립영화 이후 이전 두 작품에서 손익 분기점을 돌파하며 곽상필 감독의 아들이 아닌 한 명의 영화감독으로서 인정받은 곽한일 감독이지만, 흥행에 대해 걱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안시현은 곽한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세 번째 대중영화가 손익 분기점을 넘을 걸 알기에, 미소를 지으며 잘될 거라고 응원해 줄 뿐이었다.
동시에 마음에 담고 있었던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곽상필 감독님은 아직도 해외에 계십니까?”
“아, 네. 여전히 프랑스에서 집필 중이십니다. 프랑스 영화감독들과도 교류 중이라 하더라고요.”
“입대 전에 한번 뵙고 갈 생각이었는데 어렵게 됐네요. 아쉬워요.”
“귀국하면 면회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아 참, 그리고 아버지가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었습니다.”
“전해 달라고 한 말이요?”
“네. 잠시 귀 좀.”
곽한일 감독이 안시현의 귀에 대고서 뭔가를 속삭였다. 주위에 있는 배우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용하게, 안시현 한 명에게만 곽상필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해 줬다.
동시에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하. 네. 지난달에 프랑스에 가서 뵙고 왔을 때 하신 말이니 확실합니다.”
“아, 믿기지가 않네요.”
안시현은 곽한일 감독을 통해서 몇 번이나 자신이 들은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이후에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입대를 앞두고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거…… 하다하다 입대가 기다려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안시현은 입대하는 그날이 기다렸다.
어서 빨리 입대하고 자대 배치를 받아, 기대감을 한껏 안은 채로 면회를 올 곽상필 감독을 맞이하고 싶었다.
* * *
안시현은 4월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다. 입대 전에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4월의 마지막 주.
정혜영이 안시현의 고향집을 방문했다.
입대하기 전 부모님께 정혜영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 부탁을 했는데, 정혜영은 흔쾌히 이틀 동안 연차를 내고서 안시현의 뜻을 받아들여 줬다.
“어머머. 이게 다 뭐예요?”
“이건 보온 잘되는 내복이고요. 이건 피부에 좋은…….”
다행히 안시현의 부모님은 정혜영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재벌 3세라는 이유로 거리감이 있다던 어머니는 정혜영이 준비해 온 선물들과 싹싹한 태도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마음이 바뀌었다.
아버지야 뭐…….
“우리 눈치 보지 마. 너 좋으면 된 거지.”
처음부터 안시현의 편이었고 말이다.
정혜영은 하룻밤 자고 점심까지 먹은 다음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5월 초에 올라올 안시현에게 푹 쉬다 오라는 말을 남기고서.
정혜영이 서울로 올라간 뒤.
안시현은 부모님에게 제대 후의 미래에 대해 슬쩍 이야기했다. 서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제대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하니…….
“시현아, 엄마가 볼 땐 혜영이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기 힘들어. 놓치지 말고 꽉 잡아! 배경을 떠나서 애가 사람이 됐더라니까.”
“얼른 결혼해서 빨리 손주 보여 주기만 해. 아빠는 그거 말고 바라는 거 없다.”
다행히 두 분 모두 긍정적이었다.
혹시나 탐탁지 않아 하면 어쩌나 생각했지만 기우였다. 정혜영이 이틀 동안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가기도 했거니와, 기본적으로 부모님은 모든 일에서 안시현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다행이야. 이제 걱정거리 없이 입대해도 되겠어.’
정일룡 회장을 만나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며,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허락까지 받았다.
마음속에 남은 짐이 모두 사라졌다.
2002년 5월 1일.
안시현이 서울로 올라왔다. 입대를 앞두고서 지인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너와 나의 시간』 제작진과 배우들이 한데 모여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4월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5월은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안시현은 입대를 이틀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