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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8화 (8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8화>

88화. 당연히 해야죠

입대 이틀 전.

안시현은 정혜영과 시간을 보냈다. 하루 전에는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고, 당일 새벽에 정혜영과 함께 훈련소까지 배웅을 해 줄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

정혜영은 손수 안시현의 머리카락을 삭발해 줬다.

회귀 전에 몇 번, 그리고 회귀 직후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면서도 안시현은 삭발을 감행했다. 배역을 위해서라면 헤어스타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역을 위해 삭발을 한 것과 입대를 앞두고서 삭발을 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안시현이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어색해요?”

“어색한 것 보다는…… 이제 진짜 입대한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해서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시현 씨라면 군대에서도 잘하고 올 거예요.”

솔직히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군대야 이미 회귀 전에 한 번 겪어 보지 않았던가.

한 번 겪어 봐서 가기 싫은 게 문제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군대를 두 번 가야 하는 상황에서 즐기는 건 솔직히 무리였다.

애써 긍정적인 요소들을 생각하며 부정적인 면들을 외면하려 노력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날 오후.

안시현은 정혜영과 남산 데이트를 했다.

안시현을 알아보는 팬들은 꽤나 많았지만, 그런 안시현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입대를 이틀 앞두고 삭발한 채 연인과 마지막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인을 요청하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였다.

다음 날.

안시현의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왔다.

안시현은 부모님과 함께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

‘혹시 모르니까 면회는 되도록 오지 말라고 해야겠어. 오더라도 날 좋은 날에만 오라고 하는 게 맞아.’

안시현이 군 입대를 서두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부모님의 생명을 앗아갈 사고를 막기 위해서였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 면회를 오다가 발생했던 10중 연쇄충돌사고가 발생했고, 안시현의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입대 시기를 바꾸면 사고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몇몇 이유들이 맞물리며 안시현은 회귀 전보다 입대를 6년 가까이 앞당기게 됐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입대 시기가 달라졌고 복무하는 부대도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고 봤다. 면회를 오더라도 날씨 좋은 날에만 오라고 부모님에게 몇 차례나 강조할 정도였다.

입대 당일 이른 새벽.

일찌감치 준비한 정혜영이 안시현의 집을 방문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훈련소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안시현과 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를 꽉 채우는 걸로도 모자라, 옆에 테이블을 하나 더 가져다 둬야 했을 정도로 음식이 많았다.

심지어 모두 안시현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세상에, 이걸 언제 다 만들었어요?”

“혜영이랑 같이 만들어서 오래 안 걸렸어.”

“아니에요. 어머님이 다 하고, 전 옆에서 재료 손질만 거든 정도인걸요.”

첫 만남 이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은 안시현의 어머니와 정혜영은 기대 이상으로 친해져 있었다.

특히나 정혜영이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안타까움을 느낀 안시현의 어머니가 이것저것 잘 챙겨 주면서 부쩍 가까워지게 됐다.

모녀만큼 가까워지는 건 무리겠지만…….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고부갈등 없이 사이좋은 며느리와 시어머니면 됐다. 오히려 지나치게 친해지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게 안시현의 생각이었다.

식사를 끝난 뒤.

안시현이 부모님과 정혜영과 함께 훈련소로 향했다.

훈련소 근처에서 싸온 음식들로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조금 식긴 했지만,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은 역시나 언제 먹어도 일품이었다.

점심 식사까지 끝내자…….

마침내 훈련소 입소 시간이 다가왔다.

“울지 마요, 엄마. 100일 휴가도 나올 거고, 포상 휴가 받아서 휴가 자주 나올게요.”

“어휴…… 안 울렸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주책이야, 주책.”

“흠흠. 이 사람아.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울고 난리야.”

“너나 잘하세요. 자기 눈에서 흐르는 게 눈물이 아니라 콧물인 줄 아나 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눈물을 보였다.

침착하려 노력해 봤지만, 아들의 입대를 앞두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정혜영 또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다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몇 분 후면 훈련소에 들어가야 할 안시현을 아무 말 없이 꼭 안아 주며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렸다.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손끝을 살짝 떨면서 자신을 끌어안은 정혜영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100일 후에야 보게 될 연인의 모습을 기억하려 노력하며 속삭였다.

“전화할 수 있을 때마다 전화할게요. 100일 휴가 때 봐요. 사랑해요.”

부모님과 정혜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입대를 지켜보러 온 팬들과 기자들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한 이후.

안시현이 훈련소 안으로 들어갔다.

배우 안시현이 아닌, 훈련병 안시현이 되며 26개월의 복무가 시작됐다.

*   *   *

안시현은 매 순간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사격 훈련에서 만발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덕분에 전화 포상을 무려 세 번이나 받을 수 있었다.

일주일 늦게 입대한 김진모와 훈련소에서 몇 차례 마주치긴 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할 기회는 없었다. 그저 서로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미소를 짓는 게 전부였다.

행군 때는 군대를 두 번이나 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 시간 또한 그럭저럭 잘 넘길 수 있었다.

자대 배치 이후.

지긋지긋한 군 생활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랐다.

안시현은 군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려고 노력했다. 배우 안시현이 아닌 이등병 안시현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특혜를 바라지 않았다.

배우 나리가 납시었다며 아니꼽게 보던 몇몇 선임들마저도, 안시현의 진솔한 모습에 이내 마음을 열고서 차별을 하지 않게 됐다.

군 생활에 적응했을 즈음.

어느새 100일 휴가가 성큼 다가왔다.

원래 안시현은 100일 휴가를 받자마자 고향에 다녀온 뒤, 3일째에 서울로 올라와서 몇몇 지인들을 만나고 4일 째부터 정혜영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혜영이랑 둘이 시간 보내.

“첫 휴가인데 어떻게 그래요.”

-잔말 말고 엄마 말 들어. 우리가 중요하냐? 앞으로 평생 함께 살 혜영이가 중요하지. 우린 다음 휴가 때나 면회 가서 얼굴 보면 되니까, 100일 휴가는 혜영이랑 같이 있어 줘. 100일 동안 많이 보고 싶었을 거야.

“네, 그럴게요.”

부모님의 배려로 인해 휴가 이튿날 저녁부터는 온전히 정혜영과 시간을 보내게 됐다.

100일 만에 만난 정혜영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안시현과 정혜영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밖을 돌아다니기보단 집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했다.

첫 휴가는 달콤했지만,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안시현은 짙은 아쉬움을 느끼며 다음 휴가와 앞으로 자주 있을 면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군 복무 중.

안시현은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

입대 전에 포상 휴가를 자주 받을 거라고 지인들에게 말을 했는데, 정말로 포상 휴가를 자주 받으면서 자신이 한 말을 지킨 것이다.

훗날 특혜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는 연예병사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안시현은 자신이 받은 포상 휴가에 만족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군대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리 즐거운 건 아니었다. 군대에는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껏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회귀 전처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복무를 하면서 선임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거나 차별을 받을 일도 없었고 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안시현은 어느새 상병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리는 빌어먹을 계절이 지나 2003년의 봄이 됐을 무렵.

“안 상병, 너 면회 있다.”

“네, 알겠습니다.”

면회소로 향하며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과 정혜영은 얼마 전 면회를 다녀갔다. 몇몇 배우들도 이미 한 번씩 면회를 다녀갔기에, 면회를 올 만한 사람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연락조차 없이 면회를 온 것이다.

누가 면회를 온 것일까 궁금해 하던 안시현은, 면회소의 문을 열기 직전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혹시……?’

이내 기대감을 품고서 면회소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감독님!”

“허허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열흘 정도 됐습니다. 이것저것 볼일 좀 보다 보니 이제야 오게 됐네요. 이해해 줘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면회를 온 것은 바로 곽상필 감독이었다.

지난해 5월, 면회를 올 거라고 했던 곽한일 감독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곽상필 감독의 양손에는 안시현을 위해서 준비해 온 음식이 담긴 봉투들이 들려 있었다. 준비해 온 음식들을 이내 테이블 위를 차곡차곡 채웠다.

안시현은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어느새 상병이 됐지만, 면회를 오는 사람들이 준비해 오는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곽상필 감독은 그런 안시현을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따로 말을 걸지 않은 채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줬다.

식사가 끝난 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마지막 3개월은 스위스에 있었어요. 음…… 말년에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영감을 얻는 경험도 더러 했고요.”

“아, 부럽네요. 저도 나중에 해외에서 몇 달 정도 지내다 오고 싶어요.”

“휴식기 때 한번 해 봐요. 장담하는데, 어떤 방향으로든 연기에 도움이 될 거예요.”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한 뒤.

곽상필 감독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참, 오늘은 다른 용무로 찾아온 건데 간만의 만남이 즐거워서 본론을 잊고 있었네요.”

“본론이라면, 혹시 곽한일 감독님께 전해 들은 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나중에요. 오늘은 안 배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다른 용무로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시현은 손해수와 이아영의 결혼식 당시 곽한일 감독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때문에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솔직히 그게 아니라면 곽상필 감독이 자신을 면회 온 다른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장난을 치려는 목적으로 뜸을 들이던 곽상필 감독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냈다.

“안 배우, 육군홍보영상 하나 찍을 생각 없어요?”

“육군홍보영상이요?”

“네. 톱배우 안시현과 김진모가 함께 출연하는 육군홍보영상, 재밌을 것 같지 않습니까? 메가폰을 제가 잡기로 했습니다. 아, 참고로 김 배우는 포상 휴가를 준다니까 절이라도 할 기세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곽상필 감독의 제안을 들은 순간, 안시현은 진심으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대한민국 최고의 커리어를 지닌 대중영화 감독님이 육군홍보영상이야. 이 정도면 중학교 축제 연극 무대에 연기대상 배우가 주연 맡은 수준의 밸런스 파괴잖아.’

그만큼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육군홍보영상을 군에서 자체 제작하는 게 아닌 곽상필 감독에게 맡긴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외주 제작 사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는 공모전도 하는데 뭐…….’

이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육군에서 제안을 한 게 아니라, 곽상필 감독이 먼저 재능 기부 차원에서 제안을 했다고 하는데 거절을 하는 것 또한 이상한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후사정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포상휴가 준다는데 당연히 해야죠.”

포상휴가를 준다고 하는데 말이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포상휴가를 받을 수 있다고 제안하는데 거절할 군인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안시현이 간만에 연기 열정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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