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9화>
89화. 끝장을 봐야겠죠?
사실 곽상필 감독의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육군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안시현과 김진모라는 톱배우들이 홍보 영상에 출연해 준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고, 홍보 영상의 퀄리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곽상필 감독이 연출을 하고 톱배우 두 명이 출연해 준다고 한들, 제작비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수준으로 책정됐기에 제대로 된 영상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 사람의 이름값을 등에 업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봐야겠죠?”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감독님?”
“한동안 쉬어서 걱정이긴 한데…… 막상 카메라 마사지 좀 받다 보면 금방 감각이 살아날 겁니다.”
“허허허. 그럼 가볍게 몸부터 풀어 봅시다.”
곽상필 감독과 안시현과 김진모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 최고의 커리어를 지닌 대중영화 감독, 각각 연기대상과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배우가 한데 모였다.
아무리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한 군 홍보 영상이라 해도 대충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왕 하는 거, 주어진 환경 내에서는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홍보 영상은…….
“와…….”
“혹시, 제작비에 0 하나 더 붙었습니까?”
“0 하나 붙어도 이 정도 퀄리티는 안 나올 것 같습니다만. 이건 진짜…… 괜히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게 하네요.”
“배우들의 연기도 장난이 아니에요.”
“별생각 없이 받아들인 제안인데 엄청난 결과물이 나와 버린 것 같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퀄리티가 엄청났다.
* * *
2003년 봄의 어느 날.
안시현의 팬카페가 간만에 들썩였다.
[우리 시현이 근황]
이라는 제목의 게시글 때문이었다.
육군 홍보 영상을 링크가 포함된 이 게시글은 안시현의 팬카페에서 김진모의 팬카페로 퍼져 나갔고, 이내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기까지 했다.
-육군 홍보 영상으로 영화를 찍은 두 남자.
-안시현과 김진모 근황, 여전히 연기는 명불허전.
-이제 겨우 상병, 안시현과 김진모의 제대는 언제?
안시현과 김진모가 찍은 육군 홍보 영상의 퀄리티는 대중들로부터 꽤나 화제가 됐다. 대체적으로 육군 홍보 영상을 찍으라고 했더니 전쟁 영화 예고편을 만들어 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지금껏 봐 왔던 것들과는 퀄리티 자체가 다른 게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휴가 때를 제외하면 좀처럼 근황을 알기 힘든 두 배우가 간만에 전해 온 소식이기에,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화제가 된 면도 있었다.
한편.
해당 영상이 화제가 될쯤 자신을 찾아온 곽상필 감독을 바라보며, 김진석 대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육군홍보영상 찍고 오라니까, 무슨 놈의 영화 예고편을 찍고 앉아 있어.”
“이왕 하는 마당에 대충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긴. 대충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 그나저나 가서 볼일은 잘 보고 온 거야?”
“네. 잘 보고 왔습니다. 아, 형님이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어서 가져왔습니다. 참고로 형님이 네 번째입니다.”
“한일이랑 진모랑 시현이 다음이 나겠네.”
“정확합니다.”
곽상필 감독이 미소를 지은 채 시나리오 꺼내 들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이후 꾸준히 준비해 온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자, 육군 홍보 영상 촬영을 핑계로 김진모와 안시현을 만나고 온 이유이기도 했다.
김진석 대표가 차분히 시나리오를 살폈다. 곽상필 감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차를 마시면서 차분히 김진석 대표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 줬다.
2시간 후.
김진석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놀랍네. 난 진짜 10년 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미완성이지 않을까 싶었거든. 근데 제대로 만들어졌네.”
“해외에서의 생활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니었다면 2, 3년은 더 걸렸을 겁니다.”
“언제부터 촬영하려고?”
“한 달만 더 쉬고 캐스팅 라인부터 하나둘씩 준비해야죠. 안 배우와 김 배우는 제대하자마자 대본 리딩에 투입시키려고 합니다.”
“정수는 뭐라고 하던?”
“시나리오 받자마자 스케줄 다 빼겠다고 하더라고요. 내년까지 이 시나리오에만 집중하겠답니다.”
“크흐흐. 정수다운 대답이네.”
“투자는 형님이 반, 혜인원이 반 해 줬으면 합니다.”
김진석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상필 감독과 약속했던 10년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투자에 큰 문제는 없었다.
『너를 부르다』 이후 JM액터스는 두 개의 드라마를 더 자체 제작했고, 각각 KNC와 STS에서 방영해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JM액터스는 꽤나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번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지 않고 대부분 축적해 놨다 보니,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에 단독으로 투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금 자체는 넉넉했다.
때문에 절반을 투자하는 것에는 당연히 문제가 없었다.
“제작에는 일절 관여 안 할 테니까, 네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봐.”
“제가 개판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럼 나는 지금껏 번 돈 대부분 날리는 거고, 넌 말년에 얼굴에 똥칠하는 거지.”
“크흐흐. 그런 일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제작해야겠군요.”
“마지막이니까 미련 남지 않게, 모든 걸 쏟아 봐.”
곽상필 감독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캐스팅 라인부터 시작해 촬영과 연출, 거기에 개봉 일자까지 모든 걸 완벽하게 꾸미고 싶었다.
바라는 목표는 단 하나.
현역에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 * *
육군 홍보 영상 촬영으로부터 열흘 후.
안시현과 김진모는 4박 5일 포상 휴가를 받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중을 나온 박정상의 차를 타고서 JM액터스 사옥으로 향했다.
“곽 감독님은 오셨어요?”
“아침 일찍 오셔서 대표님이랑 차 마시고 계셔. 엄청 들떠 보이시더라고.”
“당연히 들뜨셨겠죠.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완성하셨는데 어떻게 기대가 안 되겠어요.”
홍보 영상 촬영 마지막 날.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시나리오를 건넸다.
“포상 휴가 전까지 검토해 보고, 포상 휴가 나와서 답해 주세요. 그때와 지금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안시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혹시나 반입이 안 될까 걱정했지만, 책도 가지고 들어오는데 시나리오가 안 되겠냐면서 흔쾌히 허락받은 덕분에 무려 네 번이나 검토를 하고서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시나리오의 핵심 캐릭터는 셋.
곽상필 감독이 캐스팅 라인에 점찍은 최정수와 안시현과 김진모가 각각 맡아 줬으면 하는 배역 또한 미리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검토한 결과.
안시현과 김진모의 대답은…….
“솔직히 제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맡겨 주신다면 최대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맡을 캐릭터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전체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설사 다른 배역을 맡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단역이라도 상관없으니, 이 작품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허허허. 흔쾌히 결정을 내려 줘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주요 배역 셋을 맡아 줄 배우를 미리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김 배우와 안 배우가 제안을 거절했다면, 머리가 꽤나 아팠을 겁니다.”
『나는 간첩입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러브콜을 보낸 이후.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곽상필 감독은 주요 캐릭터 둘의 캐릭터를 구성하며 김진모와 안시현을 떠올렸다. 각각 김진모와 안시현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만약 두 사람이 캐스팅을 거절했다면 다른 배우를 알아봐야만 했지만,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연기력과 별개로 완벽하게 맞는 옷이 아닐 테니까.
최정수와 안시현과 김진모.
핵심 배역 셋의 캐스팅 라인을 모두 확정 지은 곽상필 감독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단역들까지 모두 캐스팅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 정도야 핵심 배역의 캐스팅 라인을 확정짓는 것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정수 선배님도 캐스팅 동의하신 거죠?”
“시나리오 받자마자 살펴보지도 않고 함께하겠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오늘 이 자리에 부르려고 했는데, 캐릭터 구축한다고 휴대폰도 꺼 놨답니다. 극단 일도 후배들에게 맡기고 두 달 동안은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정수 선배님 작정하신 것 같은데요? 이거…… 저희도 준비 열심히 해야겠네요.”
“촬영은 내년부터죠?”
“예정은 9월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대본 리딩도 안 배우와 김 배우가 전역한 이후로 조율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그 전까지 준비 잘하고 있어요.”
촬영까지 1년 6개월이 남았음에도 일찌감치 시나리오가 지급됐다.
복무 중이라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캐릭터 구축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회귀 전과 시나리오가 달라졌어. 완성도를 떨어트린다고 지목받았던 몇몇 아쉬운 부분들이 보강됐어. 어쩌면 회귀 전의 시나리오는 미완성본이었던 걸지도 몰라.’
회귀 전에 다소 아쉽다고 느꼈던 몇몇 결함 요소들마저 개선되며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상태였다.
거기에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바뀌었고, 투자사마저도 바뀐 상황이다. 회귀 전과 많은 요소들이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회귀 전의 성적도 나쁜 게 아니다.
곽상필 감독의 유작이라는 것에 비해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었던 거지, 어쨌거나 손익 분기점을 돌파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상황이 더 좋아지게 됐다.
‘제대 전까지 차분하게 준비한다. 곽상필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고, 나 또한 제대 후 성공적으로 복귀하고. 최고의 시나리오 아니겠어?’
* * *
안시현과 김진모가 촬영한 육군 홍보 영상의 이슈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바로 김진모가 주연을 맡은 영화 『두밀령』의 홍보에 육군 홍보 영상과 관련된 내용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야 하는 제작사 입장에서는, 때아닌 육군 홍보 영상 이슈가 눈물 나게 반가웠다.
『두밀령』은 6.25 전쟁 당시의 격전지 중 하나인 두밀령 일대에서의 치열했던 전투를 2002년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가면서 조명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화려한 특수 효과를 앞세운 예고편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조금 더 많은 화제성을 원하는 건 어느 영화나 마찬가지일 거다.
게다가 김진모는 영화 홍보에 참여하지 못한다.
복무 중이기에 육군의 허가가 있어야 외부 행사에 참여할 수 있지만, 간단한 인터뷰 정도라면 모를까, 영화 홍보 행사는 좀처럼 허가가 나지 않았다.
주연 배우가 홍보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아쉬움을 채워질 화제성이 더해졌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03년 8월.
손익 분기점이 3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제작비를 투자했고, 계절을 바꿔 두 차례나 촬영하면서까지 완성도를 높였던 영화 『두밀령』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22만 관객을 동원하며 예매율 1위로 순항을 시작한 『두밀령』은, 이후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예매율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순항했다.
이후에는 예매율 1위를 놓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관객들을 불러 모으며 누적 관객 수를 늘려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개봉 88일째에 누적 관객 1000만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두 번째로 누적 관객 1000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3년에만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하나씩의 1000만 관객 영화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이에 2003년 대한영화제는 두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맞대결이라며 기대감을 모았다.
물론…….
‘결과를 알고 있으니, 관심이 크게 안 가네.’
결과를 알고 있는 안시현은 대한영화제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 포상 휴가를 받을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렇게 진행된 2003년 대한영화제에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진모는 단 2표 차이로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포상 휴가는 보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