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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1화 (9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1화>

91화. 간만에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남궁수민.

겉으로는 TV에도 수차례 나올 정도로 잘나가는 IT 업체의 대표이지만, 실상은 10년 동안 13명을 살해한 이 캐릭터는『편지』의 스토리 라인을 관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남궁수민은 살해를 할 때마다 경찰들에게 살인의 증거를 보내왔다.

이를 바탕으로 남궁수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연쇄살인으로 아내를 잃은 형사 이성우와, 그런 이성우를 동경하는 새내기 형사 황경신.

『편지』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영화지만, 남궁수민으로 시작해서 남궁수민으로 끝나는 영화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안시현이 남궁수민을 얼마나 잘 표현해 느냐가 영화의 흥행에 중요한 요소였다.

『편지』의 시나리오를 받은 이후.

제대할 때까지 지겹도록 시나리오를 읽으며 안시현은 남궁수민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동반됐다.

‘몰입도를 끌어올리면 느낌을 살릴 수 있겠지만…… 기대치를 100% 충족시키지는 못할 거야.’

가장 쉬운 방법은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거다. 『나는 간첩입니다』와 『형아, 동생』을 촬영했을 때처럼 배역에 완전히 빠져들면 된다.

다만 최선의 선택지라고 보기는 힘들다.

남궁수민은 생각보다 복잡한 캐릭터성을 지녔다. 작품 내에서의 비중 또한 지나치리만큼 높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본전도 못 건지는 캐릭터라고 봐야 한다.

회귀 전에 살인자 배역을 맡아 본 적 있는 안시현조차도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몰입도를 지나치게 끌어올리는 건,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을 통해 메소드에 대한 의존도를 낮췄던 선택과는 상반된다.

무엇보다 안시현을 가장 고민하게 만든 건…….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연기로 보여 줘야 돼. 관객들이 남궁수민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인지할 수 있는 포인트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남궁수민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관객들이 느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에 안시현은 몇몇 포인트를 만들었다. 행동과 말투를 통해 자연스레 남궁수민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항상 웃는 얼굴, 일관된 톤, 공감 능력 결여, 살인을 저지를 때에만 드러나는 감정 등.

말로는 쉽지만 직접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조금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도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악의 경우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로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했다.

항상 웃고 다니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척 연기를 하며, 유일하게 살인을 저지를 때에만 진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남궁수민 캐릭터를 말이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이 완성한 남궁수민 캐릭터는 시나리오를 쓴 곽상필 감독을 제대로 만족시켰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할 때만 하더라도 위태로웠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어느새 선을 정확히 지킬 정도로 성장했구나.’

곽상필 감독이 가장 감탄한 부분은, 안시현이 메소드연기를 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선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배역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고, 남궁수민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몰입도만을 가져가며 자연스럽게 연기해 나갔다.

메소드 연기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하는, 자신만의 메소드 연기를 보여 준 것이다.

메소드 연기의 달인인 최정수와는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타인의 연기 스타일을 모방한 게 아닌,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으로 메소드 연기를 해석하고 변화를 추구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빌딩 숲』에서 시도했던 변화를, 2년 2개월 사이에 완성했어. 이러려고 빨리 입대를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눈에 띄는 성과야. 허허허. 하여간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한다니까.’

*   *   *

안시현은 지긋지긋했던 2년 2개월의 복무 기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며 제대 후의 미래를 그려 나갔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연스러움을 더하고 몰입도를 낮춘 메소드 연기였다.

『빌딩 숲』을 통해 시도했던 변화를 2년 2개월 여 동안 완성한 것이다.

다양한 캐릭터성을 지닌 남궁수민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었던 건, 2년 2개월 동안 연기관을 완벽하게 정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뭐…… 나만 죽어라 노력해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죽어라 노력한 건 안시현뿐만이 아니었다.

김진모 또한 2년 2개월 동안 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듯, 『두밀령』과 『빌딩 숲』 때와 비교해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연기에 깊이가 생겼다.

언제 어디서든 카메라만 돌아가면 바로 몰입해서 연기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정수야 뭐…….

두말하면 입 아팠다.

『편지』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이성우 캐릭터의 구축에 들어갔다고 하더니, 첫 대본 리딩부터 뭇 배우들의 기를 확 죽이는 미친 메소드 연기를 선보였다.

안시현과 달리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렸지만, 그럼에도 몰입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괜히 메소드 연기로 정점에 오른 배우가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범들을 잡으려고 하는 베테랑 형사 이성우.

다수의 살인범을 검거하며 유명세를 탄 이성우를 존경하는 새내기 형사 황경신.

전도유망한 IT 업체의 대표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서 살인을 즐기고 경찰들을 농락하는 남궁수민까지.

최정수와 김진모와 안시현.

세 주연 배우의 캐릭터 구축과 첫 대본 리딩에서 보여 준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반면 조연 배우들의 연기에서는 몇몇 아쉬운 점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곽상필 감독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이제 막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는 걸 감안하면 대부분 기대 이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줬으니까.

첫 대본 리딩 후 마련된 회식 자리.

술 대신 물을 잔에 가득 채운 곽상필 감독이 자신만만하게 포부를 밝혔다.

“『편지』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시작한 이후로 술을 끊었습니다. 말끔한 정신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매진하고 싶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이니만큼 유독 디렉팅이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제 목표는 『편지』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사상 최고 스코어를 기록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영화 제작을 앞두고 곽상필 감독은 늘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게 목표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마지막 영화이니만큼 좀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보았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사상 최고 스코어 기록이라는 것에 눈높이를 맞췄다.

이에 배우들은…….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감독님? 이왕 목표를 높게 잡는 거, 1000만 관객 정도는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소! 1000만 관객 갑시다!”

“그럼 진모는 최초로 1000만 영화의 주연을 두 번이나 맡은 배우가 되는 건가?”

“크으~ 우리 진모 이러다 서른쯤 되면 할리우드 진출하게 생겼어.”

살인을 소재로 다룬 영화이니만큼 제대로 표현하려면 잔인한 장면이 다수 포함될 수밖에 없고, 이에 곽상필 감독은 『편지』가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을 거라고 사실상 확신하고 있었다.

잔인한 장면을 최대한 순화하며 15세 이상 관람 판정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곽상필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잔인한 장면들이 필수적으로 포함돼야 했으니까. 그 잔인한 장면들이 남궁수민의 캐릭터를 완성시켜 줄 테니까.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으면 흥행에 불리하다. 청소년 이하의 관객들을 배제한 채 성인들만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해야 한다는 제약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만큼 시나리오가 잘 나왔고, 주연 배우들이 첫 대본 리딩에서 보여 준 연기 수준이 기대치를 훨씬 웃돌았으며, 일명 곽상필 사단이라 불리는 스태프들은 일찌감치 촬영장과 소품 준비 등에 매진하고 있다.

제작비 또한 350만 관객을 돌파해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정도로 높게 책정됐다. 최고의 퀄리티를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JM액터스와 영화 제작사 혜인원은 손해를 볼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편지』에 대한 기대감은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리고…….

배우들은, 두 번째 대본 리딩부터 곽상필 감독이 디렉팅이 까다로울 수도 있다고 한 이유를 실감했다.

*   *   *

곽상필 감독은 배우들에게 디렉팅을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을 존중하고, 어느 정도는 편집과 연출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편지』는 조금 달랐다.

대본 리딩 때부터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디렉팅을 했다. 필요하다면 대본 리딩을 중단하고 배우와 캐릭터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에 몇몇 배우들은 대본 리딩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혀를 내둘렀다.

완벽하게 캐릭터 구축을 해온 최정수와 안시현과 김진모마저도 눈곱만큼이라도 아쉬운 모습이 보이면 디렉팅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와. 진짜 살벌하시다.”

“그래도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시니까.”

“차라리 지금 말해 주셔서 고맙기도 해. 촬영 시작하고 말해 주시면 수정할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치? 지금 혼나고 촬영 때 잘하면 그게 낫지. 본 무대에서 개판 치면 곤란하잖아. 눈높이가 조금 높긴 한데…… 우리 그 정도도 못 맞추는 배우들 아니잖아?”

배우들은 살벌한 디렉팅을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곽상필 감독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대본 리딩 과정에서 심도 깊은 디렉팅을 하는 게 자신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라고 판단한 것이다.

크랭크인 이후에 디렉팅을 과하게 하면 배우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임기응변으로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보여 줄 수는 있지만, 구축해 놓은 캐릭터 자체를 바꾸는 건 웬만해서는 불가능하다.

반면 대본 리딩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곽상필 감독의 디렉팅은 일부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을 놓고서 조언을 했고, 배우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편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모두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작이 훌쩍 흘러갔다.

어느새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왔다.

2004년 9월 5일 일요일.

다수의 기자들이 취재하는 가운데, 『편지』는 고사를 지내고서 크랭크인을 했다. 수십 명의 취재진이 증명하듯,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에 대한 취재 열기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심지어 이른 새벽에 하는 크랭크인인데도 수십 명의 기자가 몰린 것이었다.

기자들은 고사를 위해 마련된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했고, 대부분은 첫 촬영까지 취재하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첫 촬영을 공개하는 건, 영화 개봉 전에 꾸준히 화제성을 만들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첫 촬영 장소는 촬영장이 아닌 장례식장이었다. 오전까지 대관을 해 놓은 상황에서, 고사 겸 가벼운 아침 식사 이후 곧장 촬영 준비가 시작됐다.

『편지』에서 장례식장이 나오는 신은 도합 셋.

세 신 모두 촬영을 해야 끝내야 하기에 스태프들은 정신없이 움직였고, 배우들은 차분하게 대본을 검토하며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간만에 몸 한번 제대로 풀어 보자고.’

안시현은 세 신 중 마지막 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모처럼의 촬영을 앞두기도 안시현은 잔뜩 들떴다. 어서 빨리 자신이 구축한 남궁수민 캐릭터를 기자들 앞에서 보여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오전 7시 30분.

수십 명의 기자들이 취재를 하는 가운데,『편지』의 첫 촬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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