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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2화 (9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2화>

92화. 나는

촬영의 포문을 연 건 최정수였다.

“여보…….”

상복을 입은 이성우는 넋이 나간 채로 장례식장 구석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결혼 이후 첫 해외여행을 갈 생각에 들떠 있던 아내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인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이성우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아내의 사망이 믿기지 않았고, 몇 시간 동안은 현실성이 없었다. 이내 상황을 받아들였음에도 충격이 너무 커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에도 애써 억눌렀다.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다고 자책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아내기 전까지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장례식 이틀 째 저녁.

“선배님, 장례식장에 선배님 앞으로 택배가 왔는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죄송하지만 선배님께서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

“그게…… 보낸 사람이 형수님입니다.”

이성우의 두 눈이 커졌다.

이틀 전 사망한 아내가 택배를 보냈다는 것도 이상한데, 심지어 보낸 장소가 장례식장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택배 어디 있어?”

“옆방에서 장례식장 직원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성우가 후배 형사로부터 택배를 건네받았다.

지름 15cm 정도의 투박한 상자, 그 위에 붙여진 종이의 필체는 아내의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이성우의 머릿속에 한 연쇄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피해자의 필체로 이름을 적어 보내는 택배,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살인의 증거는 아직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한 연쇄살인 사건의 특징이었다.

이성우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내가 늘 끼고 다니던, 살해 현장인 집안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결혼반지였다.

“선배님, 이거 혹시…….”

“그래. 그 새끼야.”

결혼반지를 손에 쥔 이성우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택배살인마.

살인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피해자가 직접 적은 이름으로 살인의 증거를 택배로 보내는 연쇄살인범이다. 그놈이 이성우의 아내를 살해하고서 증거를 보냈다.

모방 범죄일 가능성은 낮았다.

언론에는 살인마가 살인의 증거를 택배로 보낸다는 사실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으드득.

이성우가 이를 악물었다. 아내의 반지를 꽉 움켜쥐며,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다짐했다.

“이 새끼…… 너만큼은 내가 꼭 잡고 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서……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   *   *

“오케이.”

곽상필 감독의 OK 사인 직후.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최정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원 테이크로 가고 싶었는데 말처럼 쉽지 않네요. NG 내서 죄송합니다.”

“연기 좋았어요, 최 배우.”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라 민망하네요.”

사실 최정수는 첫 촬영이니만큼 원 테이크로 끝내려고 했다. 원 테이크를 위해서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부터 몰입도를 끌어올렸지만…….

동선을 착각하며 원 테이크를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두 번째 시도 만에 OK 사인을 받아 냈으니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실제로 취재하러 온 기자들 또한 최정수의 연기를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메소드 연기…… 맞죠?”

“네. 직전 출연작에서 보여 준 연기와 느낌이 다른 걸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역시 최정수 배우 연기는 명불허전이라니까.”

“안시현 배우의 메소드 연기도 일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메소드 연기 하면 역시 최정수 배우지.”

“저렇게 몰입하는데도 후유증이 거의 없다면서요?”

“예전에는 심했는데, 경험을 통해서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하더라고요. 후유증이 아예 없는 건 불가능해서 최근에는 메소드에 거리를 두는 것 같았는데…… 『편지』가 중요하긴 하나 보네요.”

기자들은 최정수가 메소드 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것 자체에 꽤나 놀랐다.

후유증 때문에 메소드 연기와 거리를 두려 노력했던 최정수가, 2년여 만에 다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최정수에게 『편지』는 의미가 남달랐다.

자신을 톱배우로 성장시켜 준, 페르소나로 여겨 주는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 아니던가.

이성우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메소드가 반드시 필요했고, 최정수는 1년 넘게 이성우 역을 준비한 이유를 첫 촬영부터 제대로 증명해 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배우 최정수가 아닌 형사 이성우만이 존재했다.

‘역시 정수 선배님…… 저 모습에 홀딱 반해서 내가 메소드의 길을 걷게 됐지.’

안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최정수는 시간이 흐르며 점차 메소드와 거리를 둔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메소드 연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안시현이 변화를 시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완전히 없애는 게 불가능하니 거리를 두려고 것이었고, 메소드가 없이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 주는 최정수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반면 안시현은 메소드가 없으면 연기력이 확 떨어지기에 절충안을 도출한 것이고 말이다.

한동안 거리를 뒀음에도 최정수의 메소드 연기는 일품이었다. 배역에 대한 몰입도는 명불허전이었고, 카메라가 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몰입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이 자극을 받았다.

회귀 후 최정수와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롤 모델 앞에서, 그를 보고 배우며 맞는 옷으로 탈바꿈시킨 메소드 연기를 제대로 선보이고 싶었다.

안시현이 주목을 꽉 움켜쥐었다.

‘나도 원 테이크를 노린다.’

오늘의 목표는, 원 테이크였다.

*   *   *

두 번째 촬영은 최정수와 김진모가 함께 출연했다.

재벌 2세인 지창환의 장례식에, 지창환의 고소 건으로 안면이 있던 이정수와 황경신이 참석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의문의 택배 하나가 도착한다.

택배 안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 있었다.

토막 살인을 당한 지창환의 신체 중, 유일하게 발견되지 않은 신체 부위가 하나 존재했다.

바로 왼손 중지였다.

감식 결과.

택배 안에 들어 있던 손가락은 지창환의 것이 맞았다. 택배 위에 적혀 있던 글씨도 지창환의 필체였다. 택배살인마의 13번째 살인 대상이 바로 지창환이었던 것이다.

감식 결과가 나온 이후.

“경신아.”

“네, 선배님.”

“모방 범죄라고 생각하냐?”

“……헷갈리지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따라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내용도 연결되고 있고요.”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 이게 모방 범죄가 아니라면, 택배살인마는 어째서 열 번째 살인부터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 주기 시작한 걸까?”

“그건…….”

이성우의 첫 번째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던 황경신은, 두 번째 질문에는 쉽사리 답을 내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시간이 흐르며 택배살인마에 대한 꽤나 많은 정보가 언론을 통해서 공개됐지만, 그렇다고 모든 정보가 공개된 건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택배살인마의 편지였다.

열 번째 살인부터 택배살인마는 택배 안에 편지를 넣어서 함께 보냈다. 언론을 통해 택배살인마와 관련된 몇몇 정보가 공개된 바로 직후였다.

열세 번째 피해자인 지창환에 이르기까지, 도합 네 통의 편지가 전달됐다.

편지의 대상은 바로 경찰이었다.

[미안하지만 정정해 줘야 할 부분이 하나 있어. 7명이 아니라 9명을 죽였어. 아, 이 여자까지 포함하면 이제 딱 10명을 채웠네.]

[내가 보낸 선물은 좀 마음에 들었어? 언론에서 실컷 떠들라고 특별히 잔인하게 죽여 봤는데 말이야.]

[조금 더 분발해 봐, 친구들. 이러다가 단체로 백수 되면 누가 날 잡겠어? 왜 그렇게 멀리 돌아가려고만 하는 거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몰라?]

[이제 좀 잡을 때도 되지 않았어? 슬슬 재미없어지려고 하네. 조금만 더 분발해 줬으면 좋겠어. 잊지 마.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어.]

자필이 아닌 인쇄를 했고, 지문은 물론이거니와 보낸 대상을 특정 지을 만한 그 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 않은 편지 네 통.

그 안에 내포된 메시지는 명확했다.

“이 새끼, 지금 우리 놀리고 있는 거야. 우리가 절대 자신을 못 잡을 거라 생각하고 즐기는 거라고.”

“……이해는 돼요. 우린 정말로 놈에 대해서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잖아요.”

“아니.”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정수는 황경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파악한 부분이 극히 적어서 그렇지, 파악한 부분이 아예 없는 건 결코 아니었다.

“열두 번째에서는 피해자가 자의로 남긴 흔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의도한 건지 실수인 건지 모르겠지만, 이전과 달리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커.”

이성우가 미소를 지었다.

웃을 만한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상황임에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유독 의기소침해진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기죽지 말고 힘내자. 다른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언론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우리만큼은 끝까지 놈의 흔적을 쫓아야 하잖아. 우린 형사니까.”

*   *   *

애석하게도 두 번째 신 또한 단역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실수와 동선 문제가 차례대로 나오며 원 테이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 번째 시도 만에 OK 사인을 받은 뒤.

김진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간만의 촬영이라 긴장됐는데 다행히 세 번 만에 OK 받았네요.”

“얼씨구. 긴장한 사람이 그렇게 연기를 잘해?”

“2년 2개월 만에 카메라 마사지 받으면 긴장 안 할 수가 없다니까요. 저 진짜 토하는 줄 알았어요.”

간만의 촬영이라 긴장했다는 말과 달리, 막상 김진모는 카메라가 돌아가자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2년 2개월의 공백은 타고난 재능을 무뎌지게 하지 못했다.

물론 당사자인 김진모는 OK 사인이 나올 때까지 심하게 긴장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아, 시현이 저 미친 자식은 안 할 수도 있겠네요.”

일순간.

장례식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안시현에게 집중됐다. 이내 최정수와 곽상필 감독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도 긴장 안 한다에 한 표.”

“허허허. 안 배우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긴장하는 모습을 도통 못 봐서 말이죠.”

두 번째 신까지 촬영이 끝났다.

이제는 안시현이 2년 2개월 만의 촬영에 임하게 될 차례가 다가왔다.

기자들과 배우들의 시선이 한데 집중된 상황 속에서도, 안시현은 긴장한 기색 없이 비교적 차분하게 마지막으로 대본을 검토했다.

최정수와 곽상필 감독의 예상이 맞았다.

안시현은 눈곱만큼도 긴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어떻게 해야 기자들에게 남궁수민의 첫 인상을 강하게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내기는 관심이 없지만…… 첫 원 테이크를 기록하고 싶긴 하네. 나름 의미가 있잖아.’

대본 리딩 당시.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 원씩을 걷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원 테이크로 촬영을 끝내는 배우들이 그 돈을 나눠 가지기로 했다.

원 테이크는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니다. 대사가 겹치거나, 동선을 착각하거나, 혹은 스태프와 엑스트라의 실수로 NG가 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니까.

실제로 최정수와 김진모도 연기가 아닌 다른 이유로 원 테이크에 실패하고 말았다.

원 테이크에 성공할지는 알 수 없다.

안시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고서 원 테이크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대본 검토 후.

안시현과 곽상필 감독이 시선을 마주쳤다.

“준비됐어요, 안 배우?”

“네. 완벽합니다.”

“그래요. 그럼 준비하고 바로 들어가죠.”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나는 남궁수민이다. 나는 남궁수민이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의식을 치렀다. 2년 2개월 만의 촬영을 앞두고서 전력투구를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게 시작된 세 번째 촬영.

남궁수민은 웃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보여 주는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로, 다른 사업가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한 곳을 응시했다.

바로 이정우와 황경신의 뒤통수였다.

형사 두 명이 조문을 와 있던 자리에, 지창환의 살해 증거가 택배로 배달되던 그곳에, 택배살인마 남궁수민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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