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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4화 (9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4화>

94화. 그게 아니야

첫 촬영 다음 날.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과 면담을 했다.

“첫 촬영 아주 좋았어요. 확실히 안 배우는 촬영에 들어가야 제대로 진가가 드러나는군요.”

“감독님의 조언 덕분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허. 제 덕이 아니라 안 배우가 연기를 잘 한 거예요. 조언이라고 해 봐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남궁수민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다.

대체로 사이코패스 캐릭터 메소드 연기를 주력으로 삼는 배우들에게는 연기하기 부담이 큰 배역 중 하나다.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몰입하는 것이 메소드 연기인데, 깊게 빠져들었다가는 다른 그 어떤 배역보다도 후유증이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코패스 캐릭터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배우의 전례가 있다. 그 사건은 메소드 연기에 대한 회의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에 안시현이 또한 남궁수민 캐릭터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곽상필 감독은 그런 안시현의 걱정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조언을 해 주었다. 국내에선 찾기 힘든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풍부한 자료 제공은 덤이었다.

“전 안 배우가 남궁수민 캐릭터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캐릭터와 일정 수준 거리를 유지해 보는 게 어때요? 장담하건데 안 배우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으음…….”

안시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배역이었다면 선뜻 시도를 해보았겠지만, 사이코패스 캐릭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국…….

“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안시현은 고민 끝에 곽상필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상 상태로도 남궁수민 캐릭터의 완성도는 높은 수준일 거라고 자신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끌어올려서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곽상필 감독의 조언은 효과적이었다.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건네받은 사이코패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남강수민 캐릭터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연기했던 그 어떤 캐릭터보다, 완성도로 따지면 가장 높았다고 자부하는 『형아, 동생』의 주지성보다도 완성도는 더 높았다.

그 상태에서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을 통해 꾸준히 시도했던 변화를 접목해 보았다. 남궁수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완성도를 높인 덕분에 캐릭터성이 확 살아난 반면, 메소드 연기로 인한 후유증 자체는 『빌딩 숲』 때보다도 더 줄어든 것이다.

안시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곽상필 감독은 자신이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는 걸, 지레 겁먹은 채 남궁수민을 대할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이다.

이제는 메소드 연기의 정의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로 연기를 하게 됐지만…….

안시현은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연기 방식에 목맬 필요가 있겠어? 수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완성된 남궁수민 캐릭터는 첫 촬영에서부터 곽상필 감독을 제대로 만족시켰다.

급기야…….

“신 22와 35를, 최대한 빨리 촬영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그러는 편이 안 배우에게도 좋지 않겠어요?”

곽상필 감독은 남궁수민 캐릭터에게 있어 중요한 두 신을 빠르게 촬영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편지』의 초반부.

사이코패스 남궁수민의 잔혹함을 제대로 드러내는 신이자, 『편지』가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신이 두 개 존재한다.

그게 바로 신 22와 신 35다.

첫 대본 리딩 당시 연기했던 신 21의 연장선이자, 남궁수민이 지창환을 고문하며 희열을 느끼는 신 22.

고문 끝에 지창환이 남궁수민이 그토록 바라던 말을 하면서 사이코패스로서 면모가 완전히 드러나는 신 35.

이 두 개의 신은 영화 초반부에 남궁수민이라는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어필할 수 있지만, 어설프게 표현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장면이기도 하다.

곽상필 감독이 이 두 신을 일찌감치 촬영하자고 제안한 건, 그만큼 첫 촬영에서 보여 준 안시현의 남궁수민 캐릭터의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 안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도 좋습니다.”

“허허허.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촬영하도록 하지요.”

“네.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안시현은 신 22와 신 35 촬영에 임하게 됐다.

*   *   *

신 22의 촬영을 시작하기 전.

곽상필 감독은 스태프들에게 소품을 꼼꼼히 체크해 달라고 부탁했다. 배우의 연기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리테이크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남궁수민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신이니만큼, 안시현이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를 위해 안시현에게 이틀 동안 신 22와 신 35, 두 장면만 촬영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루에 한 신만 촬영하면 되는 상황.

온전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지만, 바꿔 말하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는 하루 종일 한 신만 촬영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지점은…….’

스태프들이 분주히 촬영을 준비하는 사이.

안시현은 최종적으로 대본을 검토하며 신 22를 어떻게 연기할지를 계속 고민해 나갔다. 함께 촬영해야 할 신인 배우 강주원과 미리 연습을 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연습이신데도 이렇게 몰입하시다니,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존경합니다.”

“그 존경한다는 말, 조만간 100번 채울 것 같은데?”

“100번이 아니라 10,000번도 할 수 있습니다!”

강주원은 말끝마다 존경한다고 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형아, 동생』에서 안시현의 연기를 보고서 모델 생활을 청산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올인했다고 한다. 연기를 시작하게 된 우상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으니, 말끝마다 존경한다고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안시현은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열정 넘치는 후배가 롤 모델이라고 좋아해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훗날 꽤나 성공하게 될 배우가 자신을 존경한다면서 따라다니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간이 흘러 소품 준비가 모두 마무리되자, 곽상필 감독이 안시현과 강주원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안 배우, 강 배우. 준비됐어요?”

안시현과 강주원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완벽합니다.”

“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촬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의식을 치른 안시현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조용한 집 안.

남궁수민이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지하실로 걸어 내려갔다.

지하실의 문을 열기 전.

문 앞에 걸어 두었던 의사 가운을 입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원래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해진 가운을 걸친 순간…….

“아아아…….”

남궁수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고서, 양팔을 벌리며 차가웠던 손발에 피가 도는 느낌을 만끽했다.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쌓인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고문실 겸 살인 장소.

천국이라고 명명한 지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남궁수민이, 의자에 몸이 결박된 지창환에게로 다가갔다.

짝! 짝!

그리고는 거칠게 뺨을 후려쳤다.

“죽었어요? 안 죽었죠? 안 죽었네. 벌써 죽으면 제가 정말 곤란하거든요. 지혈도 해 줬고 빨간 약도 발라 줬으니까, 오늘은 가볍게 손가락 하나 정도 잘라볼까 해요. 그래도 괜찮겠죠?”

“나……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냐고!”

“이거 되게 여러 번 말한 거 같은데, 지창환 씨는 저한테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럼 날 죽이려는 이유가 뭔데! 말해 봐! 이유라도 좀 알자고!”

“혹시, 삼겹살 먹으면서 죄책감 느낀 적 있어요?”

“……삼겹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지창환의 표정이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물어보는데 뜬금없이 삼겹살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헛소리란 말인가?

웃긴 건…….

정작 삼겹살 이야기를 꺼낸 남궁수민은 특유의 미소조차 짓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해 나갔다는 것이었다.

“삼겹살 먹으면서 돼지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겠죠? 오히려 도축하면서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한테 살인이란 그런 거예요. 희열을 느끼기 위한 수단. 당신은 그냥, 길 가다 개똥 밟았다고 생각하면 돼요.”

“…….”

지창환이 할 말을 잃었다.

사람 죽이는 걸 돼지를 도축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이 미친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자신을 살려 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창환은 남궁수민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실패했다. 동아줄이 될 만한 힌트를 찾지 못했다.

결국 지창환은…….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네. 무사할 거 같아요. 12명을 죽였는데, 경찰은 제 그림자조차 밟지 못하고 있거든요.”

“아버지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공권력의 힘을 빌리는 건 물론이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네놈을 찾아내고 말 거라고!”

“제발 그래 줬으면 좋겠네요. 짜릿할 것 같아.”

눈앞에 있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자신을 살려줄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서,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를 지은 남궁수민이 깨끗이 씻은 과도를 들고 지창환에게로 다가갔다. 이내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 둘째 마디를 과도로 그어 나갔다.

피가 흐르는 지창환의 새끼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남궁수민은…….

쿵!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도끼를 집어 들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쳐 정확하게 왼손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절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과도는 절단면을 표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아아악! 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

지창환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손톱과 발톱이 다 뽑혔다. 몸에는 구타로 인한 피멍과 칼에 베인 흉터도 제법 많았다. 고문이라면 이제 제법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고통은, 이성을 상실하게 할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정작 남궁수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지창환의 손가락을 지혈해 주기 시작했다. 그놈의 빨간약을 발라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오늘도 재밌었어요. 지창환 씨는 몸도 좋고 건강하니까, 제가 죽였던 사람들 중 가장 오래 버텨 줄 거라고 믿고 있어요. 아. 혹시 일찍 죽고 싶으면,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면 돼요.”

“미친 연쇄살인마 새끼야! 넌 사람도 아니야 시발 새끼야!”

“아쉽지만 틀렸어요.”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지창환을 무시한 채, 볼일을 끝낸 남궁수민이 몸을 돌렸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이내 지하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신 22의 마지막 대사와 행동이 끝난 상황, 곽상필 감독은…….

“OK.”

단 한 번의 촬영 만에 OK 사인을 냈다.

동문서답을 하며 고문 행위에 집중하는 남궁수민, 고문을 당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남궁수민에게 욕을 내뱉으며 반항하는 지창환.

안시현과 강주원은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강 배우가 잘 받아 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안 배우의 감정 표현이 너무 좋았어. 지창환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이 할 일을 하는 사이코패스로서의 특색을 아주 잘 표현해 줬어. 문제는 강 배우인데…….’

곽상필 감독은, 고민 끝에 신 22의 촬영을 원테이크로 끝내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리테이크 대신…….

“안 배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안시현과 대화를 나누는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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