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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5화 (9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5화>

95화. 눈곱만큼의

곽상필 감독과 안시현은, 신 22의 촬영본을 함께 확인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잘 나왔죠?”

“네. 원테이크로 가도 손색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물론 안 배우가 원한다면 다시 촬영해도 괜찮습니다만…… 솔직히 이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강 배우와의 호흡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곽상필 감독은 혹시나 안시현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리테이크를 해 줄 생각이 있었지만…….

원테이크로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시현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는 것과 별개로, 강주원에 대한 기대치와 방금 전 촬영 과정에서 보여 준 호흡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판단이었다.

강주원은 좋은 자질을 지닌 배우지만, 대학 재학 중 오디션에 합격한 신인 배우다.

사이코패스를 눈앞에서 보는 듯한 연기를 보여 준 안시현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연기를 보여 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봐야 한다.

헌데 강주원은 그 이상을 보여 줬다.

오랜 고문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

자신이 살아 나갈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내다가 손가락이 잘린 고통에 몸부림치는 강주원의 지창환 연기는 명품이었다.

당초 곽상필 감독이 강주원을 캐스팅하면서 바랐던 기대치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연기였다.

그로 인해 리테이크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몇 번을 다시 촬영하든 강주원이 방금 전과 같은 수준의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OK 사인이 나온 이후 강주원은 자신이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얼떨떨해하는 눈치였다. 의도한 게 아니라, 안시현의 연기에 보폭을 맞추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 준 것이라고 봐야 했다.

이에 안시현은…….

“만족합니다. 주원이가 잘 받아 준 덕분에 문을 열고 지하실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원이랑 방금 전보다 더 좋은 호흡을 보여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음. 역시 그렇겠죠?”

곽상필 감독의 생각에 동의했다.

안시현은 직접 연기를 한 입장이기에, 강주원이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 줬다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느꼈다. 때문에 리테이크를 하더라도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강주원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었다.

방금 전 보여 줬던 강주원이 연기가, 며칠 동안 촬영하면서 보여 준 수준을 비정상적으로 상회하는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갑자기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리는 없고…… 캐릭터에 과하게 몰입한 상태였다고 보는 게 맞겠지. 같은 연기를 또 보여 주기는 힘들 거야.’

리테이크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리수철의 자결 신을 연기할 때처럼, 촬영을 반복하다 보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함께 연기하는 배우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욕심을 부릴 순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선배 배우들과 함께 연기했고, 지금은 『편지』가 데뷔작인 신인 배우와 단둘이서 호흡을 맞춰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당시 많은 선배 배우들이 안시현에게 조언을 하고 이끌어 줬듯이, 지금은 안시현이 강주원을 이끌어 줘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촬영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 어쩌면 방금 전 보여 준 연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촬영을 해 보았지만…….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강주원은 첫 촬영 때처럼 신이 끝날 때까지 몰입하지도 못했다. 안시현의 연기에 기가 죽어서 중간에 대사를 까먹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집중하겠습니다!”

“허허허. 괜찮아요, 강 배우. 신 22는 첫 번째 촬영본으로 갑니다. 손가락 잘리는 부분이랑 특수 효과 처리를 할 부분만 대역 써서 촬영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강주원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정작 곽상필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넘겼다.

‘자기가 더 좋은 연기를 잘했다면, 신 22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었을 거라고 자책하는 거겠지. 그게 안 될 거라는 것을 아니까 속상할 테고.’

안시현은 속상해하는 강주원에게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연기 잘해 놓고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어?”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분발했다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실 수 있으셨을 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네가 잘해 줘서 두 번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건데? 뭐…… 정 미안하다면, 나랑 같이 연습하러 가자.”

“……연습이요?”

“신 35에서 아쉬운 부분이 좀 있어서 연습 좀 하다가 들어갈 생각이거든.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든든하게 식사하고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형이 뭐든지 다 사 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시현은 최정수를 비롯한 다른 선배 배우들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연기 인생에 도움이 되는 그럴듯한 조언을 강주원에게 해 주지 못했다.

그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답을 제시하기로 했다.

함께 연습을 하는 게 그것이었다.

미리 호흡을 맞춰 보면서, 연기와 관련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한 번에 촬영하는 게 힘들다면 몇 번에 나눠서 촬영하면 그만이다. 연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끊어 갈 타이밍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 35는 눈곱만큼의 아쉬움조차도 남아서는 안 돼. 주원이와 아침까지 연습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만 해.’

*   *   *

촬영장을 떠나기 전.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내일은, 100% 절 만족시켜 줄 수 있겠지요?”

“1%라도 부족하면, 동이 틀 때까지 촬영해서라도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할 때가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그때처럼 결과물만 보장된다면, 몇 십 번을 촬영하더라도 괜찮습니다.”

“10번 안으로 끝낼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신 35.

사이코패스로서의 진면모가 드러나게 될, 영화 초반부의 핵심인 이 신에서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신 22는 100%가 아니라도 괜찮았지만, 신 35는 반드시 100%를 보여 줘야 한다. 애초에 그것을 기대하고 안시현을 캐스팅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안시현은 강주원을 데리고 JM액터스 사옥으로 향한 것이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가볍게 산책을 하며 소화를 시킨 뒤, 연습실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몇 번의 호흡을 맞춘 뒤.

“잠깐 쉬었다 갈까?”

“네, 선배님! 마실 것 좀 사 올까요?”

“너 슈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쉬고 있어. 내가 가서 사 올 테니까.”

안시현이 쉬는 시간을 핑계로 자리를 떴다. 사옥에서 3분 정도 떨어진 슈퍼에 가서 음료수와 주전부리를 구매하며 생각에 잠겼다.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확실히 자질 자체는 좋은 편이야. 끊어 갈 타이밍만 잘 잡으면 여러 번 리테이크를 안 해도 되겠어.’

확실히 강주원은 괜찮은 배우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집중을 오래 못해서 그렇지, 기본적인 자질 자체는 수준급이었다. 그러니까 훗날 흔히 말하는 A급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

신인 때부터 모든 걸 만족시키는 배우는 드물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김진모와 회귀로 인해 신인이라고 볼 수 없는 안시현이 이례적인 케이스였던 거다. 부족한 부분이야 함께 연기하면서 보완해 주면 되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안시현이 슈퍼에서 돌아왔을 때.

“뵙,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

“허허허. 은퇴한 지 오래돼서 선배라는 호칭은 부담스럽네요. 그나저나…… 연기 잘하던데요?”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부분이야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겠어요? 저희 JM액터스와 함께하면 그 기간이 더 줄어들 것도 같은데……. 어때요, 소속사가 없다면 함께 일해 보지 않겠어요?”

연습실 안에서는 김진석 대표가 강주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대표님?”

“아까 연습하던 거 구경하다가 방해될까 봐 서류 보고 있었지. 쉬는 것 같아서 와 봤다.”

“주원이랑 계약하려고요?”

“우리가 제대로 케어를 한다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허허허. 자꾸 눈길이 간단 말이지.”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의 안목에 새삼 감탄했다.

아직 뭐 하나 보여 준 게 없는 신인 배우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일찌감치 계약을 하고 싶어 하다니, 상장을 앞둘 정도로 JM액터스를 성장시킨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다.

‘JM액터스와의 계약은 주원이한테 나쁜 선택지는 아닐 거야. 이상한 소속사랑 계약해서 계약 무효 소송을 진행하며 마음고생을 하는 것보다야, JM액터스와 계약해서 연기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안시현은 강주원과 JM액터스의 계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강주원에게 계약을 권유할 생각은 없었다.

계약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이 주체가 되어 판단해야 잡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약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일단은 연습을 마저 해서 돼서요. 해 질 때까지만 집중할게요.”

“그래. 간만에 같이 저녁식사나 하자꾸나. 강 배우님도 함께하시죠.”

“물론입니다!”

해질 무렵까지 이어진 연습은 나름 만족스럽게 마무리가 됐다. 안시현은 저녁 식사 후에 조금 더 연습을 할 생각이었지만, 강주원과는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연습하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고, 끊어 갈 타이밍도 확인했으니까 충분해.’

연습을 통해 필요한 건 모두 얻었으니까.

연습 이후 김진석 대표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대선배이자 대형 연예기획사의 대표인 김진석 대표와의 식사에 강주원은 적잖게 감동한 눈치였고, 심지어는 김진석 대표가 지나가는 듯이 한 조언을 다이어리에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기록하기까지 했다.

안시현은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신인보다야 풋풋하고 싹싹하며 열정 넘치는 신인이 더 좋은 건 당연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강주원은 JM액터스와의 3년 전속 계약서에 사인을 한 상태였다. 감정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닌, 자신의 연기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기에 안시현은 축하를 해 줬다.

다음 날 오전.

강주원은 안시현과 함께 박정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서 『편지』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같은 영화를 촬영하는 만큼 담당 매니저가 정해지기 전까지 임시로 박정상과 최봉팔이 강주원을 케어하기로 한 것이었다.

촬영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맞춰볼까?”

“네! 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시현과 강주원은 최종적으로 호흡을 맞춰 보면서 신 35에서 모든 걸 쏟아낼 준비를 끝마쳤다.

“감독님. 신 35는 원테이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눠서 촬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제 주원이랑 연습하면서 느낀 건데, 역시나 신 35는 나눠서 촬영해야 퀄리티가 살아날 것 같아서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제 연습하면서, 끊을 만한 타이밍이 좀 보이던가요?”

“몇 군데 보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곽상필 감독에게 신 35를 도합 세 번에 나눠서 촬영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괜찮겠네요. 일단은 그렇게 세 번 나눠서 촬영하는 걸로 진행하도록 하죠.”

이에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의 의견을 받아들여, 신 35를 세 번 나눠 촬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또한 세 번에 나눠 촬영할 생각이었고, 공교롭게도 끊는 지점마저도 안시현과 의견이 일치했다.

“안 배우랑 강 배우가 스탠바이 됐으니 바로 들어가도록 하죠. 특수효과 팀, 바로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신 35의 촬영.

쾅!

안시현이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안시현의 보여 준 남궁수민 연기는, 신 22에서 보여 준 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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