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6화 (9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6화>

96화. 잘 알고 있으니까

사이코패스에 대한 대중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에게도 감정이 존재한다.

다만 공감 능력과 죄책감 결여 등 비롯한 반사회적 행동을 보이는 건데,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사이코패스가 있더라도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다.

사이코패스가 검거되어 잔혹한 범행이 알려진 뒤에 놀라는 지인들의 반응은, 대중 매체에서 지겹게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보통 사이코패스의 감정이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만 발현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남궁수민 또한 그러했다.

대외적으로는 상장을 앞둔 IT기업의 대표로 활동하며 감정을 억눌렀지만,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내면 깊은 곳에 꽁꽁 감춰주었던 왜곡된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다만 살인마저도 남궁수민의 본성을 모두 끄집어내진 못했다.

첫 살해 대상에게 들었던 한마디만이 그의 본성이 전부 드러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남궁수민은 살인을 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고문을 반복했다. 정신이 피폐하게 만들면 원하는 말을 해 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다만…….

원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살해 대상을 계속해서 살려둔다는 말은 아니었다.

남궁수민은 평소와 달리 지친 기색을 잔뜩 드러내며 지하실로 내려왔다. 의사 가운을 걸쳤음에도 특유의 미소조차 짓지 않은 채,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고서 몸을 비틀거렸다.

그 탓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수많은 고문 도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하아…….”

남궁수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동자가 반쯤 풀린 상태로 바닥에 떨어진 고문 도구들 중 스패너를 집어 들었다.

비틀거리며 지창환에게로 다가가 남궁수민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넋두리를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어요. 이럴 때면 어머니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라요. 5살 때였나? 키우던 강아지와 장난을 친답시고 귀를 잘랐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셨고, 제가 평범하게 살길 바라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죠. 덕분에 촉망받는 IT기업의 대표이자, 천재로서 잘살고 있죠. 아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전 일찌감치 사회에서 격리됐을 거예요.”

남궁수민의 이야기에 지창환은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옅은 호흡을 불규칙하게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남궁수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요? 기절했어요? 아니면, 내 말 듣고 있으면서도 무시하는 거예요?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난…….”

남궁수민이 스패너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을 잔뜩 주고서 지창환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퍽! 퍽! 퍽!

“아악! 아아악!”

“내 말을! 무시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고!”

남궁수민은 수차례 지창환의 오른손을 후려친 뒤에야 스패너를 집어 던졌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좋아요. 이제 좀 제 말을 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 거 같네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그거 알아요? 내가 처음으로 죽인 대상이 바로 어머니예요. 암에 걸리셔서 엄청 아파하셨거든요.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셔서, 제 손으로 편하게 보내 드렸어요. 이 말을 왜 하냐고요? 이제 슬슬, 창환 씨에게 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요.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요. 말을 하건 안 하건, 창환 씨는 오늘 죽어요. 내가 그렇게 정했거든요.”

두 번에 달하는 긴 대사가 끝난 직후.

“컷.”

안시현과 강주원과 미리 이야기를 했던, 첫 번째 끊어 가는 지점에서 곽상필 감독이 컷 사인을 냈다.

“잠깐 쉬었다, 주원 씨 분장 다시 한번 점검한 뒤에 두 번째 촬영 진행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태프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강주원은 달리, 안시현은 조용히 지하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주원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안시현은, 안시현이 아니라 남궁수민을 보는 것 같았다. 자상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평소의 분위기와 달리 말을 거는 게 조심스러웠다.

옆으로 조금만 다가가도 자신을 향해 몽키 스패너를 휘두를 것만 같았다.

그런 강주원에게 박정상이 다가와 속삭였다.

“시현이 분위기 장난 아니지?”

“아, 네. 배역에 몰입하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던데……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시현이도 자주 보여 주는 모습은 아니야. 작품당 한 번, 많아야 두세 번 정도지. 그만큼 신 35가 중요하다고 판단을 한 거고.”

강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인 자신의 시선으로 봐도 안시현이 방금 보여 준 연기는 수준이 남달랐다. 매 순간 이런 연기를 보여 준다는 게 상상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중요한 신이니만큼 힘을 준 게 보이는 상황.

덕분에 강주원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제가 잘해야겠네요.”

“너무 부담 가지지 마. 배우들 전담하면서 느낀 건, 과한 의욕과 부담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있다는 거야. 역량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보여 준다고만 생각해. 그러면 좋은 결과가 따라올 거야.”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지 말라는 거군요. 명심할게요. 후우…….”

휴식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강주원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하면 최후를 앞둔 지창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역량으로 가능할까 수없이 고민하며 이미지를 그려 나갔다.

‘어제 연습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리자. 할 수 있을 거야. 시현 선배님도 칭찬해 주셨잖아.’

안시현은 안시현대로, 강주원은 강주원대로 두 번째 촬영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해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신 35의 두 번째 촬영.

스패너로 수차례 오른손을 얻어맞으며 고통에 몸부림친 지창환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궁수민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나, 나 너무 아파요. 이제 제발 그만해요. 이 정도면 원하는 대로 실컷 괴롭혔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말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고요.”

“……그게 아니야.”

남궁수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당장에라도 지창환을 죽일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목청껏 절규했다.

“말해 달라고! 미칠 것 같으니까 제발 말해! 말하라고오오오!”

지독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지창환과, 원하는 대답을 듣고서 지창환을 죽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남궁수민.

지창환은 남궁수민이 자신에게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지만…….

“미안해요. 미안한데, 진짜 모르겠어요. 백날 고문해도 원하는 대답은 못 들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나 좀 죽여 줘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랜 고문 끝에 마침내 남궁수민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그 순간.

남궁수민이 이전보다 더 거칠게,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몸을 떨었다. 동시에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평소와는 다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맺혔다.

죽여 달라.

어머니를 살해할 당시 들었던 그 말이, 남궁수민의 스위치를 켜는 키워드였다.

“컷.”

동시에 두 번째 컷 사인이 나왔다.

“숨 좀 돌리고 세 번째 촬영 바로 가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주원은 여전히 스태프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고, 안시현은 몰입감을 이어가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지하실 구석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몇몇 스태프들의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죽여 달라는 말을 들은 이후 보여 줬던 안시현의 연기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눈앞에 있다면 이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했다.

‘메소드 연기를 보고 소름이 돋는 건, 최 배우 이후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소름이 돋은 건 곽상필 감독 또한 마찬가지였다.

촬영 초반에 보여 줬던 연기와 달리, 사인이 났음에도 안시현은 몰입감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남궁수민에 완전히 몰입한 채, 최고의 컨디션으로 신 35에 모든 걸 쏟아내고야 말겠다.

첫 번째 신은 깔끔했고, 두 번째 신은 소름이 돋았다. 과연 세 번째 신에서, 안시현은 어떤 연기를 보여 줄까?

‘안 배우라면 사이코패스보다도 더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 나간 표현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   *   *

휴식 후 시작된 신 35의 세 번째 촬영.

“아아…….”

몸을 부들부들 떨던 남궁수민의 눈동자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남궁수민은 진심으로 기뻤다.

지창환으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게, 자신이 죽음을 바라는 한 생명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게, 그로 인해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테이블 위에서 망치를 들고 온 남궁수민이, 왼손으로 지창환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원하던 대답을 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많이 힘들었죠? 이제 편하게 해 줄게요.”

“크흐흐…… 미친 새끼. 설마 죽여 달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죽여 달라는 말을 듣고서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건가?”

죽음을 앞둬서일까, 아니면 남궁수민의 말로 인해서 퍼즐 조각이 맞춰진 걸까?

지창환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정신 나간 연쇄살인마는 죽여 달라는 말을 들어야지만 살인을 하는 것 같았다. 급소를 집요하게 피해 고문하면서 치료를 해 주고, 식사도 꾸준히 챙겨 주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건, 오로지 죽여 달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래야지 자신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그거 알아?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또라이야.”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싱긋.

남궁수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퍽! 퍽! 퍽!

이내 지창환의 머리에 거칠게 망치를 휘둘렀다. 고문을 하며 그동안 기다렸던 만큼 마음껏 만끽했다.

얼굴에 핏방울이 잔뜩 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눈에 들어갔음에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거침없이 망치를 휘둘렀다.

지창환의 숨이 끊어졌음에도 수차례 망치를 휘두른 뒤에야, 남궁수민이 망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이미 숨이 끊어진, 처참한 상태로 최후를 맞이한 지창환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신 35의 마지막 대사가 끝이 났다.

안시현과 강주원을 번갈아 바라보던 곽상필 감독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서 결론을 내렸다.

“OK. 수고했습니다.”

신 35는 몇 번을 더 촬영하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몰입도를 끌어올린 안시현의 사이코패스 연기는 두말하면 입 아팠고, 강주원 또한 NG가 나지 않게 집중력을 유지하며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역시, 원테이크를 포기하는 게 맞았어.’

결과적으로 세 번에 나눠서 촬영하자고 한 안시현의 제안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원테이크를 노렸다면 강주원의 집중력이 끝까지 유지됐을 거라고 확신하기 힘들지만, 세 번에 나눠서 촬영한 덕분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오히려 갈수록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연기력을 제대로 폭발시켜 주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OK 사인이 나자마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주원이 너도 고생했어. 오늘 연기 완전 좋았어. 특히 욕이 아주 찰지더라. 감정 이입 제대로 했나봐?”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게 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안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은 채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자신과 최고의 호흡을 보여 준 강주원을 칭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상필 감독은 확신했다.

『나는 간첩입니다』 뒤풀이 당시, 신인 배우 두 명에게 마지막 페르소나가 되어 달라고 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