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7화>
97화. 찾았다
『편지』를 구상하기 시작했을 당시.
곽상필 감독을 가장 고민하게 만든 캐릭터는 단연 남궁수민이었다. 이 제정신이 아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제대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배우를 찾지 못한다면, 『편지』의 제작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편지』 자체가 남궁수민의 연쇄살인 행각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에 당연한 판단이었다.
사실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기는 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최정수에게 남궁수민을 맡기면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남궁수민만큼이나 중요한 이성우를 맡길 배우가 없어진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게다가 최정수 본인은 남궁수민이 아닌 이성우를 원했다. 자신에게는 이성우가 더 잘 맞는 옷이라 판단했고, 이는 곽상필 감독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배우 본인이 남궁수민을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렇게 『편지』의 제작은 잠정 보류됐다.
곽상필 감독이 『편지』의 제작을 다시 결정하게 된 건,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며 실시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안시현과 김진모를 지켜보면서부터였다.
이 두 배우가 제대로 성장해 준다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제대로 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예상보다 준비 기간이 짧아졌지만…….
결과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안시현은 남궁수민 그 자체였다. 『편지』의 핵심인 미친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신 22와 신 35.
후반부의 전반적인 감정 표현들과 더불어, 남궁수민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중요했던 두 신의 촬영이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끝났다.
분명 좋은 일이건만…….
곽상필 감독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허허허…… 10년만 더 젊었다면, 안 배우와 함께 더 많은 작품을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저 재능 넘치는 배우와 더 이상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게, 『편지』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렇다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감독으로는 39년,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기간을 포함하면 무려 48년을 영화만 보고 달려왔다.
열정과 별개로 몸과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편지』 이후에 작품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설사 만든다 해도 지금껏 쌓아 온 명성에 흠집을 내는 졸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박수 칠 때 떠나라.
곽상필 감독은 이 말을 참 좋아했다.
열정과 별개로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멋지다 생각했고, 자신이 바로 그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랐다.
‘뭐…… 안 배우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처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겠지.’
아쉬움과 별개로 곽상필 감독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최고의 결과를 맞을 수 있게 모든 걸 쏟아 내는 것.
영화 한 작품을 위해 기꺼이 6개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기로 결정해 준, 『편지』에만 올인을 해 주고 있는 배우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 * *
신 22와 신 35 이후.
안시현이, 그리고 남궁수민이 『편지』의 촬영 과정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남궁수민의 존재감은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몰려 있는 편이다. 중반부를 이끌어 나가는 건 남궁수민의 행적을 쫓는 이정우와, 그런 이정우를 롤 모델로 삼은 신출내기 형사 황경신이다.
‘확실히 구경하는 맛이 있다니까.’
덕분에 안시현은 한동안 마음 편하게 최정수와 김진모의 촬영을 구경하는 일이 많았다.
최정수와 김진모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복수에 눈이 먼, 자신의 아내를 죽인 택배살인마를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베테랑 형사 이정우는 최정수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메소드 연기는, 택배살인마에 대한 집념과 광기를 제대로 표현해 냈다.
일찌감치 대본을 받고는 이정우 역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액션 스쿨에서 반년 넘게 살다시피 했다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신들린 액션 연기를 보여 줬다.
고강도 액션마저도 대역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액션 연기를 하면서도 표정이 살아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안시현이 남궁수민에 몰입하는 것처럼, 최정수 또한 이정우 그 자체가 되어 머릿속이 복수심으로 꽉 찬 베테랑 형사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거기에 이정우를 따라다니며 새내기 형사로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 약혼녀가 남궁수민에게 납치당한 이후로는 현실을 택하게 되는 황경신까지.
촬영이 진행되면 될수록.
‘선인은 없다라……. 곽 감독님 말이 맞네.’
안시현은 『편지』에서 나오는 주요 캐릭터 중 선인이 없다는 걸 전제한 곽상필 감독의 말에 공감했다.
당장 남궁수민의 손에 살해된 지창환만 하더라도 10대에 폭행과 강간을 비롯한 다수의 범죄를 저질렀고, 살해 몇 달 전에는 마약 사범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니까.
남궁수민이야 말할 것도 없다.
지창환까지 13명을 살해하고, 황경신의 약혼녀를 14번째 살해 대상으로 정한 연쇄살인마 아니던가.
어떻게 변명해도 선인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남궁수민을 쫓는 이정우와 황경신을 선인이냐면, 정의하기 애매한 게 사실이다.
남궁수민의 행적을 쫓은 지난 10년.
이정우는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용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기본이었고, 때로는 범법 행위를 해서라도 용의자를 검거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남궁수민이 아닌 다른 살인범들을 여럿 잡으며 베테랑 형사로서 유명세를 떨치게 됐지만,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도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를 가졌다.
그나마 선인에 가까운 황경신조차 이정우와 함께 다니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결국에는 현실을 택하고 마는 캐릭터다.
결국, 선인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게 더 매력적이지만.’
『편지』의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안시현은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다.
첫째는 남궁수민의 캐릭터성.
둘째는 『편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전문가들도 곽상필 감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곽상필 감독의 대표작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여운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이는 철저한 오해다.
사실 곽상필 감독은 입봉작부터 시작해 초창기에는 철저하게 재미 위주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재미를 밑바탕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메시지들이 포함된 거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편지』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곽상필 감독은 철저하게 재미 위주의 영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시나리오를 썼고, 실제로 배우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나리오를 모두 다 보고 나면 여운이 남는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비롯해 직전에 메가폰을 잡았던 몇몇 작품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큰 작품인 게 사실이다.
‘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내가 남궁수민을 더 완벽하게 소화해 줘야만 돼.’
신 22와 신 35를 촬영한 이후, 안시현은 상대적으로 힘을 빼고서 남궁수민을 연기했다. 캐릭터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몰입도를 끌어올리기보단 자연스러운 표현에 좀 더 집중을 했다.
그렇게 해야 영화 후반부에 촬영할 몇몇 신에서 남궁수민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폭발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중반부까지 촬영을 끝마치면 두 달여간의 휴식이 주어진다. 그때 다시 한번 남궁수민 캐릭터를 점검하고서 후반부 촬영에 올인해야만 돼.’
* * *
9월에 시작된 『편지』의 촬영은 10월 말쯤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렇다고 모든 촬영이 끝난 건 아니다.
전체 신 중 85%가량이 마무리됐다.
나머지 15%는 겨울에 촬영해야 하는 신이거나, 혹은 배우들의 감정 표현이 극에 달하는 신이다.
때문에 곽상필 감독은 신년 이후에야 막바지 촬영을 하는 것으로 일찌감치 정했다. 대본 리딩을 할 당시부터 미리 예고된 수순이었다.
“후반부에 가기 전에 감정적으로 지치게 될 겁니다. 영화의 퀄리티를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두어 달 쉬었다가 다시 촬영하는 게 좋을 거라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곽상필 감독의 말이 맞았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행적을 쫓는 게 스토리 라인이니만큼 배우들의 감정 소모가 심했다.
거기에 소품들이 너무 리얼하기도 했다.
남궁수민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피가 튀고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데, 그 소품들이 너무 리얼해서 몇몇 배우들을 소품이라는 걸 알고도 구역질을 했다.
그 외에도 피 튀기거나 잔인한 장면이 많다 보니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배우들이 많았다.
신 90.
모두가 퇴근한 강력반.
이정우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 사람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남궁수민…….”
그는 바로 남궁수민이었다.
남궁수민의 정보를 확인하며 이정우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전 만났던 남궁수민의 모습에서 느꼈던 이질감과 그동안 조사했던 자료들이 한데 모여 퍼즐 조각이 맞춰져 갔다.
“찾았다.”
이정우가 마침내 찾아냈다.
10년 전.
아내를 죽였던 택배살인마를, 무려 13명을 살인한 희대의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말이다.
이정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내를 죽인 미친 살인마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게, 그 놈을 잡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게 말이다.
법의 심판?
그런 건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이정우는 형사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혹은 승진이나 포상을 위해 남궁수민을 쫓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아내의 죽인 놈을 찾아내, 아내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눈앞에 둔 순간.
이정우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모두에게 알리지 않고, 심지어 약혼녀가 납치된 황경신에게마저도 비밀로 하고 남궁수민을 죽이러 가겠다고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계획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이 시발 새끼야. 너는 꼭 내 손으로 죽이고 만다.”
그 말을 끝으로.
“OK.”
곽상필 감독이 OK 사인을 냈다.
동시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 함께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좀 많이 와야 할 텐데요.”
“허허허. 안 되면 기계의 힘이 빌리면 되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편지』의 1차 촬영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오후 3시 무렵.
이른 시간임에도 제작진과 배우들이 촬영장 근처의 식당에 한데 모였다.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부르며 두 달여간의 회포를 풀었다.
오늘 이후.
제작진은 영화 후반부에 사용할 소품을 추가 제작 및 점검하고, 몇몇 촬영 장소를 섭외해야 하며,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눈을 만들 준비도 해 놔야 한다.
배우들의 경우 휴식을 취하며 후반부에 모든 걸 쏟아 내기 위해 준비해야 하고 말이다.
안시현과 김진모와 최정수를 비롯한 몇몇 배우들은, 중간에 몇 차례 만나 함께 연습할 예정이기도 했다.
두 달간의 휴식을 마냥 즐길 수 없다.
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막판 스퍼트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임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아, 연습 전에 결혼식장에서 먼저 보겠네요? 다들 축의금 얼마나 하실 겁니까?”
“축의금은 무슨. 액수 생각하기 귀찮아서 그냥 침대 하나 사 주기로 했다.”
“이야. 역시 정수 선배님, 통 크십니다!”
“허허허. 전 최 배우에게 밀려서 에어컨 사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 불알친구께선 뭘 해 주려나?”
“전 신혼여행 풀코스 쏘기로 했어요. 예전부터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신혼여행에 들어가는 비용 일체 지불하기로 약속했거든요.”
“크으. 역시 불알친구는 남다르구만!”
물론 그 전에.
결혼식장에서 먼저 볼 예정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