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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8화 (9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8화>

98화. 아

안시현은 제대 직후 진행할 예정이었던 정혜영과의 결혼식을,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영화인 『편지』에 집중하기 위해서 2005년 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첫 촬영을 끝내고 11월과 12월에 휴식 기간이 주어지기로 정해지며 여유가 생겼고, 구태여 결혼을 미룰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실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편지』의 대본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일찌감치 혼인 신고를 끝마쳤으니까.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살림만 합치지 않았다 뿐이지,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였다.

그렇다고 식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안시현과 정혜영은 차근차근 결혼 준비를 해 나갔다.

다만, 안시현으로서는 아직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닌 터라 결혼 준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보니 정혜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준비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촬영에만 집중해요. 1차 촬영 마무리하고 난 다음에 도와줘도 안 늦어요.”

정혜영은 자신이 알아서 다 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시현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결혼식 날짜는 11월 7일로 확정되었다.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안시현이 신경 쓸 건 거의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정혜영이 알아본 내용을 확인해 주는 게 전부였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고 『편지』의 촬영 준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편지』의 1차 촬영이 종료된 후.

안시현은 미뤄 뒀던 스튜디오 촬영을 비롯해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결혼식 전에 신혼집으로 이사를 할 예정이기도 했기에, 『편지』의 촬영이 마무리됐음에도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결혼식 나흘 전.

JM액터스는 안시현과 정혜영이 가족과 지인들만을 초청해 11월 7일에 비공개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보도 자료를 돌렸다.

이에 언론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무려 재벌 3세와 톱배우의 결혼식이다.

비공개 결혼식이라 취재가 불가능함에도,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기자들은 결혼식 당일까지 엄청난 물량의 기사를 쏟아 냈다.

급기야는 안시현의 과거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혜영과의 연애사를 정리한 기사까지 나오기도 했다.

물론 안시현이 정혜영과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한 거라고는 첫 만남이 전부였기에, 연애사가 아니라 소설 수준의 기사가 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가온 11월 7일.

가족들과 지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안시현과 정혜영의 결혼식이 진행됐다.

몇몇 기자들이 몰래 결혼식장으로 들어오려다가 제지를 당한 걸 제외하면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혼식이 끝난 뒤.

안시현과 정혜영이 공항으로 향했다.

신혼여행지는 2004년 초, 한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덩달아 신혼여행지 1위로 급부상한 발리였다.

*   *   *

신혼여행 이후.

안시현은 주부로 변신했다.

일찌감치 일어나 출근하는 정혜영을 위해서 손수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청소와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을 도맡아서 처리했으며, 오후에는 요리 학원을 다니고 스포츠 마사지를 배우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다.

정혜영은 집안일을 함께하자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안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직업 특성상 작품을 하고 있을 때는 당신한테 소홀할 수밖에 없잖아요. 쉴 때만이라도 집안일은 제가 도맡아서 할게요. 혹시 제가 외출하면 그때만 당신이 좀 해 줘요. 그래야 제가 덜 미안할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촬영을 할 때는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고, 집에 있더라도 집안일보다는 휴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안시현은 흔히 말하는 비수기만이라도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정혜영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리도 배우다 보니 재밌네. 자격증도 좀 따놓을까? 혹시나 나중에 요리 관련 드라마를 하게 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나중에 음식 예능 유행하면 출연해서 써먹을 수도 있을 테고.’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안시현에게 있어 집안일이 힘들기는커녕 즐겁기까지 했다.

『편지』를 촬영하기 이전부터 1차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남궁수민 캐릭터에 집중하며 살았다.

연기에 변화를 주면서 메소드 연기의 부담이 줄었다고는 하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연기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많이 배려해 주지 않았다면, 정혜영이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지치는 걸 넘어 정신적으로 후유증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면서 정신과 안 간 게 어디야. 4개월 동안 정신과 다녔던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

안시현은 회귀 전에 살인범 캐릭터를 연기했다가 몇 개월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3명을 죽인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연기했음에도 정신과 치료는커녕 상담조차 받지 않으면서도 일상을 유지했다.

스스로가 성장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회귀 후 여러 작품을 거치며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이러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잘 쉬고 다시 집중하는 게 좋겠지.’

촬영은 2005년 1월 2일부터 재개된다.

안시현은 크리스마스가 지날 때까지 대본을 손에 쥐지 않을 생각이었다. 촬영 과정에서 쌓인 정신적 피로감을 최대한 해소한 뒤 다시 남궁수민 캐릭터에 몰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비우는 데에는 집안일이 최고였다.

아침과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보는 것이, 요리 학원에서 배운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게 안시현에게는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   *   *

2004년 연말.

『편지』를 촬영하는 배우들은 송년회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됐다.

“저희 영화, 일본에서 동시 개봉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에서의 동시 개봉 소식이었다.

“……동시 개봉이요?”

“허허허. 네.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이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게 주효했습니다. 심지어 『빌딩 숲』은 재방영 당시에도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였으니까요. 덕분에 일본 영화사 관계자들은 동시 개봉을 해도 손익 분기점은 충분히 넘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 같더군요.”

“시현이와 진모를 믿고 동시 개봉을 하는 거군요.”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촬영본만 보고서 계약을 했으니 확신이 있었겠지요.”

심지어 아직 촬영이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촬영본만을 보고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안시현과 김진모를 믿고 계약하는 거라고 봐야 했다.

『너와 나의 시간』에 이어 『빌딩 숲』까지 연타석으로 일본에서 대박이 났다. 심지어 『빌딩 숲』은 본방영과 재방영 모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덕분에 『편지』의 한일 동시 개봉이 이뤄지게 됐다.

『편지』의 수입을 결정한 영화사 측에서는 안시현과 김진모의 일본 내 인지도를 감안하면, 손익 분기점은 무조건 넘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물론 두 사람만 가지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곽상필 감독은 일본 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감독이며, 최정수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메소드 배우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하다.

실제로 촬영본은 일본 영화사 관계자들을 만족시켰다. 만약 촬영본의 퀄리티가 기대 이하였다면, 아무리 안시현과 김진모의 출연 작품이라고 해도 동시 개봉을 하는 도전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거다.

‘동시 개봉이라…… 잘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눈의 노래』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해당 작품의 주연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이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례가 존재한다.

『눈의 노래』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하지만, 『너와 나의 시간』과 『빌딩 숲』을 통해 쌓은 안시현의 일본 내 인지도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실제로 『빌딩 숲』의 방영으로부터 2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안시현과 김진모로 인해 한국 관광을 결정하는 일본인들이 꾸준히 넘쳐날 정도다.

물론 대중들은 사리분별을 할 줄 안다.

자신들이 소비해야 할 콘텐츠가 기대 이하라면, 아무리 해당 배우를 좋아하더라도 지갑을 열지 않을 거다.

‘일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안시현은 다시 한번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크게 느끼며, 이제 곧 시작하게 될 2차 촬영에서 최선을 다할 것임을 다짐했다.

*   *   *

2005년 1월 2일.

『편지』의 2차 촬영이 시작됐다.

“최 배우, 준비됐죠?”

“물론입니다, 감독님. 기분 좋게 원테이크 가시죠.”

“허허허. 그래주면 저희야 좋지요.”

첫 촬영의 포문을 연 건 최정수였다.

모두가 퇴근한 경찰서에서, 이정우가 남궁수민의 정체를 확신한 이후의 신을 촬영하게 됐다.

남궁수민이 택배살인마라는 걸 확신하게 됐음에도 이정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10년 넘게 추적한 끝에 어렵사리 꼬리를 밟았다. 조급함으로 인해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정도로 이정우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남궁수민을 잡을 준비를 해 나갔다.

황경신을 데려갈까 수차례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혼자서 가는 걸 택했다. 여럿이 가 봐야 남궁수민의 시선만 끌 테니, 혼자 가서 담판을 짓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죽이는 건 혼자서 해도 충분해.’

이정우는 남궁수민을 체포하려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거다. 자신을 존경하는 황경신 앞에서만큼은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준비가 모두 끝났을 때.

컴퓨터를 끄려던 이정우의 메일로 새 메일이 왔다.

발신자의 이름은 택배살인마, 제목은 ‘선물’.

순간 이정우의 표정이 굳었다. 불안함을 느끼며 마우스를 잡고서 메일을 클릭했다.

동시에…….

“이 개새끼가!”

이정우가 분노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메일의 내용은 휴대폰 번호 하나와 속옷 한 장 덜렁 입은 채 의자에 몸이 묶인 황경신의 사진이 전부였다. 몸 곳곳에는 고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상처가 존재했다.

어쩌다 황경신이 잡힌 건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일을 보낸 의도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아마 휴대폰은 대포폰일 거고, 통화를 끝내자마자 없앨 가능성이 높았다. 철저하게 흔적을 지우고 경찰을 농락하려는 것일 터였다.

황경신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언제 연락해도 곧장 답을 하던 황경신이, 처음으로 이정우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정우의 불안함이 커져갔다.

메일에 첨부된 사진이 조작된 게 아니라고 직감했다.

“……오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이정우가 메일에 적힌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이정우 형사님?

“맞다, 이 시발 새끼야.”

-용건만 말하겠습니다. 열흘 주겠습니다. 제 정체를 알아내면 황경신 형사를 풀어 주고, 실패하면 살해하겠습니다. 매일 저녁 10시, 새 대포폰으로 연락할 테니 받으시고요. 연락이 되지 않으면 황경신 형사를 살릴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겠습니다.

휴대폰을 통해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이정우는 상대방의 정체를 확신했다. 경찰을 상대로 이런 도발을 할 미친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모방 범죄가 아닌 진짜 택배살인마.

통화를 하고 있는 건 남궁수민이 확실했다.

“열흘 준다고?”

-이 통화가 끝난 이후부터 정확히 열흘입니다. 1초라도 늦으면 실패한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텐데요. 제 말을 안 들으면, 황경신 형사는 무조건 죽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건 진실이건, 일단 따라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단, 열흘까지 갈 일은 없을 거다. 남궁수민, 이 개자식아.”

-아…….

이정우의 말과 함께 휴대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대방은 말끝을 흐린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정우는 필시 남궁수민이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흥분되네요.

남궁수민의 반응은, 이정우가 생각하는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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