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9화>
99화. 눈 와요
이정우와 남궁수민의 통화는 두 신으로 나눠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이정우와 남궁수민의 리액션을 번갈아 가며 보여 줘야 하기에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정우 시점의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남궁수민의 시점으로 촬영이 이어졌다.
-열흘까지 갈 일은 없을 거다. 남궁수민, 이 개자식아.
이정우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그 순간.
“아…….”
남궁수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정우가 마침내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 주자, 전율로 인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남궁수민이 지금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지창환의 장례식장에서 이정우를 마주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쫓는 형사 이정우에 대해 조사하던 중.
남궁수민은 두 가지 정보를 알게 됐다.
자신이 살해한 대상 중 한 명이 이정우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이정우가 자신을 10년 넘게 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남궁수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내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알게 된 형사를 죽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지금껏 해 온 그 어떤 살인보다도 더 자신을 만족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보다 더 완벽한 살인은, 죽는 날까지 없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남궁수민은 철저하게 계획했다.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IT업계의 미래, 20대가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 등 언론으로부터 온갖 찬사를 받는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이정우를 낚을 함정을 준비했다.
그 시작이 바로 황경신 형사의 약혼녀 납치였다.
약혼녀를 인질로 황경신 형사를 함정에 빠트려 천국에 데려왔다. 고문을 해서 기절시킨 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이정우에게 메일을 보냈다.
앞서 보낸 힌트들로 이정우가 자신의 정체를 유추했을 즈음, 황경신을 미끼 삼아 그와 통화를 하며 직접적으로 힌트를 줄 생각이었다.
만약 힌트를 통해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정답을 알려 줄 생각이었지만…….
이정우는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형사였다.
부족한 퍼즐 조각들만을 조합해 남궁수민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흥분되네요.”
-……흥분된다고?
“네. 이제 당신이 저를 잡으러 올 거잖아요 제 손에 아내를 잃은 형사를 죽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제대로 미쳤구나, 남궁수민.
남궁수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 곧 이정우를 대면하게 된다. 복수심에 눈이 먼 형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기회가 찾아온다.
형사에게 죽여 달라는 말을 들으려면 어떤 고문을 해야 효과적일까? 알고 있는 고문 수단을 총동원하면,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황경신 형사는 약속대로 풀어 줄게요. 단, 황경신 형사의 약혼녀는 직접 찾아야 할 거예요. 준비를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요. 마지막 게임을 시작해 봐요. 당신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 정말 궁금하네요.”
한껏 기대를 하며, 남궁수민이 이정우와의 첫 번째 통화를 끝마쳤다.
* * *
“OK.”
OK 사인을 낸 직후.
짝짝짝.
자리에서 일어난 곽상필 감독이 박수를 쳤다.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허허허. 이거 참, 시작부터 힘을 너무 많이 준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대로만 해 주세요.”
두 달을 쉬다가 재개한 촬영이다.
배우들끼리 따로 만나 연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첫 촬영부터 집중력을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두 배우는 첫 촬영을 완벽하게 끝마쳤다.
두 신 연속으로 원테이크를 해낸 것이다.
두 달간의 공백은 최정수와 안시현에게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2차 촬영의 첫 시작을 깔끔하게 원테이크로 마무리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띄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신 연속 원테이크가 나오자 안시현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맺혔다. 스태프들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하며 박정상으로부터 대본을 건네받았다.
영화의 완성도에 높여 줄 신들을 다수 촬영해야 하는 2차 촬영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만한 쾌조의 시작이었다.
‘좋아. 이제…… 다른 신들 촬영하면서 눈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겠네. 안 오면 어쩔 수 없이 과학의 힘을 빌려야 하겠지만.’
* * *
신 115, 그리고 신 119.
제작진과 배우들은『편지』의 클라이맥스가 될 두 신의 촬영을 미뤄 둔 채, 나머지 신들의 촬영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조건이 갖춰지는 순간, 언제든지 두 신을 촬영할 준비를 해 놓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신 115화 신 119의 촬영을 위해서는 폭설 수준으로 눈이 와야만 했다.
다행히 1월 20일과 22일 사이에 폭설 예보가 있었기에, 그사이 나머지 신들의 촬영을 모두 끝낸 뒤 차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가능한 실제 눈이 내리는 배경에서 촬영을 하는 것이 좋지만, 만약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 제설기의 힘을 빌려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폭설이 내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으니까.
1월 19일.
『편지』는 예정대로 신 115와 신 199를 제외한 모든 신들의 촬영을 끝마쳤다.
1월 20일.
제작진과 배우들이 강원도로 향했다.
『편지』의 제작진은 운치 있고 한적한 산중에 위치한 펜션 일곱 채를 전부 다 빌렸다. 그중 촬영에 쓸 펜션은 한 채 뿐이기에, 나머지는 제작진과 배우들이 숙소로 쓰면서 편안한 분위기 속에 여유를 즐겼다.
고기도 구워 먹고, 다 같이 모여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화투를 치거나 넓은 마당에서 족구와 축구 등의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다.
“이야. 이런 경치 좋은 펜션은 어떻게 찾았데? 여기서 술 한 잔 하면 기가 막힐 텐데 말이야. 촬영만 아니었음 바로 병나발 불었다.”
“촬영 끝나고 한 잔 하시죠, 선배님.”
“흐흐흐. 안줏거리 잔뜩 사왔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단,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눈이 내리는 순간 촬영을 준비해야 하기에 다른 건 다 되도 술을 입에 대는 건 금지였다.
그 와중에도 제작진과 배우들은 머릿속으로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제발 함박눈 좀 내려라.
며칠 동안 펜션에 있어도 되니까 눈 좀 펑펑 내려라!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2004년 초만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로 보였던 눈들이, 클라이맥스의 촬영을 앞둔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1월 20일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21일 오전에도 별 소식이 없자, 점심 식사를 하며 곽상필 감독이 슬쩍 제안했다.
“눈 기다리면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낚시나 갔다 올까요? 아까 주인장에게 슬쩍 물어보니, 이 근처에 낚시하기 좋은 호수가 있다 하더군요.”
“으음. 그럴까요?”
“하긴, 기다리면서 초조해하느니 그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정 안 되면 제설기 쓰면 되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낚시나 다녀오죠.”
그렇게 곽상필 감독과 안시현, 최정수 등을 포함한 도합 6명이 낚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점심 식사 이후.
안시현은 최정수의 SUV 트렁크에 펜션에서 빌린 낚싯대와 몇몇 장비들을 실었다. 낚시 가서 먹을 라면과 몇몇 주전부리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트렁크 문을 닫은 그 순간.
안시현의 얼굴에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본 그 순간,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눈 와요! 함박눈 내린다고요!”
그토록 기다리던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
“접근 금지!”
“발자국 남기면 안 됩니다!”
“특수효과팀, 촬영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소품 확인 부탁드릴게요!”
“눈 더 쌓이기 전에 최종 동선 체크하겠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걸 확인한 순간.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신 115와 신 119의 촬영을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 115는 함박눈이 쏟아지는 별장에서 남궁수민이 이정우를 초대하는 신이다.
“고속도로 타셨어요?”
-톨게이트 막 통과한 참이다, 이 개새끼야.
“서둘러서 오셔야 할 거예요. 지금 강원도에 눈이 엄청 내리거든요. 제가 지금부터 오수정 씨를 의자에 묶은 채로 마당 한가운데에 내놓을 거거든요. 후배의 약혼녀가 동사하는 거 보고 싶지는 않으시죠?”
-걔는 건들지 마. 수정이 죽으면, 너도 죽는다.
“이야. 무섭네요. 당신을 위해 만든 무대이니만큼 빨리 와서 주인공이 되어 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정우와의 통화를 끝낸 뒤.
남궁수민은 황경신 형사의 약혼녀 오수정을 묶어 놓은 의자를 끌고서 마당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눈 내리는 마당 한가운데에 그녀를 놔뒀다.
특이한 건, 신체 곳곳에 고문이 흔적이 보였던 황경신과 달리 오수정의 얼굴은 생채기 하나 없기 깨끗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 어디에도 고문의 흔적이 없었다.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체가 깨끗했다.
“당신은 참 운이 좋아요. 내가 평범한 살인에 흥미를 잃지 않았다면 인질의 가치를 다한 지금,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텐데 말이죠.”
그 이유는 명확했다.
남궁수민이 지창환을 살해한 이후, 더 이상 평범한 살인만으로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황경신을 고문한 건 이정우를 자극하기 위해서였지, 황경신을 고문해서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수정은 마지막 무대를 위해 필요한 인질일 뿐, 고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냥 놔두었다.
다만…….
“이정우 형사가 늦지 않게 도착해서 동사하지 않기를 바랄게요. 늦으면 어쩔 수 없고요.”
살인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 사람의 죽음에 대해 무감각한 건 여전했다.
오수정은 마지막 무대를 위해 필요한 희생양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날씨에 그녀를 방치해 놨다. 이정우가 너무 늦으면 동사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내던졌다.
오수정이 살든 죽든 남궁수민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이정우가 오수정을 구하기 위해 함정인 걸 알면서도 혼자 자신의 별장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게 중요하지.
오수정을 마당에 내놓은 뒤.
남궁수민이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거실 창가 앞 흔들의자에 앉아,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아. 빨리 오세요, 이정우 형사님. 제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분명 제 인생 최고의 살인이 될 거예요. 최대한 고통스럽게, 최대한 천천히 즐기면서 죽여 드릴게요. 궁금하네요. 과연 당신의 입에서도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까요?”
“OK.”
신 115의 촬영은 한 번에 끝이 났다.
신 115에 필요한 이정우 시점에서의 통화 장면은 이미 강원도에 오는 과정에서 촬영을 해 놓았고, 남궁수민 시점에서의 촬영만 하면 됐기에 실제로 촬영해야 할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안시현이 신 115를 깔끔하게 원테이크로 끝냈다는 데에 있었다.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안시현의 컨디션과 집중력은 절정이었다. 이정우와의 만남을 앞두고 들떠 있는 사이코패스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줬다.
사소한 것조차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연기였다.
“시현이 오늘 살아 있는데? 이거, 이제 나만 뺑이 치고 오면 되는 건가?”
“선배님, 날 추우니까 핫팩 챙겨 가세요. 잘못하면 동상 걸립니다.”
“오, 땡큐.”
“유자차 한 잔씩 하면서 몸 녹이고, 눈 좀 더 쌓인 뒤에 촬영 갑시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따뜻한 유자차를 나눠 마시며 몸을 녹였다. 남궁수민의 별장으로 설정한 펜션의 문은 두 개였는데, 뒷문으로만 다니며 마당 방향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유의했다.
“여기 눈 많이 와요. 서울은 어때요? 운전 조심하고, 집에 가면 보일러 따뜻하게 틀어 놓고 있어요. 촬영 끝나고 다시 전화할게요.”
안시현이 막간을 이용해 정혜영과 통화를 하고 10분이 지난 뒤.
“신 119, 스탠바이.”
『편지』의 대미를 장식할 신의 촬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