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0화>
100화. 그동안
『편지』의 제작진은 신 115와 신 119의 촬영 장소 섭외를 위해서 골머리를 싸맸다.
산 중턱 즈음에 위치한 마당 있는 별장이 필요했다. 심지어 마당은 넓거나 둘로 나뉘어 있어야만 했다.
마당이 그러한 조건을 갖춰야만 하는 이유는, 신 115와 신 119를 다른 장소에서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 115와 신 119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있다 보니, 신 115에서 남겨졌던 발자국이 내리는 눈에 덮여 사라져야만 했다.
하지만 눈이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자국이 사라지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
때문에 오수정과 관련된 신을 찍을 곳에는 마음껏 발자국을 남기고,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마당을 배경으로 삼아 편집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마당에서는 이후 남궁수민과 이정우의 육탄전을 촬영할 예정이기도 했다.
제작진이 적절한 장소를 섭외해 준 덕분에 신 119의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수정 씨!”
남궁수민의 별장에 도착한 이정우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오수정에게로 다가갔다. 발자국 하나 없던 눈밭 위로 이정우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새겨졌다.
오수정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의식이 없고 호흡이 가늘었다.
이정우가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오수정에게 덮어 줬고, 손으로 차디찬 그녀의 팔다리를 문질러 주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가려면 30분은 걸린다.
문제는 오수정이 그때까지 버텨 줄지도, 내려가는 걸 남궁수민이 지켜보고만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오수정의 몸을 녹일 만한 장소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근처에 있는 집이라고는 남궁수민의 별장이 전부였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
남궁수민이 별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왔어요? 보아하니 늦지는 않은 것 같네요.”
“남궁수민…….”
“오수정 씨 데리고 들어와요. 내려가도 상관없지만, 절 잡을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이 날씨에 밑으로 내려가려면 못해도 30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오수정 씨가 버텨 줄까요? 동상 때문에 한두 군데 절단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
남궁수민의 말이 맞았다.
오랜 시간 추위에 노출된 오수정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남궁수민의 말대로 신체 절단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정우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수정을 안아 든 채 남궁수민의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잘 생각했어요. 응급조치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죠.”
“거참 눈물 나게 고맙네.”
남궁수민은 여태 그러했던 것처럼 약속을 지켰다.
이정우가 오수정을 응급조치를 하는 동안 아무 짓도 하지 않고서 기다려줬다.
그 대신.
응급조치가 끝나자마자 오수정의 목에 칼을 겨누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뒤로 물러나서 총 제 쪽으로 넘기고 옷 벗어요. 제가 이런 건 좀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왜? 총으로 나 쏴 죽이려고?”
“에이. 그럴 리가요. 아내분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여 드릴게요. 아, 부부를 죽여 보는 건 저도 처음이라서 너무 설레네요.”
“미친 새끼.”
남궁수민은 이정우로부터 건네받은 총을 지하실 입구 쪽으로 던져 버렸다. 또한 이정우가 총을 제외한 그 어떤 흉기도 지니지 않고 있다는 걸 옷을 벗겨서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총 한 자루 말고는 안 가져왔네요? 전 되게 잔뜩 준비하고 왔을 거라 예상했거든요.”
“네깟 놈 죽이는 데에 거창하게 많이 필요하겠어?”
“아.이.고.무.서.워.라. 옷 입어요.”
남궁수민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는 이정우를 향해 식칼을 겨누며 속삭였다.
“솔직히 전 오수정 씨한테는 별 관심 없어요. 황경신 형사도 마찬가지였고요. 죄다 이정우 형사님을 불러내기 위한 함정들에 불과했다고요.”
“그래서, 날 불러내서 만족해?”
“제 인생 최고로 흥분돼요. 최대한 저항하다가 죽어주길 바랄게요. 아, 식칼 쓰는 것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죠? 아무리 그래도 형사를 상대하는 건데 맨몸이면 제가 너무 불리하잖아요.”
“상관없어.”
남궁수민이 흉기를 들고 있음에도 이정우는 무덤덤했다. 별일 없다는 듯 다시 옷을 입고서 남궁수민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식칼은 이정우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남궁수민이 휘두르는 식칼을 여유롭게 피하고, 남궁수민의 오른손을 분잡아 손목을 꺾어 버린 뒤, 식칼을 뺏어 지하실 입구 쪽으로 던져 버렸다.
총을 뺏기고 고작 몇 분 만에 전세가 역전됐다.
남궁수민은 총 한 자루만 가지고 자신에게 온 이정우가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이정우가 철저하게 의도한 행동이었다.
그는 남궁수민이 어떤 흉기를 쓰더라도 총만 아니면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행동으로 증명해냈다.
“멍청한 놈. 식칼이 아니라 총을 챙겼어야지. 머리에 쐈으면 한 방에 끝나는 거였잖아.”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아, 제가 현역 형사를 너무 무시했네요. 손목 나간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
이정우가 일방적으로 남궁수민을 구타했다.
남궁수민은 별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무기로 사용해 저항해 봤지만, 이정우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남궁수민의 몰골만 망가졌다.
이정우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남궁수민의 머리채를 잡은 채 별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새하얀 눈밭이 조금씩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아내의 장례식 이후로 그 좋아하던 술 담배를 뚝 끊었어. 왜인 줄 알아? 건강해야 아내를 살해한 새끼를 찾아 내 손으로 때려 죽일 수 있을 거 아냐.”
“저 죽이시려고요?”
“어. 계속 때리다 보면 죽겠지. 걱정하지 마. 곱게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와. 진짜 흥분되지만…… 죽이는 게 취미지, 죽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말이죠.”
푹!
순간 이정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허벅지 한가운데가 뜨거웠다. 손을 가져다 대니 무언가가 허벅지에 박혀 있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송곳? 아. 생각났다.”
이정우가 남궁수민의 얼굴을 걷어찼다.
눈밭 위에 대자로 뻗은 남궁수민을 무시한 채 허벅지에 박힌 송곳을 뽑아냈다.
타는 듯한 통증과 생각보다 많은 출혈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10년 전, 아내의 사인과 시신의 상태가 떠올랐다는 게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몸에 송곳 같은 걸로 찔린 듯한 흔적이 많았었지. 진짜 송곳으로 찌른 거였어?”
“송곳은 참 훌륭한 고문 도구에요.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도 찌르는 부위와 정도에 따라 출혈량을 확 줄일 수 있거든요. 이정우 형사님의 아내도 그렇게 죽였어요. 송곳으로 몸 이곳저곳을 닥치는 대로 찔렀어요. 처음에는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더니, 어느 순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더라고요. 생각보다 너무 못 버텨서 흥미를 잃고 바로 죽여 버렸지 뭐예요.”
“그래? 그랬구나…….”
남궁수민은 이정우를 도발하기 위해서, 빈틈을 유도하려고 일부러 그의 아내를 죽이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정우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별일 없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에서 뽑아낸 송곳을 바라보았다.
남궁수민이 바란 대로 도발은 제대로 먹혔다.
“역시 넌, 살려둘 가치가 없어.”
너무 제대로 먹혀 이성을 상실한 게 문제였지.
당초 이정우는 남궁수민을 천천히 괴롭히면서 즐길 생각이었다.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아내를 살해하던 당시의 기억을 좋은 추억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남궁수민을 보며 깨달았다.
숨 쉬는 것조차 사치인 인간쓰레기라는 걸 말이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이 개새끼야아아아!”
이정우가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해 댔다. 급소고 뭐고 없었다. 이성을 상실한 채 남궁수민이 죽을 때까지 닥치는 대로 구타를 할 작정이었다.
남궁수민이 애써 기력을 쥐어짰다.
숨겨 놨던 송곳 하나를 더 꺼내 이정우의 허벅지를 재차 찔렀지만…….
이성을 잃은 이정우를 멈출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흐려질 즈음, 남궁수민은 깨달았다.
이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대로…… 당신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당신은 복수를 하고, 나랑 똑같은 놈이 되는 거예요. 이것도 나름대로 흥분되는데요? 뭐해요. 어서 날 죽여 줘요.”
“그래. 너랑 똑같은 놈이 되어 주마.”
이정우가 내팽개쳐놨던 송곳을 집어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궁수민의 목덜미를 찌르기 위해서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안 돼요, 선배님!”
남궁수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20분 늦게 산을 올라온 황경신이 목소리가 이정우를 멈추게 했다.
황경신이 총을 겨눈 채 이정우와 남궁수민을 다가가며 소리쳤다.
“멈춰요, 선배님! 아무리 죽이고 싶어도 그건 아니에요! 우린 형사잖아요! 범인을 잡는 사람이지, 범인을 단죄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닥쳐.”
“저도 저놈 죽이고 싶어요! 수정이를 납치한 건 평생 용서 못 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 같지 않은 놈이라도 살인은 아니라고요!”
“닥쳐! 닥치라고! 네가…… 네가 뭘 아는데! 10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온 내 마음을 네가 짐작이나 하냐고!”
“몰라요! 이해 못해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멈춰요! 안 멈추면 쏠 거예요!”
“……네가? 날?”
이정우가 피식 웃었다.
존경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자신을 롤모델이라고 한 황경신이, 자신에게 총을 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쏘더라도 상관없었다.
총을 맞더라도 남궁수민을 죽이는 건 멈출 생각이 없었으니까. 지금껏 구타한 것과 달리, 급소를 노리면 한 번에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선배님을 살인자로 만드느니, 쏠 거예요.”
“쏠 수 있으면 쏴 봐.”
이정우가 황경신에서 남궁수민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선배님!”
황경신이 이성우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으며.
탕!
총성이 울려 퍼지며 눈밭 위로 붉은색이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신 119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신 119는 세 번에 나눠 촬영이 진행됐다.
별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번, 별장 내부에서 한 번, 별장 밖으로 나가 한 번.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세 번째 촬영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배우들이 열연을 해 줬다.
사이코패스로서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여 준 안시현.
형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분노를 완벽하게 표현한 최정수.
신 119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늘 그러했듯 좋은 연기를 보여 준 김진모까지.
세 사람이 최고의 호흡을 보여 준 덕분에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신 119와 관련된 장면이 이후 신에서도 나올 예정이었기에, 배우들은 신 119 이후에도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고생을 한 건 최정수였다.
영화 후반부에서의 출연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촬영해야 할 분량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펜션에서의 촬영 분량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몸을 녹이기 위해 펜션 안에서 휴식을 취할 때를 제외하면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 나간 결과.
“OK.”
해가 지기 전에 이날의 10번째이자, 『편지』의 마지막 OK 사인이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마지막 신의 촬영이 끝났음에도, 스태프들은 여전히 촬영을 이어 나갔다. 다만 배우들이 아닌 곽상필 감독을 포커싱 한 게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배우들은 한데 모여 곽상필 감독에게로 다가갔다.
촬영으로 인해 지저분해진 눈밭 위에서, 당황하는 곽상필 감독에게 헹가래를 하며 목청껏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거장이, 메가폰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