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2화>
102화. 좋은 소식부터
최정수가 몸을 담았던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의 규모는 작은 편이 아니다. JM액터스가 사업 범위를 확장함에 따라, 사실상 가장 큰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가 됐다.
소속 배우에 대한 대우가 좋고 소통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이에 많은 배우들이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기 위해 해당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회귀 전 최정수 또한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데뷔 후 줄곧 전속 계약을 연장했고 말이다.
하지만.
곽상필 감독이 은퇴 후 JM액터스의 콘텐츠 제작 고문을 맡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최정수는 정들었던 소속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곽상필 감독과 한 소속사에 몸을 담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JM액터스의 소속 연예인 관리가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하기에 앞으로의 배우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전속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마자 JM액터스와의 계약을 추진한 건데…….
법적으로 문제 될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속 계약 기간이 만료된 이후 JM액터스와 접촉해서 새로운 전속 계약을 체결하려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도의적인 문제는 남아 있었다.
최정수가 몸담고 있던 연예기획사의 대표는, 김진석 대표가 배우로 활동할 당시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정 대표한테 설명하느라 진땀 뺐다. 전속 계약이 끝났다 해도 대표 배우 데려가는 건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냐.”
“정 대표님한테는 제가 설명 잘했습니다. 안 좋게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만나서 술 한잔하고 후배들 들어오면 인사도 하기로 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거랑 내가 말하는 거랑은 다르지. 뭐…… 이왕 온 거 어쩌겠냐. 케어 잘해 줄 테니까 앞으로 잘 해 보자. 5년 동안 딱 세 작품만 하자.”
“연극 포함이죠? 영화로만 세 편이면 저 죽어요.”
“최소 두 편. 한 편은 연극도 괜찮고 단막극도 좋으니 네 마음대로 해.”
“그 정도면 딱 좋네요.”
최정수는 다작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배우다.
왕성한 작품 활동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작품 위주로 연기한다. 201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주지만, 이 시기에는 작품 선별에 신중을 기하는 게 사실이었다.
5년 동안 영화 두 편이라면 양반이었다.
회귀 전에는 곽상필 감독이 『나는 간첩입니다』 이후로 사실상 은퇴한 뒤, 최정수 또한 한동안 작품 활동에 대한 의지를 잃었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한 뒤, 2010년이 돼서야 복귀할 정도였으니까.
‘곽 감독님과 같은 소속사에 있으면 정수 선배님도 연기 열정을 잃지 않을 거야. 게다가 정수 선배의 존재만으로도 후배 배우들에게 큰 귀감이 될 거고.’
연기밖에 모르는 배우, 연기를 위해서 태어난 배우.
최정수의 연기력과 가치관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2010년 전후로 데뷔한 많은 배우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안시현 또한 최정수가 롤 모델 아니던가.
JM액터스를 위해서도, 최정수를 위해서도 5년 전속 계약은 좋은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 과정이 워낙 급작스러웠을 뿐이다.
다음 날.
JM액터스는 보도 자료를 통해 최정수와 5년 전속 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했다.
그날 이후.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이 자식아, 선배님 말고 대표님! 은퇴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선배님이야!”
“한 번 선배님은 영원한 선배님 아니겠습니까.”
“능글맞기는.”
최정수는 소속 배우가 아닌 직원인 것처럼 허구한 날 JM액터스 사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평소 스케줄이 없을 때 소속 연예기획사 사옥에서 살다시피 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매니저 밥 사 주려고, 시청각 자료 감상하러, 저녁에 배우들이랑 술 한잔하려고 등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소속 연예기획사 사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했다.
JM액터스에 온 이후로는 이유가 하나 추가됐다.
“이야. 이모님 손맛 장난이 아니네. 앞으로 끼니는 출근해서 해결해야겠네요.”
“직원 등록이라도 해 주랴?”
“4대 보험 됩니까?”
JM액터스 구내식당의 밥이 너무 맛있어서, 웬만한 식당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훌륭해서 밥을 안 먹고는 배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JM액터스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최정수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 강주원이~ 요즘 뭐하고 사냐?”
“최한수 감독님 차기작 오디션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최 감독님 작품이라……. 내가 대사 좀 쳐주랴? 우리 주원이 연기 얼마나 늘었나 구경 한번 해 보자.”
“앗! 영광입니다, 선배님!”
김진석 대표가 전속 계약을 체결하면서 바랐던 대로, 성장이 필요한 배우들에게 친근한 동네 아저씨 스타일로 다가가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 *
최정수와 JM액터스의 전속 계약으로 인해 잠시 놀라긴 했지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편지』의 개봉 전까지 안시현의 휴식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3월 중순.
정혜영이 2주 동안 휴가를 냈다.
일룡백화점의 지분 승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4월을 기점으로 그녀는 이제 일룡백화점의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게 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휴식을 위해 2주 동안 휴가를 낸 것이다.
휴가 첫날.
안시현과 정혜영은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렌트카를 타고 제주 일룡호텔에 짐을 푼 뒤, 1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러고 있으니까 첫 만남 때 생각나네요.”
“첫 만남 이야기하니까 궁금한 게 있어요. 도대체 그때 제 어디를 보고 슈트 핏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음. 말 안 할래요.”
“어떻게 하면 말해 줄 거예요?”
“2주 동안 제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해 준다면 말해 줄게요. 아니면 국물도 없어요.”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마님.”
안시현과 정혜영의 첫 만남은, 정혜영이 『형아, 동생』의 최종 편집본을 확인하고서 JM액터스에 안시현과의 미팅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리수철, 『형아, 동생』의 주지성에서 정장이 어울릴 거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실제로 안시현이 명품 정장 브랜드와 일룡백화점의 모델이 된다고 했을 때,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이 제법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처음 만났던 장소에 다시 오니,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슈트 핏부터 시작해서 정영빈 캐릭터의 구축을 위해 함께 지냈던 열흘 남짓의 시간들, 『너와 나의 시간』을 촬영하는 동안 남몰래 주고받았던 수많은 연락까지.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장 보러 가요. 오늘 저녁 식사는 제가 만들어 줄게요. 한식 자격증 준비하면서 갈고 닦은 솜씨를 보여 줄게요.”
“기대해도 돼요?”
“물론이죠. 제주도 흑돼지 풀코스 준비되어 있는데,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제주도에서의 시간은 즐거웠다.
한라산 등산을 하고, 유학 시절 정혜영의 취미였던 승마도 즐겼으며, 제주도에서 유명한 관광지와 맛집들을 돌아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주도를 오길 잘한 것 같아.’
휴가 기간이 2주이다 보니 해외여행을 가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했고, 실제로 2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주도로 급선회를 하게 됐다. 두 사람의 첫 만남 장소인 제주도에서 2주 동안 휴가를 보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갔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여행이 됐을 테지만, 제주도에서는 첫 만남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 더더욱 분위기가 살아났다.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안시현과 정혜영은 숙소로 잡은 일룡호텔 스위트룸에서 직접 만든 안주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휴가 끝나고 서울 올라가면 슬슬 대본 살펴보겠네요?”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쉬고 싶은데…… 들어온 게 워낙 많아서 일단 검토라도 시작해 보려고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면 좀 더 쉬고요.”
“좋은 생각이에요. 전 당신이 좀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줬으면 좋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마음에 드는 작품에 출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야지 결과와 무관하게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같은 생각이에요. 조급해하지는 않으려고요. 저보다는 당신이 더 걱정이에요. 대표이사가 되면 무게감이 장난이 아닐 텐데요.”
“이겨 내야죠. 그러지 못할 거였으면, 지분 옮길 때 거절했을 거예요.”
안시현과 정혜영은 휴가 후 있을 일들에 대해서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안시현의 경우 『편지』가 6월 마지막 주에 한일 동시 개봉이 확정된 상황에서, 홍보 스케줄을 소화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차기작을 검토할 예정이었다.
정혜영의 경우는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게 될 터였지만, 안시현은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정혜영은 일룡백화점과 일룡마트를 잘 이끌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매출에서 2004년 이후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성과를 냈다.
안시현이 걱정하는 건 실적이 아니라, 그 실적을 만들기 위해 정혜영이 많은 시간을 업무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지치지 않게 내조 잘해 줘야지. 작품 촬영할 때도 되도록 아침밥은 내 손으로 차려 주고 싶어.’
안시현은 정혜영이 지치지 않도록 최대한 열심히 내조를 할 것임을 다짐했다.
* * *
제주도에서의 달콤한 휴가가 끝이 났다.
정혜영은 대표이사 취임을 앞두고 처리할 업무가 많아 늦은 저녁이 돼서야 퇴근했고, 안시현은 정혜영을 내조하는 데에 집중했다.
운동과 대본 검토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일에 할애할 정도였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영 없네.’
애석하게도 안시현은 4월 중순까지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지 못했다.
대본과 시나리오를 지겹도록 봤지만 끌리는 작품이 드물었고, 그나마 눈에 띄는 작품들도 주요 배역이 이미 캐스팅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결국 기성 작가와 감독들의 작품을 모두 검토했지만 차기작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다음은 신인 작가와 감독 차례였다.
‘천천히 검토해 보자. 신인 작가와 감독의 작품 중에 의외로 보석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첫 작품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드라마 작가와 영화감독은 의외로 제법 나온다. 첫 작품이 최고 히트작이 되는 경우가 많아 문제지.
안시현은 신인 작가와 감독의 대본과 시놉시스를 검토하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물론 실패한다 해서 눈높이를 낮춰 조급하게 차기작을 선택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신인 작가들의 대본과 시놉시스를 한가득 받아서 집으로 돌아온 직후.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각각 하나 있는데, 뭐부터 듣겠어요?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곽상필 감독은 통화할 때 본론부터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지금처럼 뜸을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좋은 소식부터 들을게요.”
안시현의 선택은 좋은 소식부터 듣는 거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들어야 한다면 좋은 쪽부터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잠시 후.
곽상필 감독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줬다.
-곧 기사 뜰 건데…… 저희 영화, 황금영화제에 초청받았어요.
『편지』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황금영화제에 초청을 받게 됐다.
데뷔 후 처음으로 안시현에게 세계 3대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기쁨도 잠시.
안시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자격 조건이 까다로운 걸로 아는데, 어떻게 초청받았지? 『편지』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