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3화>
103화. 하나만 받자
황금영화제 초청하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1년 내에 상영한 작품들 중에서 선별한다.
아직 개봉조차 하지 않은 『편지』는 초청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지만…….
특별 초청이라는 예외가 존재한다.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수상을 한 감독의 개봉 예정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제 기간에 황금영화제에서 선상영을 한다는 조건으로 특별 초청을 하는 경우가 있다.
곽상필 감독의 경우 황금영화제에 무려 세 번이나 초청을 받았고, 각본상을 수상했던 적이 있기에 『편지』가 특별 초청을 받은 걸로 보였다.
“특별 초청인가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역시나 안시현의 예상대로였다.
-아무래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는 보기 드문 자극적인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게, 관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프랑스에 거주할 당시 친분을 쌓은 친구들의 적극적인 홍보 덕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고 자극적인 요소들만 전면으로 내세운 B급 영화인 것도 아니니까요. 저희 영화, 사회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확실하다마다요. 황금뿌리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초청이 되는 것만으로도 어디입니까.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의 생각에 동의했다.
『편지』가 황금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일찌감치 홍보 영상들을 공식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며 개봉 전 홍보에 힘쓰고 있는 상황에서, 최고의 홍보거리가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겸사겸사 수상도 할 수 있다면 최고일 테고 말이다.
‘회귀 전이랑은 결과가 다를지도 모르지.’
『편지』는 회귀 전에도 황금영화제에 초청됐다.
하지만 수상의 영광을 안지는 못했다.
애초에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거니와, 설사 경쟁 부문에 초청됐더라도 수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곽한일 감독은 좋은 감독이다.
다만 『편지』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았거니와, 애초에 곽상필 감독이 아니면 단순히 잔혹한 이야기에 그칠 수 있을 만큼 연출이 까다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곽한일 감독의 성향과 『편지』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손익 분기점을 넘었음에도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았던 건 그런 문제점들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곽상필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회귀 후의 『편지』는 촬영 단계에서부터 심상치 않다는 걸 제작진과 배우들이 느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오죽하면 편집을 하지 않은 촬영본 일부만 보고서 일본 동시 개봉이 결정됐을 정도다.
곽상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모든 영화를 즐겨 본 안시현의 시선으로 볼 때도, 『편지』는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좋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왕 레드카펫 밟는 거, 어떤 상이 됐든 하나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받을 수만 있다면 흥행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테니까.’
* * *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
안시현은 기내식을 먹은 뒤 차분하게 시나리오 검토를 시작했다. 미처 검토를 끝내지 못한 신인 감독들의 시나리오를 일부 챙겨 온 것이었다.
황금영화제 기간 동안 다 검토할 생각이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읽으며 슬슬 졸릴 즈음 검토가 마무리됐으니까.
자다 깨서 화장실을 다녀온 최정수가, 스튜어디스에게 맥주를 부탁한 뒤 안시현에게 물었다.
“다 봤어?”
“네. 괜찮은 작품들은 몇 개 있는데, 제 마음에 드는 배역이 보이지 않네요.”
“남궁수민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진 건 아니고?”
“에이. 그런 건 아니에요. 기준은 전이랑 비슷한데, 그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안 보여서 그래요.”
최정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디스가 가져다 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툭 내뱉듯이 안시현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날 테니까. 안 나오면 뭐, 그냥 1, 2년 푹 쉰다 생각하면 되는 거지. 지금 네가 다작으로 인지도 끌어올릴 클래스는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최정수의 말이 맞았다.
이제 배우로서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안시현이기에, 급하게 작품을 선택하기보단 마음에 확실히 드는 작품과 배역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순리였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시현이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MP3를 켜고서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안대를 쓰고 눈을 감았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 시나리오를 들고 발품을 팔았던 게 2005년 봄부터 여름 사이라고 했으니……. 뒤지다 보면 결국 찾을 수 있을 거야.’
한 영화감독이 있다.
독립영화에서 내공을 다진 그 영화감독은 대중영화 입봉작부터 500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차기작에서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두 작품 모두 JM액터스에서 투자 및 제작을 맡아서 엄청난 수익을 거둔 건 보너스였다.
두 작품은 각각 2009년과 2013년에 개봉했다.
중요한 건…….
입봉 전에 시나리오 두 개가 더 있었다는 거다.
여러 영화제작사와 연예기획사에 러브콜을 보내 봤지만 대부분 거절당했고, 그나마 미팅을 한 곳들도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기엔 아쉬운 조건들만을 내걸었다.
결국에는 두 시나리오의 제작을 포기하고 2009년이 돼서야 입봉하게 된 건데…….
‘그 두 작품의 시나리오가 워낙 좋아야 말이지.’
안시현은 제대 후 2009년에 해당 감독의 입봉작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험이 있다.
그때의 출연이 인연이 되어 안시현은 제작되지 못한 두 시나리오를 볼 기회가 있었고,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동시에 아쉬움 또한 느꼈다.
시나리오는 너무 좋았다.
다만 당사자가 이미 제작이 불발 났던 시나리오를 제작할 의지가 없었기에, 두 대본은 결국 안시현의 회귀 직전까지도 제작이 되지 못했었다.
‘제작할 수만 있다면 손익 분기점은 무조건 넘을 거야. 그때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나랑 대표님이 알아봐 주면 되는 거야. 혜인원 쪽에도 시나리오를 요청해 놨으니까, 이렇게 찾다 보면 분명 인연이 닿게 될 거야.’
시나리오들이 퇴짜를 맞았던 정확한 시기를 아는 건 아니지만, 2005년 봄부터 여름이었다는 이야기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을까 싶어 기성 작가와 영화감독들의 대본과 시나리오를 싹 다 훑어봤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자, 안시현은 자신의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는 두 시나리오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둘 중 어느 시나리오를 찾더라도 상관없었다.
두 작품 모두 안시현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고, 어떤 작품에 출연하더라도 맡고 싶은 배역은 정해져 있는 상태이며, 김진석 대표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진가를 알아볼 거라고 믿으니까.
‘어쩌면 대형 연예기획사 쪽으로는 시나리오를 찔러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시나리오를 구할 수 있는 곳에는 최대한 연락을 돌려 보자.’
안시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편지』의 상영이 끝나기 전에, 자신을 흥분하게 만들었던 그 시나리오들을 찾을 수 있길 말이다.
* * *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편지』의 주역인 곽상필 감독과 최정수와 안시현과 김진모는 현지 매체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은 생각 이상으로 능숙한 불어 실력을 보여 주며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안 배우, 불어는 언제 배운 거예요?”
“아, 그게…… 제대로 배운 건 아니고 기자들의 질문 몇 개에만 맞춤형 대답을 준비해 온 겁니다. 아내가 단기 속성 교육을 해 줬어요. 불어로 인터뷰하면 이미지가 좋아질 거라고, 엄청 혼내면서 가르쳐 줬어요.”
그랬다.
안시현이 불어로 인터뷰를 하게 된 데에는 정혜영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편지』가 황금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안시현에게 인터뷰 때 나올 만한 질문 리스트와 그에 따른 맞춤형 대답을 안시현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쳐 줬다.
안시현은 뜻을 이해하기보다는 정혜영이 가르쳐 준 문장을 외우고 발음을 매끄럽게 하는 데에 집중했다. 학습 기간을 생각하면 뜻을 모두 이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혜영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질문 리스트 중 몇 개를 실제 기자들이 질문했고, 안시현은 미리 준비해 온 대답을 막힘없이 해 나갔다.
사실 불어로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안시현의 배우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더 이미지가 좋아져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황금영화제 기간 동안.
안시현은 긴장하지 않고 영화제 자체를 즐겼다.
평소 알고 있었던 해외의 영화감독과 배우들을 만나 인사를 할 수 있었고, 곽상필 감독이 프랑스에서 거주하는 동안 친분을 쌓은 영화감독들도 소개받았다.
그중에는 황금뿌리상을 수상한 전력이 있는 명감독들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안시현에게 제법 관심을 보였다.
“당신의 연기, 아주 인상 깊게 봤습니다. 데뷔할 때는 정석적인 메소드였지만, 점점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해 나가더군요. 『편지』에서 당신이 보여 줄 메소드 연기가 아주 기대됩니다.”
“혹시 해외에 진출할 생각은 없습니까? 당신이라면 대한민국을 넘어 더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더라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집필 중인 시나리오가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출연해준다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관심이 있다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겠습니까?”
상당수의 영화감독들이 안시현의 연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도 안시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안시현에게 해외로 활동 무대를 넓히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슬쩍 건넸다.
이에 안시현은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솔직히 제안에 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야. 해외로 눈을 돌리기보다는 국내 활동에 집중하는 게 맞아. 해외는 일단 대박 나서 수출하는 걸로 만족하자고.’
해외에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히는 게 먼저였다. 몇 년 동안 활동하지 않더라도 최고의 배우라는 인정을 받을 정도가 아니면 해외 진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루고 싶은 게 많이 남은 상황에서 섣불리 해외 진출을 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안시현은 일단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의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성공할 생각이었다.
김진모가 생애 세 번째 연기대상과 두 번째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2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활동을 하고 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해외 활동 제안을 거절한 것과 별개로 안시현은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 및 배우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안시현에게 좋은 동기 부여가 됐다.
앞으로도 자주,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세계 3대 시상식에서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자신의 연기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편지』를 통해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시현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프랑스에 온 최정수와 김진모, 그리고 곽상필 감독까지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었다.
특별 초청이고, 영화제 기간 중 한정적으로 상영하는 것이기에 투표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니까.
그래도 내심 바라는 바는 존재했다.
‘연출상이나 감독상 중 하나만 받자. 황금뿌리상이나 그랑프리, 주연상과 조연상은 힘들 거야.’
연출상과 감독상.
곽상필 감독이 은퇴를 앞두고 황금영화제에서 최고의 선물을 받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이…….
『편지』를 비롯한 한정 상영작들이 도합 나흘 동안 일제히 상영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