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5화>
105화. 제대로
『편지』와 곽상필 감독의 그랑프리상 수상은 대한민국 영화계 전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2년 연속으로 대한민국 영화가 황금영화제에서 그랑프리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었으니까.
언론에서는 대한민국 영화가 몇 년 사이 엄청난 질적 발전을 이뤘다며, 곽상필 감독이 은퇴를 앞두고 큰 업적을 남겼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그랑프리상 수상이 가장 뜻깊은 건 당사자인 곽상필 감독이었다.
곽상필 감독은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의 축하를 받으며 무대 위에 올랐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선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편지』는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걸어온 길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좋은 연기를 해 준 배우들과 눈빛만으로도 제 뜻을 이해하게 된 스태프들과 함께한 덕분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 물러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30년 넘게 제 뒷바라지를 하며 항상 응원해줬던 아내, 그리고 제 페르소나 최정수 배우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세계 3대 영화제 무대에서 뜻깊은 상을 받게 된 곽상필 감독은, 아내와 최정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특히나 현장에 함께 있는 최정수와는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내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해 나갔다.
어느새.
최정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수상 소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영화감독으로서의 곽상필을 볼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말이다.
최정수가 애써 눈물을 참았다. 미소를 지은 채 수상 소감을 끝낸 곽상필 감독에게 기립박수를 쳤다.
‘웃으면서 보내 주자. 내가 눈물을 흘리면 감독님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거야.’
곽상필 감독이 기분 좋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은퇴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말이다.
* * *
결과적으로 『편지』의 주연 배우 세 명과 곽상필 감독은 기분 좋게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귀국 직후.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를 만났다.
“남우주연상 수상은 진짜 아쉽더구나. 고작 3표 차이라니 말이야. 기자들도 진심으로 아쉬웠는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기사를 엄청 내더라고.”
“저도 아쉽긴 한데……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가 연기를 엄청 잘하긴 했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세 표 차이인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뭐, 언젠가 또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생각보다 실망하지 않은 눈치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더 큰 선물도 받았고요. 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애초에 안시현은 남우주연상 수상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황금영화제에 참여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신이 아닌 『편지』와 곽상필 감독이 수상을 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랑프리상을 수상하며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게 됐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의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 연기가 프랑스 현지에서 제법 화제가 됐기에, 아쉽게 불발된 남우주연상 수상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시현은 더없이 만족했다.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3표 차이로 치열한 경쟁을 하며 자신의 연기가 세계 무대에서도 어느 정도 통한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니까.
진심으로 만족하는 안시현의 모습에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그랑프리상 수상이면 큰 선물이 맞지.”
“홍보 효과는 좀 있던가요?”
“두 말 하면 입 아프지. 특히나 그랑프리상 수상한 직후에는 포털 사이트 뉴스 페이지를 거의 도배하다시피 했으니까 말이야. 며칠 후에 최종 홍보 영상 광고 넣고 나서 반응 한번 봐야겠지만, 이 분위기면 개봉 초반에 고전하는 일은 없을 거다.”
“시사회 때 분위기 끌어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요?”
“그럴 수 있기를 바라야지. 아 참. 너 프랑스 가 있는 동안 내가 선물 하나 준비해 놨다.”
“선물이요? 혹시 정산 비율 조정?”
“크흐흐. 도둑놈 심보 보게. 여기서 더 조정해 주면 남는 것도 없어. 너라면 분명 이걸 좋아할 거라 생각해서 준비한 건데, 막상 주려니까 조금 긴장되네. 옛다.”
김진석 대표가 안시현에게 건넨 건 시나리오였다.
첫 장에 적힌 작품명과 이름을 확인한 안시현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김진석 대표와 함께 있는 게 아니라면 진즉 표정이 굳었을 터였다.
표정 관리가 어려운 게 당연했다.
‘이게 왜 대표님 손에 있지?’
그것은 안시현이 황금영화제 전까지 분주하게 찾아 헤매던, 회귀 전에는 제작이 불발되었던 두 개의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어째서 김진석 대표가 이 대본을 가지고 있는 걸까?
‘회귀 전에는 대형 연예기획사 쪽에는 아예 시나리오를 돌리지도 못했다고 들었는데……. 프랑스에 가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시현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슬쩍 김진석 대표에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 보는 이름인데, 신인인가 봐요?”
“독립 영화 쪽에서는 제법 유명한 감독인데, 그 시나리오가 대중영화 입봉작이야.”
“호오. 그래요? 어쩌다 알게 된 거예요? 입봉작이면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텐데요.”
“네 덕분이지 뭐. 혜인원이랑 이곳저곳 통해서 신인 감독들 시나리오 구한다는 소문 듣고서, 직접 날 찾아왔더라고. 딱 한 번만 읽어봐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읽어 봤는데…… 바로 홀려 버렸지 뭐냐.”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기대해도 되겠는데요?”
“너라면 만족할 거라고 확신한다.”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자신이 아는 감독의 성격과 직접 찾아와서 부탁했다는 게 썩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맘때면 한창 여기저기서 퇴짜 맞고 기가 죽어 있을 때니까.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들이댔을지도 모르지.’
사실 전후사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편지』의 개봉 이후 발품을 팔아서라도 찾으려 했던 시나리오가 제 발로 들어왔다는 게 중요했다.
안시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검토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확인했을 때,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입꼬리가 거의 귀에 걸릴 지경이 됐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좋구나. 찾아보려고 시도하기를 잘했어. 알면서도 놓쳤다면 분명 뼈저리게 후회했을 거야.’
시나리오의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스토리와 클리셰를 차용한 건 아니지만,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해 준다는 조건하에 맛이 살아나는 시나리오였다.
해당 감독의 특징이기도 했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1000만 관객을 돌파했으니 틀린 스타일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안시현은 시나리오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제대로 연기해야 맛이 산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회귀 전에도 같은 이유로 시나리오를 보면서 도전 욕구를 느끼지 않았던가.
“시나리오 괜찮네요. 정석적이지는 않지만 캐릭터들의 개성이 살아 있어요. 연기를 제대로 하고, 감독님이 확실한 기준점을 가지고 흔들리지만 않으신다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란다.”
“『편지』가 개봉하기 전에 미팅 잡아 주실 수 있겠어요? 감독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요.”
“미팅이야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만. 어떤 캐릭터로 요청할까?”
“정승상이요.”
안시현이 차기작을 결정했다.
* * *
안시현의 바람과 달리 미팅은 『편지』의 시사회 이틀 후로 미뤄졌다. 안시현이 정승상 캐릭터를 원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감독 쪽에서 조금 더 준비할 게 있다며 미팅을 최대한 늦춰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김진석 대표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간절함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안시현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에 매력을 느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체 제작을 고려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미팅이 늦춰진 게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조금 늦춰진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혹여나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더라도 무조건 우리와 우선적으로 미팅을 하겠다고 확답을 받았다. 연락 오는 곳이 없다는 자학개그는 보너스였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눈길이 가지 않는 시나리오인 건 확실하니까요. 전제 조건이 필요하잖아요.”
“우린 그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입장이고 말이야.”
안시현은 미팅이 미뤄진 게 아쉬웠지만, 그와 별개로 상황을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할 거라……. 뭔지 알 것 같네.’
감독이 준비할 게 뭔지 대충 짐작이 갔으니까.
작품을 같이했던 경험이 있기에 감독의 성향이야 불 보듯이 뻔했다. 영화와 안시현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일단은 시사회와 홍보에 집중하자. 미팅이 잡힌다고 해서 당장 제작에 들어갈 것도 아니니까.
주연 배역 한 명이 정해졌다고 해서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투자나 스태프는 김진석 대표가 자체 제작을 고려하고 있기에 큰 문제가 없을 테지만, 나머지 배역의 확보와 촬영 세트 준비까지 감안하면 빨라도 연말에야 크랭크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단은 『편지』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임을 집중하는 게 맞았다.
안시현은 필요하면 간만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편지』의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 들어왔을 때 제대로 노 저어야지.’
황금영화제 그랑프리상 수상으로 『편지』가 흥행할 만한 판이 제대로 깔렸다. 언론과 대중 모두 『편지』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종 홍보 영상과 시사회, 그 외 홍보 활동 등을 통해 분위기를 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1000만 관객,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야.’
막연하게 바랐던 1000만 관객이 조금씩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단 1명의 관객이라도 더 영화관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곽상필 감독에게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대한 아이디어를 직접 내놓기도 했다.
시사회 사흘 전.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 이슈가 되며 안시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바로…….
-기부천사 안시현, 2005년에만 1억 원 기부!
-비활동 기간의 봉사, 거액 기부로 이어져.
-안시현, 데뷔 후 총 기부 금액 1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바로 안시현의 기부 사실이었다.
‘……이게 이 타이밍에 이슈가 된다고?’
연예계에서 안시현의 봉사 활동과 기부는 이미 알려진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형아, 동생』을 계기로 안시현은 비활동 기간에 꾸준히 봉사 활동과 기부를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까.
때로는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봉사를 하기도 했다.
헌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이 타이밍에 이슈가 된 건, 안시현의 팬클럽 카페에 올라온 한 게시글 덕분이었다.
백혈병 투병을 하던 딸을 얼마 전 떠나보낸 부모가, 그동안 후원해 주고 병원을 방문해서 아이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안시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작성한 게시글이 기사화된 것이다.
그로 인해 안시현의 선행들이 연달아 알려지게 됐다.
사실 안시현은 자신의 선행이 이렇게까지 이슈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중들의 사랑이 없으면 배우 또한 존재할 수 없기에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왔고, 행동에 옮긴 것일 뿐이었다.
다만…….
이슈가 된 것 자체는 나쁠 게 없다고 봤다.
『편지』의 흥행에 도움이 되면 됐지,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테니까.
동시에 확신했다.
‘이거…… 진짜로 판이 제대로 깔린 거 같은데?’
가뜩이나 최종 홍보 영상 이후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휘발유를 통째로 들어부었다고 말이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시사회를 통해 언론과 대중들의 호의적인 시선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