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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07화 (10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7화>

107화. 즐겨도 되겠지?

결과적으로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봉 41일째.

『편지』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세 번째로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개봉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관객을 끌어 모았다.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됐음에도 고작 열흘도 지나지 않아 손익 분기점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가 뜨거웠다.

따라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만 어느 시점에 넘어서느냐가 중요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파한다면 『두밀령』이 기록한 최다 관객 기록인 1270만 관객을 뛰어넘고 신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편지』의 1000만 관객 돌파 시점은 『두밀령』보다 조금 더 빨랐지만, 30일째 이후로 관객 동원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며 『두밀령』을 뛰어넘지는 못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상영 종료를 이틀 앞두고 1210만 관객 동원에 그치며, 『두밀령』을 뛰어넘는 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였다.

‘『두밀령』을 뛰어넘지는 못한 게 아쉽지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인데도 1200만 관객을 돌파했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봐야지. 일본에서도 흥행에 성공했고.’

『편지』의 일본 내 흥행은 한국에서만큼 엄청나지는 않았지만, 3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일본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 정도면 기대를 넘어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의 결과임이 분명했다.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제약이 있음에도 한일 양국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이제 좀 마음 편하게 즐겨도 되겠지?’

사실 『편지』의 캐스팅에 응할 때만 하더라도 안시현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남궁수민을 제대로 연기하는 것.

영화의 흥행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생각했고, 주연 배우로서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 해석과 연기를 보여 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이슈들을 통해 흥행에 청신호가 켜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이 분주히 홍보에 임한다면 보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예능 출연이건 인터뷰건, 이미지 소모가 과하지 않은 선에서 대부분 받아들이게 됐다.

『편지』가 상영하는 동안 안시현은 사흘에 한 번 꼴로 스케줄을 소화했다. 김진모와 함께 일본에서도 다수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편지』가 조금이라도 더 흥행할 수 있도록 거들었다.

그토록 부담스러워 하던 예능 프로그램마저도 무려 네 개나 출연하면서 말이다.

상영 종료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며 사실상 최종 스코어가 확정 난 분위기가 돼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연말까지의 스케줄은 팬 미팅과 팬들과 함께하는 봉사 활동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네 개, 비공식적으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당분간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의 상영 종료 하루 전.

안시현이 정헤영과 함께 늦은 저녁 영화관을 찾았다.

상영 막바지인 데다 심야 영화이다 보니 상영관 안 관객은 안시현과 정혜영이 전부였다.

“이거 완전 전세 낸 기분인데요?”

“그러게요. 간만의 데이트인데 시선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겠네요. 자기는 벌써 몇 번 봐서 재미없는 거 아니에요?”

“이번이 네 번째인데…… 괜찮아요.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거든요.”

“하긴. 저도 좋은 작품들은 몇 번을 봐도 재밌고, 매번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편지』도 여러 번 보고 작정하고 분석하는 팬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물론 내용은 안 봤지만요. 아. 스포일러 피한다고 그 동안 엄청 고생했다니까요.”

“주연 배우로서 장담할게요. 고생한 만큼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거예요.”

황금영화제에서 상영을 했을 때 한 번, 한국와 일본에서의 언론 시사회에서 각각 한 번씩.

안시현은 도합 세 번 『편지』를 관람했다.

세 번 모두 제각각 감상이 달랐고, 시사회 이후 간만에 다시 보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 또한 됐다.

‘이번에는 출연 배우가 아닌 관객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보자고.’

안시현은 배우가 아닌 관객으로서 『편지』를 감상했고, 이전에 세 차례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남궁수민을 바라보게 됐다.

‘정태 선배가 연기를 잘해 준 덕분에 남궁수민의 존재감이 더욱 살 수 있었어.’

남궁수민의 캐릭터성은 분명 매력적이다.

시나리오 집필 당시 곽상필 감독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악역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남궁수민을 구상했고, 안시현의 곽상필 감독의 의도를 100% 이해하고 연기해 준 덕분에 한국 영화 역사상 손에 꼽히는 악역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시현은 남궁수민의 캐릭터성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어필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정태의 공이 크다고 봤다.

박치홍.

남궁수민의 회사 직원이자 이정우에게 정체가 발각되기 전까지는 유일하게 남궁수민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으며, 남궁수민의 연쇄살인에 감명을 받아 그를 돕고 때로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까지 하는 캐릭터다.

결국에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남궁수민에게 살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남궁수민이 편지를 통해 경찰들을 도발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오수정과 황경신을 미끼로 이정우를 불러내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게 박치홍이라는 거다.

만약 박치홍 캐릭터가 없었다면?

남궁수민은 단순하게 잔인한 사이코패스에 그치며 평면전인 캐릭터가 되었을 거다.

박치홍이라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사이코패스가 단순히 감정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며 왜곡되어 있다는 걸 드러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존재감에 비해 출연 분량이 5분을 겨우 넘기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건데…….

‘5분 출연했음에도 신 스틸러 역할을 제대로 해냈으니 성공한 거라고 봐야지. 필모그래피만 좀 더 잘 쌓는다면, 주연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몰라.’

『너와 나의 시간』에서 안시현이 우정태를 정영철 역에 추천했던 건, 회귀 전의 사연이 안타까웠던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기대를 하고 추천을 한 건 아니었다. 준수한 연기력을 인정받고 조연 배우로서 꾸준히 활동할 수만 있어도 성공한 추천이라고 봤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우정태의 성장세는 안시현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뛰어났다.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두밀령』과 『편지』에서 신 스틸러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 내며 제법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박정상에게 듣기로는 제법 비중 있는 배역의 캐스팅 제안 또한 제법 오고 있었다.

빠르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자신만의 스타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 가는 중이다.

안시현은 우정태가 주연 배우로 성장하길 바랐다.

『편지』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준 우정태라면 자질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주연 배우들 모두 연기를 잘했지만…… 자기의 입장에서 보면 정태 씨의 캐스팅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정태 씨가 연기한 박치홍 캐릭터 덕분에 남궁수민의 캐릭터성도 살아났으니까요. 아, 진모 씨 덕분에 분위기가 마냥 무겁지 않게 흘러간 것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존재감은 당신이랑 최정수 배우가 최고였고요.”

『편지』의 관람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정혜영은 안시현과 비슷한 관점에서 『편지』의 후기를 차분하게 늘어놓았다.

이에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당신의 안목은 남다른 것 같아요.”

“지금껏 본 영화가 몇인데요. 일반인치고는 좋은 안목을 지니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안시현은 정혜영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학 때부터 영화 감상이 취미였기 때문인지, 정혜영의 안목은 일반인치고는 뛰어난 수준이었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영화의 핵심과 흥행 여부를 판가름할 정도의 수준은 됐다.

“이거……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받아서 당신에게 가장 먼저 평가를 받아 봐야겠는데요?”

“아, 맞다. 자기 다음 주에 미팅 있다고 했죠?”

“네. 백숙 뜯으면서 미팅하기로 했어요. 감독님이 시나리오 집필하면 끼니 거르는 일이 많다고 해서, 몸보신 좀 시켜 드리려고요.”

“건강식품 좀 챙겨 줄까요?”

“오. 그러면 좋죠.”

안시현은 황금영화제에 다녀오자마자 원하는 시나리오를 받고서 곧장 미팅을 하기를 바랐지만, 감독의 요청에 따라서 미팅이 『편지』의 상영이 마무리가 된 이후로 미뤄지게 됐다.

그 사이 시나리오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안시현은 미팅을 하면서 받아보게 될 수정된 시나리오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 올렸다.

*   *   *

『편지』는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1214만, 일본에서 3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영을 마무리했다.

2005년 대한민국 최고의 흥행작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였다.

훗날 순위가 밀리기는 하겠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의 성과가 평가절하를 당하지는 않으리라.

『편지』의 상영 종료로부터 사흘 후.

안시현이 김진석 대표와 박정상과 함께 가평에 있는 한 계곡 근처의 백숙집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가게에서 바로 옆에 위치한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나름 명당 자리였다.

음식을 주문하고 몇 분 뒤.

최봉팔이 키 180cm 정도에 호리호리한 몸매, 다크서클이 짙은 사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석 대표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적극적으로 사내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허허허.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잘 지내셨죠?”

“아…… 네, 네. 보내 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몸보신 제대로 했습니다.”

“앞으로 더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크랭크인 들어가면 체력이 받쳐 줘야 하거든요.”

“안 그래도 매니저님이 운동 좀 하라고…….”

“우리 최 대리가 운동 쪽으로는 준전문가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괜찮은 피트니스 센터를 소개시켜 줄 겁니다. 자,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최봉팔과 사내가 자리에 앉은 뒤.

안시현이 물을 따라주며 통성명을 시도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안시현입니다.”

“아, 네. 양, 양상효 감독입니다. 이제야 통성명하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시나리오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당장에라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싶을 정도로 캐릭터가 살아 있더군요.”

“아…… 감사합니다. 수정한 시나리오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없네요. 혹,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기존 시나리오대로 가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어요? 수정된 대본도 좋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양상효 감독.

훗날 1000만 관객 돌파 감독이 될 그는, 큰 키와 마른 체격에 소심한 성격이었다.

안시현과 시나리오에 관해 몇 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였다.

‘평소에는 소심하다가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는 분이셨지. 특히나 작품과 관련해서는 신념이 뚜렷하시기도 했고 말이야.’

물론 작품과 관련해서는 소심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 줬고, 그 판단은 대부분 영화의 흥행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곤 했지만 말이다.

식사가 끝난 직후.

양상효 감독은 챙겨 온 서류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서 안시현에게로 내밀었다.

“수정한 시나리오인데 마음에 들까 모르겠네요. 어떤 부분을 수정했냐면…….”

“감독님, 죄송한데 제가 읽으면서 바뀐 부분을 파악해도 될까요?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네. 그렇게 하세요.”

『칠전팔기』.

안시현이 차기작으로 유력한 시나리오를 차분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

‘역시 정승상의 캐릭터성에 변화를 줬구나.’

안시현은 시나리오의 변화를 대번에 파악했다.

정승상.

안시현이 원한 배역이자 『칠전팔기』의 원톱.

안상효 감독은, 정승상의 캐릭터성을 안시현에게 어울리는 옷으로 수정해 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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