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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08화 (10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8화>

108화. 말리지 않을게요

황금영화제를 다녀온 이후 안시현이 확인했던 『칠전팔기』의 시나리오는 회귀 전에 확인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수정된 시나리오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원톱 배역인 정승상을 안시현에게 어울리는 방향으로 수정한 상태였다. 연기력이 보장되지 않으면 캐릭터성이 부각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맛이 사는 캐릭터라니, 내 성향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안시현은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배역을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회귀 후 데뷔작인 『나는 간첩입니다』에서의 리수철 역을 시작으로, 절정의 연기력이 필요한 배역들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양상효 감독은 그런 안시현의 성향을 감안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해 온 것이었다.

양상효 감독이 캐스팅된 주연 배우에게 맞춰 캐릭터를 수정하는 스타일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기에,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 자체는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정승상 캐릭터가 더욱 마음에 들게 됐을 뿐이다.

‘아…… 이러면 안 할 수가 없잖아.’

결과적으로 양상효 감독의 과감한 선택은 안시현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시나리오를 확인한 순간부터 차기작으로 무조건 『칠전팔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수정된 시나리오를 확인하고 나니 그 결심이 한층 굳건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정승상 캐릭터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안시현의 굳은 표정 때문일까?

양상효 감독은, 시나리오 검토를 모두 끝마친 안시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뇨. 완전 마음에 들어요. 정승상 캐릭터, 무조건 저한테 맡겨 주세요. 필요하다면 공개 오디션도 가능해요.”

“공, 공개 오디션이라뇨. 그럴 리가 있나요. 배우님이 정승상 캐릭터를 맡아 주신다면 저야 대환영이죠. 근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네, 얼마든지요.”

“안시현 배우님이라면 좋은 조건의 작품을 많이 제안 받으셨을 텐데, 그중 제 작품을 선택해 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도전하고 싶어서요.”

“……도전이요?”

“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님이 그랬거든요. 정점에 올랐을 때 도전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거라고요. 정승상 캐릭터는 제 배우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될 거예요.”

회귀 후 안시현이 지금껏 맡아 온 배역들은 모두 캐릭터성이 달랐다.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연기 변신을 하며 흥행에도 성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했을 때 새로운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주지성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안시현의 회귀 전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수월하게 캐릭터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으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연기한 건 사실이지만, 최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기 위한 판단을 이어 나간 것일 뿐 도전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칠전팔기』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흥행 여부는 머릿속에서 지우자. 정승상을 제대로 연기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어.’

흥행한 작품에 꾸준히 출연한 것만큼 좋은 필모그래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언론들은 데뷔 이후 줄곧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진모와 안시현이 흥행 보증수표이며, 엄청난 몸값에도 러브콜이 쏟아진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안시현의 전략이 맞아떨어졌다는 증거다.

다만…….

『편지』의 촬영이 마무리될 즈음, 안시현은 자신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판단들만을 한 게 아닐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최정수가 말했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양상효 감독의 시나리오를 찾은 거다.

안시현이 회귀 전 양상효 감독의 시나리오에 매료되었던 건,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당시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생각은 이번 생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복된 판단들도 인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지금, 양상효 감독의 시나리오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칠전팔기』 말입니다, JM액터스와 혜인원이 절반씩 투자를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스태프 구성과 캐스팅 등 필요한 부분은 저희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한데…… 저같이 볼 거 없는 감독에게 그래도 괜찮나요?”

“허허허. 볼 게 없다니요.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를 들고 저를 찾아오셨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JM액터스와 혜인원은, 『칠전팔기』가 최고의 여건에서 제작된다면 손익 분기점을 넘길 거라 확신하고서 투자하려는 겁니다.”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와 양상효 감독의 대화를 들으며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정승상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해 나갔다.

‘휴식기 동안 액션 스쿨부터 다니자. 운동선수들과 친분이 있는 배우가 누가 있더라…….’

안시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   *   *

『칠전팔기』.

국내 대회에서는 1위를 놓친 적이 거의 없지만, 세계 대회에서 불운과 부상으로 일곱 번이나 입상에 실패한 국가대표 유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도전기를 그리는 영화다.

안시현이 흥행을 생각하지 않고 연기만을 생각한 건, 『칠전팔기』가 스포츠 영화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를 핵심 소재로 삼은 영화 중에서 손익 분기점을 돌파한 영화는 손에 꼽는다. 그나마도 손익 분기점을 아슬아슬하게 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가 전무한 건 아니다.

‘대부분 실패했지, 모두가 실패한 건 아니니까. 양상효 감독님은 두 작품 연속 성공하신 분이고.’

훗날 양상효 감독이 스포츠 영화로 500만 관객과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스포츠 영화는 흥행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박살냈다.

양상효 감독이라면 『칠전팔기』 또한 훌륭하게 이끌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포인트를 잘못 짚어 관객들로부터 반발을 살 일은 없다고 봤다.

‘애초에 『칠전팔기』가 양상효 감독님이 기획한 스포츠 4부작의 시작이기도 했고. 두 시나리오의 제작이 불발되며 결국 2부작에서 그치긴 했지만 말이야.’

안시현이 흥행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건, 스포츠 영화로 뚜렷한 성과를 냈던 양상효 감독의 이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몇 년 후의 일이긴 하지만, 독립영화를 통해 쌓은 내공이 어디 가겠는가.

원톱인 자신은 연기에만 집중하면 될 터였다.

『편지』의 상영이 종료되고 휴식기를 맞이하게 됐지만, 안시현은 휴식 대신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7월 초.

안시현이 액션 스쿨을 방문했다.

『너와 나의 시간』에서 인연을 쌓았던 액션 스쿨의 정광홍 부대표가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배우님! 『편지』 잘 봤습니다!”

“요즘 잘나가시던데요? 액션 스쿨 부대표 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에이. 부대표야 짬 때문에 된 거죠. 액션 배우로서는 이제 겨우 이름 알리고 있습니다. 매니저님한테 설명은 들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이 될 텐데…… 괜찮겠어요?”

“괜찮으니까 혹독하게 가르쳐 주세요. 대역을 쓰지 않고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요.”

“참고로 제가 훈련 시키면 10명 중에 8명은 도망갑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전 오히려 좋은걸요. 전 유도 국가대표에게 훈련을 받을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스포츠 영화이니만큼 필요하다면 대역을 쓰겠지만, 모든 부분에서 대역을 쓸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심지어 안시현은 그마저도 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신에서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연기를 해내는 게 안시현의 목표였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정승상 역을 맡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액션 스쿨에 먼저 연락을 취했다.

훗날 액션 배우로서 유명세를 떨치게 될 정광홍 부대표는 전 유도 국가대표 출신이다. 그에게 훈련을 받을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몸치를 탈출해 그럴 듯한 유도 실력을 갖추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일단 체력 테스트부터 해 보죠. 자, 저랑 같이 가볍게 뛰어 봅시다. 기초 체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처음에는 체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훈련을 진행하게 될 테니, 최대한 잘하는 게 좋겠죠?”

“체력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제대 이후로도 안시현은 좀처럼 아침 운동을 빼놓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이라면 배우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좋다고 자부했지만…….

“허억…… 허억…….”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실감해야 했다.

일반인 중에서는 체력이 좋은 편에 속하겠지만, 액션 배우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한참 부족한 체력이라는 게 증명되고 말았다.

실제로 안시현은 호흡을 거칠게 내뱉으며 바닥에 드러누운 반면, 정광홍 부대표는 별일 없었다는 듯 여유롭게 안시현의 상태를 체크했다.

“네. 일단 체력부터 길러야겠네요. 그래도 체력이 좋은 편이라서 오래 걸리지는 않겠어요. 여름 동안만 부지런히 땀 좀 흘립시다.”

“숨, 숨도 헉헉거리지 않는 건 반칙 아닙니까?”

“자고로 액션의 기본은 체력이거든요. 숨 돌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오세요. 많이 마시면 토하니까 살짝 목만 축이시고요.”

그날 이후.

지옥의 하드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7월과 8월 사이 안시현은 평일에는 아침 운동을 한 이후 곧장 액션 스쿨로 출근, 늦은 저녁이 돼서야 퇴근을 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식을 취했지만, 그마저도 근육통과 피로로 인해 골골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 모습을 본 정혜영은 진심으로 걱정을 했다.

“……어디서 학대당하고 오는 건 아니죠?”

“아, 국가대표 따라 하려다가 죽어나게 생겼어요.”

“자기가 국가대표를 연기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긴 하네요. 자기 심각한 몸치잖아요.”

“그걸 이겨 내려고 이번 작품을 하겠다고 한 거예요. 앞으로 액션 연기를 할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대역을 쓰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무래도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게 분위기가 더 잘 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요. 그러다 골병들라.”

안시현이 몸치라는 건 이제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다.

예능 프로그램에 몇 차례 출연하며 안시현이 몸치라는 건 제법 알려지게 되었다.

창피할 법한데도 안시현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능에서 유머 코드로 적절하게 이용하여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다만…….

배우로서 몸치를 꼭 극복하고 싶긴 했다.

몸치라서 액션 연기를 하지 못한다, 액션이 필요한 배역을 맡기기는 어렵다는 편견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모든 배역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 몸치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칠전팔기』의 정승상을 연기하면서 대역을 쓰지 않으며 몸치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

그것이 안시현이 죽어라 훈련을 받는 이유였다.

물론 목표가 있다고 훈련이 쉬운 건 아니었다. 매일 매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정광홍 부대표의 훈련 스타일은 맨정신으로 버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오기로 버텨 나갔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다가왔다.

다행히…….

“체력은 이 정도면 됐고, 이제 본격적인 훈련으로 넘어가 볼까요? 물론 꾸준히 체력 단련도 이어 가야 하는 거 알죠? 부족한 체력은 곧 부상으로 이어집니다. 특히나 선수가 아닌 일반인은 더 주의해야 해요.”

안시현이 지쳐 나가떨어지기 전에 체력 훈련이 예정보다 보름이나 빨리 마무리가 됐다.

체력 훈련 다음은 낙법 훈련이었다.

낙법 훈련 시작 10분 째.

정광홍이 미소를 지은 채 팩트 폭력으로 안시현의 아픈 부분을 쿡쿡 찔러 댔다.

“『너와 나의 시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체력이 좋아져도 몸치인 건 여전하네요. 일단 유연성부터 길러야겠는데요?”

“지금 상태로 훈련받으면 안 되겠죠?”

“몇 군데 부러지고 싶으면 말리지 않을게요.”

“……유연성부터 기르죠.”

액션 배우가 되기까지는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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