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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09화 (10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9화>

109화. 다음 단계로

9월 첫째 주 일요일.

안시현은 간만에 최창국과 만났다.

『편지』의 대본 리딩 당시, 남궁수민의 연출과 관련된 대화를 나눈 이후로 간만의 만남이었다.

최창국과 안시현이 각각 다른 이유로 바빴기에 좀처럼 마주칠 만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이사하고 차 바꾸셨다면서요?”

“아하하. 네. 아내 기 살려 주는 의미에서 큰맘 먹고 돈 좀 썼습니다. 인센티브가 두둑해서 대출 안 끼고 처리할 수 있었네요.”

“MBS 나와 성공하신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일본 유학 다녀온 이후 매일매일이 행복합니다. 연봉 두둑하고 인센티브 빵빵한 것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대표님이 연출과 관련해서 제 의견을 100% 수렴해 주신다는 겁니다.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해 주셔서, 정말로 다 하는 중이랄까요.”

“근데 결과 좋았잖아요. 『베니스의 연인』 정말 재밌게 봤거든요. 2004년에 최고 시청률 58%가 넘는 드라마가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김 작가님이 대본 잘 써 주시고, 대표님이 캐스팅 라인 잘 잡아 주신 덕분이죠. 저야 뭐 연출 조금 거들어 준 정도고요.”

MBS 퇴사 후 일본 NHK로 유학을 다녀온 최창국은, 이후 JM액터스의 콘텐츠 제작팀 팀장으로서 대박 행보를 이어 나갔다.

최창국의 입사 후 JM액터스가 제작 및 투자를 맡은 드라마와 영화는 도합 세 작품.

그중 최창국이 연출을 도맡았던 『두밀령』과 연출 보조를 자처했던 『편지』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JM액터스에게 거액의 수익을 안겨 주었다.

드라마의 경우 김희숙 작가와 다시 한번 손을 잡아서 2004년 가을에 방영한『베니스의 연인』이 최고 시청률 58.4%, 평균 시청률 46.9%를 기록하며 2004년 최고의 드라마로 우뚝 썼다.

뿐만 아니라 JM액터스 소속 PD들에게 연출 노하우를 전수해 주며, 최창국이 연출을 전담하지 않는 작품의 연출력 또한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센티브로 제법 많은 돈을 수입을 챙기게 된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안시현이 JM액터스 소속 배우들보다도 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최창국을 만난 건,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추석 연휴 끝나고 곽상필 감독님 은퇴식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그때 쓸 영상이 하나 있는데, 팀장님이 편집을 도맡아 주셨으면 싶어서요. 부탁드려요 될까요?”

“물론이죠. 곽상필 감독님은 저 또한 존경하는 감독님이에요. 제게 편집을 맡겨 주신다면 오히려 영광이죠. 어떤 콘셉트인가요?”

“일단…….”

대한민국 영화계 거장의 은퇴식.

안시현은 화려한 피날레를 준비하기 위해 최창국 PD에게 도움을 청했다.

*   *   *

추석 연휴 열흘 전.

안시현은 팬 미팅을 진행했고, 팬 미팅 다음 날에는 팬 100명과의 봉사 활동을 스케줄을 소화했다.

무려 2000명의 팬들과 함께하는 무료 팬 미팅에, 안시현의 팬들은 진심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굳이 무료로 진행할 필요가 있겠냐고, 매년 팬 미팅을 해 주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유료로 진행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이에 안시현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돈 많이 벌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팬들을 위해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그렇게 진행된 팬 미팅에서 팬들은 부쩍 마른 안시현의 얼굴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했다.

“차기작을 위해 휴식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어서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아픈 곳 전혀 없다 하더라고요.”

회귀 이후.

안시현은 철저하게 건강 관리를 하면서, 매년 건강검진을 받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회귀 전 췌장암을 앓았던 경험이 매 순간 건강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정혜영과 간혹 와인을 마실 때가 아니면 술을 입에 안 대고, 강박적으로 아침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 관리에 힘을 썼다.

덕분에 건강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 흔한 감기조차도 군대에서 한 번을 제외하면 걸리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지친 기색을 드러내자, 정혜영이 몸에 좋은 음식들을 꾸준히 챙겨 주면서 회귀 이후 가장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차기작은…… 기사를 보신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영화이고, 아마 내년 봄에나 촬영에 들어갈 것 같아요.”

팬 미팅에서 차기작에 대한 예고를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팬 미팅 하루 전.

JM액터스에서는 보도 자료를 통해 안시현이 양상효 감독의 『칠전팔기』에 출연할 것임을 알렸다.

덩달아 캐스팅이 시작되었다.

확실한 연기력이 필요한 일부 배역은 JM액터스 소속 중견 배우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배역은 캐스팅 제안과 공개 오디션을 통해 해결할 계획이었다.

김진석 대표와 양상효 감독은 빠르면 연말 전까지, 늦어도 2006년 설 연휴 전후로는 캐스팅 라인을 모두 확정 짓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만 되면 최고이긴 하지. 그 전까지 내가 준비를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안시현은 캐스팅라인이 확정되기 전까지 훈련이 마무리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추석 연휴 이후.

수많은 영화계 관계자들과 배우, 그리고 팬 1000명이 모인 가운데 한 공연장에서 곽상필 감독의 공식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곽상필 감독님의 은퇴식에 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염치불구하고 진행을 맡게 된 페르소나가 인사드립니다.”

은퇴식의 진행은 최정수가 맡았다.

최정수는 자신이 없다면서 극구 사양했지만, 페르소나가 아니면 누가 맡겠냐는 배우들의 강력한 권유에 마지못해 진행을 맡게 됐다.

부담스러워하던 것과 달리 최정수는 아주 매끄럽게 진행해 나갔다.

곽상필 감독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 곽한일 감독의 감사패 전달을 시작으로, 몇몇 공식 행사 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질의응답이 마무리될 즈음.

무대 뒤편에 설치해 놓았던 스크린을 통해 영상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JM액터스 대표실.

헛기침을 한 김진석 대표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미리 준비한 멘트를 이어 나갔다.

-이야. 군대 막 다녀와서 혈기왕성하던 입봉 감독이, 어느새 은퇴를 한다니까 새삼 우리가 늙었다는 게 좀 실감이 나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편지』 덕분에 미련이 없어졌다고 했지? 그럼 된 거야. 남은 인생, 무거운 짐 좀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살자.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온 건 곽상필 감독이 입봉 이후 지금까지 함께했던 배우들의 영상 편지를 편집한, 무려 1시간짜리 영상이었다.

은퇴식을 시작하기 전.

곽상필 감독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배우들이 준비해 왔을 이벤트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일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실제로 수많은 배우들의 영상 편지에도 곽상필 감독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몇몇 배우들이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전할 때 눈시울이 붉어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버지. 어릴 때는 제게 마냥 잘해 주시다가, 제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말한 이후부터는 남남이라도 된 것처럼 엄해지셨던 거 기억나세요? 처음에는 되게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다 이해해요. 아버지가 엄하셨기에…….

영상 편지의 마지막을 장식한 곽한일 감독의 말을 듣고서는 끝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영상 편지가 끝난 직후.

곽상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의 주연 배우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감동에 젖어 있는 곽상필 감독을 헹가래하며 목청껏 소리쳤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거장이, 공식적으로 메가폰을 내려놓게 됐다.

*   *   *

팬 미팅, 팬들과 함께하는 봉사 활동, 곽상필 감독의 은퇴식, 거기에 김진모와 함께한 일본 팬 미팅까지.

9월과 10월 사이 네 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과정에서도 안시현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액션 스쿨에서 정광홍 대표와 하루 종일 살다시피 했고, 스케줄이 있는 날에도 시간을 내서 체력 훈련만큼은 무조건 했다.

‘배우로서의 발전을 위해, 몸치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야.’

안시현이 몸치를 극복하려고 한 건, 단순히 액션 연기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몸치로 인해 연기를 할 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를 촬영할 당시.

최정수는 딱 한 번 안시현에게 움직임과 관련해서 진지한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쉴 때 유연성 좀 길러 보면 어떨까? 가끔 보면 행동이 어색해 보일 때가 있어. 연기가 워낙 좋아서 크게 티가 나진 않는데, 언젠가는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행동이 받쳐 주지 않아서 NG가 나면 억울하지 않겠어?”

연기란 감정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캐릭터성을 잘 드러낸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표현에 어울리는 움직임 또한 동반되어야 비로소 연기가 완성된다는 게 최정수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안시현은 『편지』에서 별장 신을 연기하며 아쉬움을 느꼈었다.

본래 이정우와 남궁수민의 피 튀기는 난투극이 되었어야 할 장면이, 안시현이 몸치인 탓에 남궁수민이 다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걸로 수정된 탓이었다.

‘몸치는 굳이 액션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연기를 할 때도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어. 아주 가끔 보면 내 행동이 어색하다는 평가도 있고…….’

안시현은 뛰어난 연기력을 일찌감치 인정받으며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연기력이 워낙 출중해서 가려지긴 했지만, 움직임이 다소 부자연스러울 때가 있다는 평가가 종종 들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안시현은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편지』를 촬영하며 안시현은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확고하게 정립했다. 솔직한 말로 여기서 죽어라 노력한다고 해서 연기력이 일취월장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발전에 목이 말랐다.

배우로서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고 싶고, 좋은 연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어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몸치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을 극복하게 될 테니까, 보다 완벽한 배우에 한발 다가서게 될 테니까.

문제가 있다면…….

유연성이라는 게 하루 이틀 노력한다고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유연성의 부족으로 유도는 제대로 배워 보지도 못한 채 낙법을 비롯한 기본기만 주야장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고난이도 낙법은 다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기본기만을 반복시켰다.

물론 정광홍 부대표 나름의 판단이 존재했다.

“솔직히 안 배우님이 선수 수준으로 기술을 배울 게 아니잖아요? 영화에서 필요한 동작들만을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하겠다는 건데, 그 정도면 고난이도 기술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요. 기본기 위주로 다지는 쪽이 더 좋은 판단이죠. 물론…… 올해 안에 기본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요.”

문제는 안시현이 유연성과는 영 친해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시현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하루하루 훈련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200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안시현은 당연하게도 액션 스쿨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혜영과의 크리스마스 기념 데이트는 저녁에 할 예정이었고, 그 전까지는 액션 스쿨에서 훈련을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덕분에 덩달아 액션 스쿨에 불려 나온 4년째 솔로인 정광홍 부대표는, 투덜거리면서 안시현이 낙법 연습을 하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광홍 부대표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안 배우님.”

“허억…… 허억…… 네.”

“노력한 덕분인지 유연성이 제법 좋아졌어요.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고난이도 낙법과 상급 기술 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훈련을 시작하고 약 6개월.

안시현이 마침내 큰 산 하나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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