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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10화 (11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0화>

110화. 다시 찾으시겠네

안시현이 정승상 캐릭터를 대역 없이 연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양상효 감독은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주요 배역의 캐스팅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일단 정승상과 경쟁할 유도 선수 배역은 발품을 판 끝에 평소 운동이 취미인 배우와 대학교 때까지 유도 선수를 했던 배우를 캐스팅하기에 이르렀다.

올림픽 출전 신을 촬영할 때 해외 선수들과 맞붙는 문제는, 유도 선수 출신의 외국인 코치의 도움을 받아 현역 선수들을 캐스팅할 수 있었다.

선수들에게는 배우들처럼 제대로 된 연기를 요구할 수 없지만 괜찮았다.

『칠전팔기』에 등장하는 유도 선수 중 연기력이 필요한 건 안시현이 등장하는 정승상과 그와 경쟁하는 선수들 정도였다.

외국인 선수들의 경우 연기가 아닌, 실제 경기를 한다는 느낌으로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유도 신 관련 자문은 조율 끝에 전 국가대표 유도 코치와 액션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정광홍 부대표가 함께 맡아 주기로 결정이 됐다.

두 사람이 현역 시절 선후배 관계였기에 큰 의견 충돌 없이 자문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 외에 연기력이 필요한 코치와 정승상의 가족과 친구 배역은, JM액터스의 추천과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적절하게 캐스팅하기에 이르렀다.

12월 말.

공개 오디션을 마친 양상효 감독이 김진석 대표와 술 한 잔 기울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캐스팅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확실히 독립 영화랑은 다르네요.”

“자본 규모가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긴 하죠. 그래도 수월하게 마무리된 편입니다.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지 못해서 제작 미뤄지는 영화나 드라마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작품은 계속해서 쏟아지는데, 배우와 자본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해요. JM액터스가 아니었다면…… 솔직히 제작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대표님 찾아뵙기 전까지 30번 넘게 퇴짜 맞았거든요. 그때 전,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대표님을 찾아간 거였어요.”

양상효 감독의 푸념에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연예계에서 몸담으며 느낀 바를 양상효 감독에게 솔직하게 말해 줬다.

“이 바닥에 오래 있다 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군요. 능력 있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감독님의 재능을 알아봐 줬을 겁니다.”

“아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솔직히 흥행에 실패해 대표님이나 안시현 배우님에게 피해를 주게 되진 않을까 걱정돼서 툭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네요.”

“마케팅은 제가 확실히 할 테니, 감독님께서는 한 가지만 명심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신을 굽히지 말아 주세요. 그게 꺾이는 순간, 작품은 무너지게 될 겁니다.”

“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지기키겠습니다.”

김진석 대표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양상효 감독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첫 만남 이후.

그는 내심 양상효 감독이 좀 더 자신감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타고난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기에, 단기간의 노력만으로 고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진석 대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양상효 감독의 성격과 별개로 『칠전팔기』의 제작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봤다.

‘성격이야 제각각이니 뭐라 할 수 없지. 영화를 만드는 데에 문제만 없으면 되는 거야.’

그는 양상효가 감독으로서 좋은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다. 설사 중간에 문제가 생길지라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제작 과정에서 생길 문제를 조율해 주기 위해 곽상필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고문으로서 곽상필이 맡은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JM액터스가 계약한 감독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것, 그리고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개입해 해결하는 것.

『칠전팔기』의 제작 중에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괜찮았다.

적어도 『칠전팔기』에 출연하는 배우 중에서는 곽상필의 뜻을 거스를 정신 나간 배우는 없을 테니까.

*   *   *

2005년 말.

『편지』의 상영이 끝난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영화계가, 『왕의 사람』의 개봉과 함께 몇 달 만에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왕의 사람』은 『편지』처럼 개봉 전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은 영화는 아니다.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주연으로 낙점했기에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저조한 게 사실이다.

다만 영화를 보고 온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면서 빠른 속도로 흥행을 이어 나갔다.

개봉 첫 주에 95만 명을 불러 모은 『왕의 사람』은 개봉 열흘 만에 200만 명, 13일 만에 300만 명을 돌파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흥행에 가속도가 붙는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왕의 사람』의 1000만 관객 돌파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봤다.

사극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환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 동성애 코드를 전적으로 채용했다는 점 등을 문제로 꼽았다.

물론 언론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달리 『왕의 사람』의 상승세는 가히 폭발적이었지만 말이다.

2005년 12월 28일에 개봉한 『왕의 사람』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이변이 없는 한 1000만 관객 돌파가 유력해졌다.

이에 안시현은 흐뭇함을 느꼈다.

『왕의 사람』의 주연인 환관 장신 역을 맡은 건, 김희숙 작가의 단막극 『스무 번』의 주연을 맡으며 브라운관 데뷔를 했던 배우 안광석이었으니까.

‘제대하자마자 공개 오디션 보고 첫 주연을 맡은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라……. 광석 형 연기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야지.’

『스무 번』에서 각각 단역과 주연으로 출연하며 인연을 쌓은 것을 계기로, 안시현과 안광석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2003년 전후를 기점으로 제법 친해지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군 입대를 한 덕분이었다.

제대 후, 『왕의 사람』의 공개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안광석은 안시현에게 조언을 구했다.

“오디션에서 합격한 건 연극을 제외하면『스무 번』이 전부라 걱정되네. 게다가 주연을 노리는 거라서 너무 욕심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눈높이를 낮춰야 하나 싶기도 해.”

“제 생각에는…….”

오디션에서 매번 낙방했던 안광석에게 안시현은 최선을 다해서 조언을 해 줬고,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주연 배역을 따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안광석은 『왕의 사람』과 관련된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안시현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 게 없음에도 제대하자마자 자신과 전속 계약을 체결해 준 김진석 대표에 대한 감사 인사 또한 빼놓지 않았다.

1월 말.

길었던 훈련을 끝마친 안시현이 정혜영과 함께 간만에 영화관 데이트를 했다.

선택한 영화는 『왕의 사람』.

환관 장신 역을 맡은 안광석과, 장신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광기 어린 왕 연산군을 제대로 연기해 낸 송강식의 연기에 안시현은 연신 감탄을 토해 냈다.

‘광석 형 연기는 제대하고 나서 더 물올랐네. 강식 선배님이야 명불허전이고. 연산군의 광기를 과하지 않게 잘 표현해 줘서 영화의 분위기가 확 살았어.’

간만에 한 데이트는 즐거웠고, 영화는 재밌었다.

『왕의 사람』을 보며 안광석과 송강식의 연기에 연신 감탄했고, 덕분에 안시현은 간만에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순순하게 즐기지 못하고 이것저것 분석하는 걸 보면 배우가 맞긴 하네. 죽어라 운동만 했더니 아닌 줄 알았잖아.’

*   *   *

지난 몇 달.

정광홍 대표와 함께 했던 혹독한 훈련은 1월 말을 기점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다.

“이 정도면 연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촬영 전까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나서 점검만 하죠.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저보다는 부대표님이 고생하셨죠. 저 갱생시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솔직히 고치기 힘들 줄 알았는데…… 막상 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긴 하는군요. 더 좋아졌으면 최고였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인가 싶습니다.”

“사람 구실하게 됐으니 충분해요. 이제 어디서 몸치라고 놀림 받을 일은 없잖아요.”

안시현은 끝끝내 정광홍 대표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유연성과 유도 실력 모두『칠전팔기』의 정승상 배역을 연기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확언을 들은 이후에야 훈련을 끝마쳤다.

당분간 주 2회 액션 스쿨을 계속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지금껏 배운 걸 점검하는 차원에서의 방문이다. 훈련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사람이 죽어라 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몸치를 이렇게 극복하게 될 줄이야…….’

사실 안시현은 자신이 몸치를 극복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회귀 전에도 몸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노력을 해 봤지만 모두 성과가 없었으니까.

다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몸 관리에 무지했고, 지금은 회귀한 이후 죽어라 몸 관리에 신경 쓰면서 살아왔다. 몸치인 것은 변함없었지만 신체 상태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었다.

덕분에 준전문가인 정광홍 부대표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 내면서 어느 정도 몸치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엄청 유연해지거나 한 건 아니다.

딱 평균 수준의 유연성을 지니게 된 게 전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최소한 정승상 역을 대역 없이 연기하는 데에 발목을 잡을 정도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데이트 다음 날.

안시현이 JM액터스를 방문했다.

캐스팅 라인이 확정된 상황에서 양상효 감독에게 다음 스케줄을 확인하며, 캐릭터 구축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는데…….

주차장에 주차한 직후.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지금 주차장입니다. 바로 올라갈게요.”

-죄, 죄송한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급하게 미팅 요청이 들어와서요. 진짜 미안해요.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스케줄을 잡아서…….

“그래요? 그럼 정상 형이랑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미팅 끝나면 전화 주세요.”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애석하게도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을 바로 만나지 못한 채 기다려야만 했다.

급하게 미팅이 잡혔다고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양상효 감독의 성격상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면 거절하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 박정상을 만나 사내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며 안시현이 물었다.

“무슨 미팅이 그렇게 갑자기 잡혔어요?”

“허 참.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무례하게 미팅 잡은 경우는 처음 봤다.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배역 문제로 이야기할 게 있다고, 지금 당장 미팅 못 하면 하차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라. 아오. 나 같았으면 바로 하차하라고 했을 텐데, 감독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회의실로 들어가시더라고.”

순간 안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과 양상효 감독의 미팅이 미뤄진 건, 한 배우의 매우 무례한 행동 때문이었다.

“으음. 배역 문제라니, 뭘까요?”

“대충 들어 보니까 비중 문제 같던데?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혹시 몰라서 곽 고문님이 같이 들어가셨거든. 아무리 후안무치여도 곽 고문님 앞에서도 계속 그럴 수 있겠어?”

박정상의 말을 들은 안시현이 실소를 흘렸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고, 동시에 해당 배우의 어리석은 판단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 감독님 배우 한 명 다시 찾으시겠네. 하차하고 싶다면 하차해야지 뭐 어쩌겠어?’

안시현은 확신했다.

양상효 감독에게 본론을 꺼내는 순간, 해당 배우는 『칠전팔기』에서 하차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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