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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11화 (11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1화>

111화 왜 여기에 있어?

종종 자신이 맡은 배역의 비중을 늘리고자 수작을 부리는 배우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 경우 업계에 안 좋은 이야기가 퍼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해당 작품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배우들이, 무리수를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배역의 비중이 늘기를 바랐다.

이미지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자신이 하차를 하면 난감한 타이밍을 노려 비중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면, 감독이나 담당 PD의 입장에서는 거절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지금처럼 캐스팅 라인이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드문 케이스였다.

‘보나마나 양 감독님이 소심한 성격에 눈치를 살피니까, 하차한다고 윽박지르면서 적당히 분위기 좀 잡으면 비중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은 거겠지. 쯧.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할까.’

양상효 감독은 소심하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다만 작품과 관련해서는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특히나 배우와 스태프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걸 선호하며, 선을 넘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더러 보여 주곤 했다.

실제로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과 작품을 함께할 당시, 배역의 비중을 놓고 불만을 토로한 배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똑똑하게 기억했다.

물론 회귀 전의 일이다.

독립 영화에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지금 시점에서 양상효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미팅을 요청한 배우가 알 턱이 없었다.

그렇기에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던진 것이리라.

‘뭐…… 제작 들어가기 전에 크게 한 번 터지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대본 리딩이랑 크랭크인 시작하고 나서 일 터지면 귀찮아지니까.’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과 회의실 안에 있는 배우의 무모한 행동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덕분에 내심 양상효 감독을 얕잡아 보며 어떻게 하면 배역의 비중을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배우들에게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 줄 수 있을 테니까.

*   *   *

회의실에 들어온 양상효 감독은 조심스럽게 미팅을 요청한 배우의 눈치를 살폈다. 배우와 함께 JM액터스 사옥을 찾아온 매니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마 곽상필이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면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배, 배역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고요?”

“아, 네.”

미팅을 요청한 배우가 헛기침을 했다.

곁눈질로 곽상필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나 양상효 감독 대신 곽상필이 미팅을 주도하면 적당히 분위기만 살피다가 다시 미팅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보아하니 그냥 따라 들어온 느낌인데…… 슬쩍 긁어 보면서 간 좀 봐 볼까?’

곽상필이 아무 반응도 없이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보면서 일단 툭 건드려 보기로 했다.

“제가 『칠전팔기』 말고도 몇 작품의 오디션을 같이 봤거든요? 그중 제법 비중 있는 역에 합격해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소속사 대표님하고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대표님께서는 좀 더 비중 있는 쪽으로 출연하기를 원하시더라고요.”

“으음. 혹시 대사를 늘려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죠.”

순간 양상효 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공개 오디션을 끝낸 뒤, 김진석 대표는 양상효 감독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줬다.

“아마 크랭크인을 하고 보름 정도는 배우들과 기싸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인 감독을 만만하게 보는 배우들이 꽤 있거든요. 어떻게든지 대사 한 마디라도 더 늘리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이기도 하고요.”

“기, 기싸움은 자신 없는데요.”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선을 넘는다 싶으면 뒤를 생각하지 말고 강하게 밀어 붙어요. 그 뒤로는 배우들이 감독님 앞에서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조언을 들었기에 대본 리딩이 시작되거나 크랭크인 이후에 배역의 비중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배우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이야.

걱정했던 것과 달리, 굳이 기싸움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었다. 혹시나 싶어 곽상필과 같이 들어왔지만 도움의 손길 또한 필요치 않았다.

막상 상황이 닥치자, 양상효 감독은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으니까.

첫 독립영화를 촬영할 당시.

조연을 주연으로 격상시켜 달라는 배우와 충돌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합당한 의견과 좋은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단순히 비중이 적다는 이유로 대사를 늘려 달라고 하면 어려워요.”

“그래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배우가 마지막으로 곽상필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며, 그는 마침내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는데, 두 작품에 동시에 캐스팅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 필모그래피를 위해서라도 더 비중 있는 배역을 선택해야 하는 점, 이해해 주세요.”

“…….”

양상효 감독이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배우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양상효 감독의 굳은 표정을 보며 자신이 협상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했다.

『칠전팔기』의 공개 오디션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JM액터스와 혜인원이 투자를 했고, 안시현을 일찌감치 주연 배우로 낙점했음에도 쉽지 않았다.

스포츠 영화의 흥행 여부를 불안해하는 시선이 워낙 많았고, 무엇보다 대중영화 경험이 전무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게 불안 요소로 지적됐다.

오디션 참가자는 제법 있었지만 기대한 것만큼의 연기력을 보여 주는 배우는 찾기 힘들었다.

이는 양상효 감독과 마주하고 있는 데뷔 3년 차 배우가 당당하게 배역의 비중을 늘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자신이 빠지면 공백을 채우기 힘들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 대사를 늘려 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어쩔 수 없죠. 하차하세요.”

“……네?”

“하차하시라고요. 배역의 비중에 불만이 있으면 하차해야지 어쩌겠어요.”

순간 배우와 매니저의 낯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적절한 선에서 대사를 늘려 주는 걸로 결론을 낼 줄 알았는데, 이렇게 흔쾌히 하차하라고 하다니?

방금 전까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곤란해하는 게 눈에 보이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배우가 당황하는 사이, 나란히 앉아 있던 매니처가 애써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감독님. 이렇게 쉽게 결정하실 게 아니라, 일단 저희 쪽에서 준비해 온…….”

“곽 고문님.”

양상효 감독은 배우의 말을 무시한 채 곽상필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홍보팀에 배우님이 배역의 비중 문제로 감독과 트러블이 있어 하차하게 됐다는 보도 자료를 내 달라고 전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소에 깍듯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극존칭을 하던 양상효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했음에도 곽상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무실을 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 강단이면 걱정 안 해도 되겠어.’

혹여나 양상효 감독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면 자신이 개입할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양상효 감독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겁도 없이 하차를 무기로 대사를 늘려 달라고 요구한 배우를 진짜로 하차시켜 버렸다.

해당 배역을 다시 캐스팅하려면 고생 좀 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의 무리한 요구를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결국 계속 휘둘리게 되어 작품의 방향성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 영화치고 흥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양상효 감독이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게 캐스팅 된 배우들의 귀에 들어가면, 『칠전팔기』를 촬영하는 동안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으리라.

‘대본 리딩 때 분위기 엉망일까 봐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어.’

곽상필 감독은 양상효 감독이 부탁한 내용을 홍보실에 있는 그대로 전달해 줬다.

그 직후.

양상효 감독이 홍보실에 들어왔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어요?”

“아…… 이야기 좀 더 하자는 거 무시하고 나왔습니다. 직원분께 밖으로 모시라고 했으니까 아마 지금쯤 사옥 밖으로 나갔을 겁니다.”

“허허허. 잘하셨어요. 보도 자료는 2시간 내로 언론사들에게 일제히 배포될 거라네요.”

“……제가 잘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연 중 한 명이 하차를 하게 됐다.

3월 초부터 대본 리딩이 예정된 상황에서 새로운 배우를 구해야 한다. 시간이 워낙 촉박해서 제대로 된 배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시간을 10분 전으로 돌린다면, 선택을 번복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합리적인 의견 제시와 아이디어가 아닌, 단순히 비중이 적다는 이유로 대사를 늘려 달라는 건 감독의 영역을 침범하는 후안무치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에요. 양 감독님은 작품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예요. 일벌백계했다고 생각하세요. 배우 캐스팅은…… 제가 추천을 좀 해도 될까요?”

“그,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양상효 감독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곽상필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깍듯하고 매사에 열정적인 양상효 감독이 마음에 들었다.

소심한 성격은 문젯거리가 될 수 없었다.

방금 전처럼 작품과 관련해서 자신만의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   *   *

그로부터 30분 뒤.

감정을 추스른 양상효 감독이 JM액터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안시현과 마주했다.

“늦, 늦어서 죄송해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죠?”

“아니에요. 정상 형에게 대충 듣기는 했는데, 조연 배역에 공백이 생겼다면서요?”

“그렇게 됐어요. 대본 리딩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 위주로 제안을 해 보려고요. 일단 대표님과 곽상필 선배님께서 몇몇 배우를 추천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그 배우들에게 우선적으로 제안을 해야겠죠.”

“시나리오가 워낙 좋아서 캐스팅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후우. 그러기를 바라야죠.”

안시현은 공백이 생긴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그 부분은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이 알아서 하리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떠올린 배우를 두 사람이 떠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케줄이 비어 있는 배우 중, 해당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아마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겠지. 설마 해외까지 나가서 데려오려고 하겠어? 이름값에 비해 배역의 비중이 아쉬워서 캐스팅 제안을 거절할 것 같기도 하고. 신경 쓰지 말고 내 일이나 잘하자.’

안시현은 공백이 생긴 배역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이 할 일에 몰두하기로 마음먹었다.

3월부터 있을 대본 리딩을 위해, 이제 슬슬 캐릭터 구축에 박차를 가할 때가 다가왔으니까.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안시현은 정광홍 액션 스쿨 부대표로부터 공백이 생긴 배역의 캐스팅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안 배우님, 같이 훈련할 파트너 왔어요.”

“파트너요? 아, 캐스팅 끝났나 보네요?”

“저도 어제 감독님께 전달받았어요. 코치 역할이니만큼 기본기 정도만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고요.”

“기본기면 금방 하겠네요.”

“그걸 몇 달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익히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안 배우님과는 구면일 테니까 훈련받으면서 어색하지는 않겠네요. 옷 갈아입고 나오면 인사부터 해요.”

몇 분 후.

한 배우가 도복을 입은 채 탈의실에서 나왔다.

동시에 안시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성웅 선배?”

“오랜만이다, 시현아. 전역 이후 두 번째인가?”

해당 배역의 대체 배우로 낙점된 건 류성웅이었다.

안시현이 예상했던 대체 배우 후보군 중 한 명이었지만, 캐스팅 제안을 거절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북파』 이후로 푹 쉬면서 캐스팅 제안을 죄다 거절하던 양반이 왜 여기에 있어? 조연 중에서도 대사가 적은 편인 코치 역할을 맡으려고 귀국을 해?’

대한민국 최초의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인 『북파』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이후, 류성웅은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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