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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12화 (11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2화>

112화. 좀 어려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류성웅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대한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인지도를 확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꾸준히 활동을 이어 나가기만 해도 다져놓은 입지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러브콜이 들어왔음에도 모두 거절하고 돌연 연극 무대에 서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거기까지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연극판에서 기반을 다진 배우들 중,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떠나 다시 무대로 돌아와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으니까.

문제는 그다음 행보였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이후, 소속사와의 전속 계약이 만료된 류성웅은 온갖 러브콜을 모두 뿌리치고서 돌연 프랑스행을 선택했다.

잠시 연기를 쉬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게 인터뷰를 통해 밝힌 이유였다.

류성웅의 프랑스행 소식을 들은 배우 중 아마 가장 당황한 건 안시현이었으리라.

‘작품 욕심이 많아서 휴식 기간을 줄이면서까지 마음에 드는 작품에 출연하던 양반이 무슨 일이지?’

류성웅의 성격은 회귀 전과 후가 극명히 달랐다. 『빌딩 숲』을 기점으로 후배를 무시하며 얕잡아 보던 성격은 완전히 사라졌다.

성격이 달라졌으니 행동 패턴 또한 달라진다고 한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 2년 가까이 연기 활동을 이어 나가지 않을 줄이야.

그랬던 류성웅이 1년 6개월여 만에 복귀작으로 『칠전팔기』를 선택한 것이다.

조연 중에서 비중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닌, 『북파』에서 보여 준 존재감에 비하면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 있는 정승상의 코치 역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시현은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당황한 게 사실이지만, 간만에 류성웅을 만났고 그가 함께해 준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대한영화제 때 잠깐 한국 들어온 거 말고는 계속 프랑스에 있었던 거예요?”

“연기는 계속하고 있었어. 프랑스 예술 영화에서 단역 위주이긴 했지만 말이야.”

“……단역이요?”

“곽 감독님이 추천해 주셨거든. 덕분에 불어 실력 엄청 늘었잖아. 머리도 좀 식혔고. 슬슬 복귀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곽 감독님이 직접 프랑스까지 찾아와 캐스팅 제안을 해 주셔서 냉큼 한다고 해 버린 거야.”

류성웅은 연기 활동을 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몇몇 예술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고, 연극 무대에도 서면서 꾸준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상필 감독이 직접 프랑스까지 찾아와 러브콜을 하자 『칠전팔기』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보니까 하고 싶더라고. 무엇보다 너랑은 영화를 한 번 더 같이 연기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류성웅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밀었다. 덩달아 안시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선배가 함께해 주면 저야 든든하죠.”

사실 류성웅의 합류는 안시현의 입장에서 반기면 반겼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일단 연기력이 확실했다.

공백기를 우려했지만 꾸준히 연기를 했다고 하니, 그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게다가 인지도 또한 꽤나 있는 편이다.

햇수로 벌써 3년이나 흐르긴 했지만, 『북파』에서 보여 준 엄청난 존재감은 대중들의 기억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칠전팔기』는 안시현을 원톱으로 내세운 영화다.

문제는 캐스팅 시 이름값보다는 철저하게 연기력 위주로 캐스팅을 했다는 거다. 박국영을 정도를 제외하면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진 배우가 없을 정도로 이름값에서는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안시현의 이름값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영화의 홍보와 흥행을 위해서는 인지도 있는 배우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다.

그리고 류성웅의 합류로 인지도가 더해졌다. 이는 영화의 홍보와 흥행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 그리고 나 JM액터스랑 계약했다. 한국에서 다시 연기하려면 소속사 있어야 하잖아. 양상효 감독님이랑 미팅하고 나서 김 대표님이 제시한 비전을 듣고 마음을 홀랑 뺏겨 버렸지 뭐냐.”

“연예인들이 방송사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싶다는 거요?”

“어. 아마 나 말고도 그 말을 듣고서 계약을 결심한 배우들 꽤나 있을걸?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소속 연예인 케어를 잘하면서 자체 콘텐츠 제작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잖아.”

“연예기획사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이긴 하죠.”

연극 무대에 선 이후로 소속사와의 전속 계약이 만료됐던 류성웅은, 귀국 후 러브콜을 보낸 JM액터스의 손을 잡게 됐다.

데뷔 이후 줄곧 류성웅과 함께했던 매니저까지 덩달아 입사하게 된 건 보너스였다.

‘뭐……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만 몰두하기에는 JM액터스가 최고이긴 하지.’

모든 소속사들은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JM액터스 또한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배우가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어 한다면 최고의 선택지인 게 사실이다.

안시현은 류성웅의 합류를 진심으로 반겨 줬다.

길어질 수도 있는 대화는 잠시 뒤로 미뤄 놓고서 탈의실로 향했다. 액션 스쿨을 방문한 목적인 주 2회 훈련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으음…… 류성웅 배우님도 심각하네요. 유연성은 꽝이고, 체력 테스트도 한번 해 볼까?”

안시현은 처참한 유연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류성웅의 모습을 보게 됐다.

류성웅 또한 꽤나 몸치였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안 배우님보다는 덜하네요. 영화에서 업어치기 말고는 나오는 동작이 없다니까, 크랭크인 전에는 대역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안시현만큼 심각한 몸치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영화 내에서 류성웅이 맡은 배역이 보여 줘야 할 유도 기술이라고는 업어치기가 전부라는 것.

때문에 기준점이 안시현에 비해 확 낮았다.

“훈련이 조금 따라오기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힘들다 싶으면 편하게 포기하셔도 돼요. 한 신뿐이니 대역을 써도 크게 상관없을 테니까요.”

“아뇨. 제가 직접 연기하고 싶어요. 조금 힘들어도 되니까 부탁드릴게요.”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크랭크인 전까지 스케줄 짜 보도록 하죠.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까요?”

류성웅은 의욕이 넘쳤다.

2년여 만의 한국 복귀이니만큼 대역 없이 업어치기 신을 선보이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   *   *

다음 날.

류성웅의 JM액터스 전속 계약 소식과 『칠전팔기』의 합류 소식이 보도 자료를 통해 알려졌다.

간만에 안시현을 만난 김진모는 류성웅의 소식을 전해 듣고서 인상을 팍 썼다.

“난 그 양반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면 반대하지 그랬어. 대표님이 의견 물어봤을 때 괜찮다고 했다며?”

“사람이 진짜로 바뀐 것 같아서 함께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한 거야. 배우로서는 괜찮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뭐…… 모두가 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류성웅은 개과천선했다.

더 이상 후배들에게 이유 없는 시비를 걸거나 온갖 명분을 만들어 트집을 잡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잘해 주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김진모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저 첫 만남이 워낙 별로였기에 인간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안시현은 그런 김진모를 이해했다. 그리고 김진모의 태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막상 함께 작품을 한다면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좋은 호흡을 보여 줄 거다. 연기를 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관계라면 크게 상관없다고 봤다.

“시현이 네 입장에서는 좋겠네. 그 양반 정도면 인지도가 꽤 있는 편이잖아.”

“꽤 정도가 아니지. 솔직히 놀랐어. 비중이 큰 배역은 아니라서 거절할 줄 알았거든. 성웅 선배 정도면 슬슬 주연을 노려 볼 만도 하잖아.”

“생각이 있겠지. 어쩌면 『칠전팔기』로 감각 좀 되살리고, 하반기에 주연을 노리려는 것일 수도 있고.”

류성웅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안시현이 향후 행보에 대해 슬쩍 물어봤지만, 차분하게 검토할 거라는 말을 해 준 게 전부였으니까.

추측하는 바는 있었다.

류성웅을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시켜 준 영화이자, 그의 인생 두 번째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캐스팅에 발판이 되어 줄 영화.

2008년 초에 개봉할 스릴러 영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혜인원을 통해 듣기로는 그 영화감독님이 성웅 선배의 캐스팅에 목을 매고 있다 했으니까. 프랑스에 두 번이나 찾아가서 시나리오를 건넸다고 했으니…… 러브콜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해당 영화는 안시현에게도 캐스팅 제안이 왔었다. 투톱 중 류성웅을 점찍은 배역이 아닌, 다른 배역에 안시현이 응해 주기를 바랐다.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

안시현은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었다.

원래대로라면 김진모가 맡아야 할 배역을 자신이 맡는다는 게 꺼려지기도 했거니와, 이미 안시현은 『칠전팔기』에 마음을 완전히 뺏긴 상태였다.

게다가 『칠전팔기』 이후 한동안 제법 긴 휴식기를 가져갈 생각이기도 했고 말이다.

‘회귀 전에는 그 작품 이후로 진모랑 성웅 선배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졌지만…… 이번에는 그럴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안시현이 거절한 배역은 결국 김진모가 맡게 됐다. 여러 후보군에게 동시에 캐스팅을 제안했고, 그중 김진모만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이었다.

류성웅이 캐스팅에 응한다면 회귀 전과 같은 캐스팅라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뭐…… 두 사람 다 알아서 잘하겠지. 난 캐릭터 구축에만 신경 쓰자. 대본 리딩 전까지 완성하려면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니까.’

안시현은 류성웅과 김진모의 관계나 두 사람의 차기작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기로 했다.

두 사람 다 알아서 제 앞가림을 하는 배우다.

지금은 두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정승상 역 캐릭터 구축을 고민해야 할 때였다.

“그나저나…… 아침 운동을 할 때마다 보면서 뜬금없이 점심 같이 먹자고 불러내서는 대게를 다 사 주네. 너 혹시 나한테 부탁할 거 있냐?”

정곡을 찌르는 김진모의 질문에 안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탁할 거 있어. 이건 뇌물이고.”

“이야. 대놓고 뇌물이라고 하니까 많이 먹어야겠네. 간만에 대게 먹으니까 맛있긴 하다.”

“많이 먹어. 배 터지도록 사 줄 수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포장해서 가져가도 되고.”

“무슨 부탁인데 그래?”

안시현이 잠시 뜸을 들였다.

한동안 속으로만 담아 둔 채로 고민하던 문제를 김진모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부탁을 하려면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캐릭터 구축이 잘 안 되네.”

“네가 웬일이냐. 지금까지는 매번 흠잡을 부분 없이 완벽하게 구축했잖아.”

“이번에는 좀…… 어려워.”

김진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시현은 데뷔 이후 줄곧 완벽한 캐릭터 구축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완벽하게 캐릭터를 만드는 걸 보며 부러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안시현이 어렵다는 말을 꺼낼 줄이야.

“의외네. 네가 캐릭터 구축 때문에 애를 먹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해 봤거든.”

“항상 잘되면 얼마나 좋겠냐. 이번에는 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명확하게 갈리고 있어. 이대로라면 완성도가 확 떨어질 거야.”

자신만만하게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안시현은 정승상의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고 있었다.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 가고 있긴 했다.

다만 잘되는 부분과 안 되는 부분이 명확하게 갈렸다. 유도 선수로서의 모습은 경험이 없는 안시현 혼자서 구축하기에는 완성도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광홍 부대표를 비롯한 운동선수 출신 업계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긴 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캐릭터 구축에 아쉬움이 남았다.

고민 끝에 안시현은 정승상 캐릭터의 구축과 관련해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눈치챈 거 같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홍영준 선수 좀 소개시켜 줄 수 있을까?”

정승상 캐릭터의 모티프가 된 선수를 직접 만나서 취재하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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